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12 다북지다

2021.03.01 09:17:16

시골에서 스스로 태어난 말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에서 짓는 글살림”은 숲을 사랑하는 눈빛으로 시골자락에서 아이들하고 살림을 짓는 길에 새롭게 맞아들여 누리는 우리말 이야기입니다.

 

숲에서 짓는 글살림
12. 시골사람이 지은 말 ‘다북지다’


  이웃님이 보내 온 글을 읽는데 ‘설렁하다’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설마 ‘썰렁하다’를 잘못 쓰셨나 하고 바라보았어요. 이러다가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말이거든요. 우리말은 아 다르고 어 달라요. 더욱이 우리말은 아랑 어만 다를 뿐 아니라, 아랑 야가 다르고, 어랑 여가 다르지요. 사랑 샤가 다른 우리말이면서, 싸랑 사에다가 쌰까지 다 다른 우리말입니다.


  낱말책에서 ‘설렁하다’를 찾아봅니다. 올림말로 나옵니다. 말결로 살피면 ‘설렁하다 < 썰렁하다’인 얼거리예요. 다만 사람들은 으레 설보다 썰을 붙인 ‘썰렁하다’를 쓰지 싶습니다. ‘설렁하다’처럼 살짝 가붓하게 쓰는 분은 드물어요.


  말결을 더 살피면 ‘설렁하다·썰렁하다’뿐 아니라 ‘살랑하다·쌀랑하다’가 있어요. 그때그때 느낌이나 기운을 살펴서 온갖 낱말을 쓸 만해요. 어느 때에는 ‘설렁설렁하다’나 ‘쌀랑쌀랑하다’를 쓸 수 있지요. 마음으로 스미는 결을 고스란히 살려서 이야기할 만합니다.


  익산에 사는 이웃님이 몇 가지 말씀을 여쭈셨어요. 그분은 퍽 예전부터 ‘다북지다’라는 낱말을 쓰셨다고 합니다. 때로는 ‘다북차다’라는 낱말도 쓰셨대요. ‘다북지다·다북차다’라는 말을 처음 들을 무렵이든, 이 말을 그분 이웃님이나 동무님한테 쓰든, 누구나 이 말이 무엇을 나타내거나 가리키는가를 잘 느끼거나 알았다고 해요. 딱히 낱말책을 뒤적여 보지 않아도 도란도란 나누던 낱말이라더군요.


  나중에 낱말책을 살펴보는데 ‘다북지다’도 ‘다북차다’도 없어서 놀라셨대요. 낱말책에 없는 말을 함부로 써도 되느냐 싶었대요. 낱말책에 없는 말을 아무나 지어서 쓴 셈이 아닌가 하고 느끼셨대요.

 


  우리나라는 우리말꽃뿐 아니라 이웃나라 말씨를 담은 낱말책을 지은 발자취가 매우 짧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을 담을 낱말책을 짓겠다는 생각도 거의 못했다고 할 만합니다. 이웃나라에서 우리말꽃을 먼저 지었고, 우리는 한참 늦게 지었어요.


  낱말책을 지은 발자취를 살피면, 낱말책을 어떻게 짓느냐 하는 틀부터 제대로 서지 않은 채 서둘렀습니다. 총칼에 억눌리던 무렵이니 이 총칼을 떨치고 일어나려는 물결을 타고서 낱말책을 엮었다고도 할 만합니다. 총칼나라가 물러난 뒤에는 한겨레가 갈린 채 싸웠고, 이다음에는 새삼스레 서슬퍼런 총칼나라가 오래도록 짓밟았어요. 이러다 보니 우리말꽃은 꼴이나 결을 제대로 가닥을 잡지 못한 채 자꾸자꾸 서둘러 나오기만 합니다. 이 틈바구니에서 일본 낱말책을 슬쩍 베낀 책이 불티나게 팔리며 엉뚱한 일본 한자말이 마구잡이로 퍼지기까지 했어요. 이 엉킨 실타래는 요즈막까지도 씻어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터를 보면 거의 모두 서울이나 큰고장에서 살지만, 총칼나라가 쳐들어올 무렵이나 1945년이나 1960∼70년 언저리만 해도 거의 모두 시골에 살았어요. 그래서 우리말꽃 틀을 처음 짜는 일을 하던 예전 분들은 ‘시골말 찾기’나 ‘시골말 캐기’를 했습니다. 아무래도 지난날 배움길을 걷던 분은 들숲이나 바다가 아닌 서울에 있는 배움터에 모여 책으로만 익힌 터라, 막상 말꽃지기(국어학자)로 일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말(시골말)을 잘 몰랐어요. 이분들은 하나같이 낱말책에 어떤 낱말을 실어야 알차며 아름다운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1945년 언저리에 글꽃(문학)을 편 적잖은 분은 이녁이 나고 자란 곳에서 쓰던 고장말을 글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예전에는 그랬지요. 예전에는 글꽃을 한다고 할 적에 서울말이 아닌 시골말로 글을 지었어요. 김유정이든 백석이든 이효석이든 현덕이든, 이녁이 나고 자란 고장에서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말로 글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낱말책을 지은 발자취가 매우 짧아도 ‘시골말을 고스란히 담아낸 글꽃’을 발판으로 삼아서 낱말을 모을 수 있었어요.


  오늘날 우리나라 글꽃을 살피면 거의 모두 서울말입니다. 전라말이나 경상말로 글을 쓰는 분은 찾아볼 길이 없어요. 제주사람이 제주말로 글을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인천이나 수원이나 안산이나 고양이나 부천 같은 고장에서 인천말·수원말·안산말·고양말·부천말로 글을 하는 이도 찾아볼 길이 없어요. 다 다른 고장에서 나고 자라면서 다 다른 말결을 물려받은 숨결을 꾸밈없이 살려낸 글꽃은 오늘날 이 땅에서 씨가 말랐다고 할 만합니다.


  이런 흐름이나 얼개를 헤아려 본다면, ‘다북지다·다북차다’가 낱말책에 아직 안 오른 까닭을 짚을 만해요. 낱말책에 없기 때문에 쓰기에 멋쩍거나 꺼릴 만한 낱말이 아니라, 아직 낱말책에 제대로 담지 못한 시골스럽고 수수한 우리말 몇 가지인 ‘다북지다·다북차다’를 우리 이웃님이 입에서 입으로 지키면서 가꾸어 왔다고 생각해요.


  ‘다북지다·다북차다’는 아직 낱말책에 없으니 말뜻을 새롭게 붙여야 합니다. 먼저 두 낱말하고 비슷한 다른 낱말을 헤아려 봅니다. ‘소복하다·수북하다’가 낱말책에 올라요.


  ‘소복하다’는 “1. 쌓이거나 담긴 물건이 볼록하게 많다 2. 식물이나 털 따위가 촘촘하고 길게 나 있다 3. 살이 찌거나 부어 볼록하게 도드라져 있다”로 풀이합니다. 다음으로 ‘다복하다·더북하다’가 낱말책에 올라요.


  ‘다복하다’는 “풀이나 나무 따위가 아주 탐스럽게 소복하다”로 풀이합니다. ‘더북하다’는 “1. 풀이나 나무 따위가 아주 거칠게 수북하다 2. 먼지 따위가 일어 자욱하다”로 풀이해요. 자, 제 나름대로 새 뜻풀이를 붙여 보겠습니다.

 

 다북하다 : 1. 풀이나 나무가 보기 좋도록 넉넉하게 있다 2. 마음·생각·살림·모습 들이 보기 좋도록 넉넉하다
 다북지다 : 1. 풀이나 나무가 참으로 보기 좋도록 아주 넉넉하게 있다 2. 마음·생각·살림·모습 들이 참으로 보기 좋도록 아주 넉넉하다
 다북차다 :  1. 풀이나 나무가 더없이 보기 좋도록 대단히 넉넉하게 있다 2. 마음·생각·살림·모습 들이 더없이 보기 좋도록 대단히 넉넉하다

 

  ‘옹골지다·옹골차다’라는 낱말이 있어요. ‘옹골지다’는 “실속이 있게 속이 꽉 차 있다”를 뜻하고, ‘옹골차다’는 “매우 옹골지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지다·-차다’를 놓고 결이 이처럼 달라요. ‘가멸다·가멸차다’로 이런 얼거리입니다. 이 같은 결을 살피면서 ‘다북하다·다북지다·다북차다’를 낱말책에 새롭게 담을 만한 반가운 시골말 한 타래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나눌 말은 낱말책에 나와야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고받을 말은 틀에 맞추거나 서울말 얼거리에 맞아야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나타낼 말을 즐겁게 나누면서 살림을 기쁘게 지으면 돼요. 우리는 사랑을 말 한 마디에 고이 실어서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하루를 지으면 돼요.


  예부터 말은 먹물붙이나 벼슬아치나 임금이 아닌 수수한 시골사람이 지었습니다. 먹고 입고 자는 모든 살림살이를 가리키는 말이며 풀꽃나무이며 짐승이나 새를 비롯한 온갖 이름은 바로 수수한 시골사람이 지었어요. 게다가 고장마다 말이 다 다른데요, 이는 고장마다 바로 그 고장에서 삶을 지은 수수한 시골사람이 손수 말을 지었다는 뜻이에요. 전라도라는 고장을 놓고 본다면, 곡성이나 고흥이나 구례나 진도나 신안이나 나주에서 쓰는 말이 다 다르지요. 고을마다 삶자리가 다르기에, 다 다른 삶자리에 맞추어 다 다른 시골사람이 다 다른 말을 짓습니다. 고을에서도 더 작은 마을로 접어들면 또 마을대로 말이 다르고요.


  남이 지어 주는 말을 쓰던 시골사람이 아니에요. 이른바 글쟁이나 벼슬아치나 힘꾼이 지어 주는 말을 쓰지 않은 시골사람이에요. 모든 말을 스스로 지은 시골사람입니다. 모든 말을 즐겁게 지은 시골사람입니다. 모든 말을 삶에서 캐내어 살림을 가꾸면서 홀가분하게 지은 시골사람입니다.


  삶을 짓기에 말을 지을 수 있어요. 살림을 짓기에 이름을 지을 수 있어요. 사랑을 짓기에 이야기를 지을 수 있어요. 시골에 살든 서울에 살든 우리 스스로 삶이나 살림이나 사랑을 스스로 짓는 기쁜 길을 걷는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삶과 살림과 사랑을 슬기롭게 담아내어 생각을 나누는 아름다운 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수수하게 말을 짓고, 스스럼없이 말을 나누어요. 낱말책을 짓는 사람은 수수한 시골사람을 이웃으로 두면서 말넋을 살찌우는 길을 갑니다.

숲노래 글쓴이 hbooklov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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