[내가 사랑하는 아이] 19. 범옷

2021.02.18 19:55:51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9. 범옷

 

  우리 집에 같은 띠는 용띠 둘, 원숭이띠 둘이다. 돼지띠는 하나이다. 아빠하고 아들은 용띠이고 엄마하고 큰딸은 원숭이띠, 작은딸을 할머니하고 같은 돼지띠이다. 용띠끼리는 서른여섯 살 차이가 나고 원숭이띠끼리는 스물넷, 돼지띠끼리는 예순 터울이다. 곁님은 두 딸 배내꿈을 꾸고 나는 아들 배내꿈을 꿨다.

 

  아들이 열 살 무렵, 뜻대로 안 되어 골을 내는데, 스스로한테 풀어 몸을 다친다. 학교에서 꾸지람을 들으면 낮에 나오는 밥을 굶는다. 밥 굶는다고 집에서처럼 누가 달래 주지도 않는데 배가 고파도 안 먹는다. 밖에서 동무한테 한 대 얻어맞아 아프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리든지, 누가 때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으면 되는데, 아들은 운다. 잘 울어서 동무하고 어울리지 못할까 싶어 늘 한숨이 나왔다.

 

  시월이 되었다. 풀죽지 말라고 아들을 북돋는다. 이튿날이 열 돌이다. 토요일에 동무를 집으로 부르고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나는 잠옷 하나를 마련했다. 태어난 날 아침에 아들을 기쁘게 달래면서 학교에 보내고 싶었다. 늦잠 자는 아들을 깨우면서 빛꾸러미(선물)를 건넸다.

 

  “자, 네가 새롭게 태어난 날에 빛나라고 빛꾸러미를 줄게.”

 

  겉종이를 뜯어서 펼쳐 보더니 아들이 폴짝폴짝 뛴다. 멈추고는 가지런히 개켜서 책상에 얹는다. 싱글벙글 웃으며 아들은 몸을 살래살래 흔든다. 곧 학교에 가야 하는데, 학교 가려다 다시 침대에서 벌러덩 눕는다. 이리저리 몸을 뒹굴고 다리를 바르르 한 번 털며 눈을 부릅뜨고 깔깔깔 웃는다. 아주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날 저녁 여섯 시 조금 넘어서야 하루 배움을 마치고 들어왔다. 집에 오자마자 아침에 내가 준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잠옷을 입은 뒷모습은 노랗고 까만 점이 찍혔다. 앞가슴은 하얗다. 얼룩무늬 범탈을 머리에 쓴다. 기다란 꼬리에도 얼룩무늬가 있다. 잠옷을 다 입자 한 마리 범으로 탈바꿈했다. 아들은 바닥에 헤엄치듯 미끄러지면서 엎드리고 범같이 사나운 얼굴을 하고 찡그린다.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범 흉내를 냈다.

 

  “엄마, 옷이 당겨서 팔이 안 올라가, 엄마가 내 팔 잡아 줘!”

  “범은 팔이 네 팔보다 짧아서 그래.”

  “엄마, 다리도 당겨, 사다리 갖고 와!”

 

  이제는 팔다리가 당긴다고 마룻바닥에 엎드리더니 팔다리를 쭉 뻗는다. 뻗은 모습이 호랑이 가죽을 벗겨 놓은 듯했다. 좋아하고 기뻐하며 혼자 귀엽게 뒹군다. 아들 몸짓에 한바탕 웃는 저녁이었다.

 

  “근아, 얼른 와.”

  “아까 범이 죽은 거 봤잖아!”

  “얼른 온내이.”

  “범이 죽었다고 했잖아! 나 범한테 잡아먹혔다.”

  “좋은 말로, 엄마가 상냥하게 말할 적에 어서 못 오나!”

  “나 죽었다니깐!”

 

  아들 공부를 좀 시키려고 했는데 아들은 어디 가고 죽었다는 범이 말대꾸했다. 몇 마디 장난을 하고 책상 맡에 마주앉았다.

 

 “근데 엄마, 나 어떻게 앉아? 꼬리 때문에 안 돼!”

 

  범 꼬리가 궁둥이에 붙었다. 배겨서 책상다리로 바로 앉지 못했다. 아들은 범 꼬리를 옆으로 살짝 돌리고 몸을 눕히고 책을 펼쳤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깔깔 웃다 보니 한 문제도 풀지 못하고 아들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범옷을 입은 하루는 풀이도 안 하고 그냥 잘 넘긴다. 이럴 때는 우리 아들 머리가 잘 돌아가는가. 아니, 아이들은 이렇게 공부보다는 어머니하고 놀고 싶은 마음일까. 나는 아이들한테 너무 공부만 말하고, 같이 놀 생각을 안 하지 않았을까. 따지고 보면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데, 집에서는 그냥 같이 놀아도 좋다. 아들이 귀여운 짓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두 딸한테서 미처 느끼지 못한 모습을 본다. 두 딸하고도 이렇게 공부보다는 놀이를 더 하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어쩌면 이제야 아들하고 풀어내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들은 열 살이 되도록 오줌을 쌌다. 범옷을 입을 적에는 웃옷에 달린 두 단추를 열고, 오줌 눌 때는 아래쪽에 있는 넷째 단추를 쓴다. 범옷을 입으면 범처럼 의젓하게 달라지면서 오줌을 싸는 버릇도 고치리라 생각했다.

 

  용띠 해에 아들이 왔다. 꿈에서 범을 만났다. 아이가 오늘 입은 노란빛 범옷하고 내 꿈속에 만난 범하고는 빛깔이 다르지만 깊은 멧골에서 새끼 범을 만났다. 범은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범하고 나는 서로 뚫어지게 보았다. 그림에서 본 듯한 꿈이다. 범 꿈을 꾸었다고 열 돌을 맞이한 날에, 이 빛으로 범을 닮은 옷을 생각해서 샀다.

 

  잠든 아들 곁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다. 아주 깊이 잠든 아들이 꿈에서 범을 만나 뛰어노는 듯했다. 범옷을 입은 아들을 살며시 껴안고 자리에 눕혔다. 범옷을 입은 날부터 아들은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싸지 않았다. 참말로 범처럼 의젓하게 달라졌는지 모른다.

 

2021.02.18. 숲하루

숲하루 글쓴이 jung156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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