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책 읽기 48 봉선화가 필 무렵

2023.12.16 18:06:47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푸른책 읽기 48

《봉선화가 필 무렵》

윤정모

푸른나무

2008.9.1.

《봉선화가 필 무렵》(윤정모, 푸른나무, 2008)은 꽃이 필 무렵에 꺾여버린 꽃이 어떻게 흙으로 돌아가서 다시 싹을 틔우고 나무로 자라서 늦꽃으로 피어나는가 하는 줄거리를 들려줍니다. 꽃을 지켜보는 분은 다 알 텐데, 이른꽃은 맑고 늦꽃은 짙습니다. 일찍 피는 꽃은 밝고, 늦게 피는 꽃은 환합니다.

어린꽃도 할매꽃도 모두 꽃입니다. 아기꽃도 할배꽃도 나란히 꽃이에요. 꽃은 모두 꽃일 뿐, 꽃이 아닌 꽃이 없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그러니까 나라가 서서 임금님이 있고 나리가 있고 벼슬아치가 있고 글바치가 있던 무렵에, 수수하게 살림을 지으면서 글을 모르더라도 말로 모든 살림을 가르치고 물려주면서 아이를 사랑하던 사람들을 ‘들풀’이나 ‘들꽃’으로 가리키곤 했습니다.

들풀은 들풀이고, 들꽃은 들꽃입니다. 들풀하고 들꽃은 ‘민(民)’도 ‘백성’도 ‘민초·민중’도 ‘인민·시민·국민’도 아닙니다. ‘임금·나리·벼슬아치·글바치’는 예나 이제나 ‘들풀·들꽃’이라는 이름을 좀처럼 안 쓰려 하거나 꺼리거나 내칩니다. 왜 그러겠어요? 그들은 풀도 꽃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거든요. 그들은 풀꽃나무가 아니라서 들숲바다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거나 미워해서 억누르거나 밟으려고만 하거든요.

어느 풀도 다른 풀을 미워하거나 밟지 않습니다. 어느 나무도 다른 나무를 싫어하거나 괴롭히지 않습니다. 들숲을 이룬 터전에서 모든 풀꽃나무는 푸르게 어우러져 우거집니다. 이리하여 들숲빛이 바다로 퍼지고, 바다는 바닷방울을 하늘로 띄워서 구름을 일으키고는 빗방울로 온누리를 적셔요.

《봉선화가 필 무렵》은 조그맣고 수수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임금과 나리가 들풀을 얼마나 어떻게 짓밟아 왔는가를 들려줍니다. 벼슬아치하고 글바치가 들꽃을 얼마나 등지면서 모르는 척했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렇다고 그들 ‘웃분’을 나무란들 이 나라가 바뀔 턱은 없습니다. 그들 ‘웃분’도 아기를 낳을 텐데, 아기를 낳았으면 젖어미를 두거나 돌봄이를 부리지 말고, 그들 스스로 아기한테 젖을 물리고 집안일을 하고 말을 물려주고 살림을 지어서 보금자리를 숲으로 바꾸면 될 뿐입니다.

사랑을 본 적도 없기에 사랑이 아닌 총칼을 앞세웁니다. 사랑을 본 적이 없더라도 스스로 사랑을 배우고 맞이해서 바꾸려 하지 않기에, 사랑이 아닌 허수아비에 끄나풀에 종이 되어 뒹굽니다.

꽃이 필 무렵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시겠습니까? 철마다 다 다른 풀꽃나무가 다 다르게 꽃을 피우는데 하나도 안 보는 서울(도시)에 스스로 갇혀서 앓는지요? 언제나 다르게 눈부신 들꽃을 품으면서 오늘 하루를 노래하겠습니까?

ㅅㄴㄹ

경아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어야 하는데, 어쩌면 할머니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까닭 없이 배신감마저 들었다. (23쪽)

“그대들, 정말 잘 왔다. 오는 동안 고생이 많았겠지만 황국신민은 그런 것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 그대들은 국가를 위해 몸 바치러 온 정신대다. 모쪼록 병사들을 잘 위안해 주기를 바란다.” (89쪽)

“제군들은 내일 아침에 출격한다. 여기서 몸을 푼 뒤 저녁 여섯 시까지 부대로 돌아오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진수성찬이 제군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상!” (106쪽)

주옥은 순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순이야, 네가 산 까닭은 네 목숨이 소중해서이지, 저런 쓰레기 같은 군표 때문이 아니야.” (126쪽)

순이는 군표에 불을 붙였다. 힘든 피란길에도 한사코 들고 왔던 군표가 그렇게 사라져 갔다. (160쪽)

 

숲노래 글쓴이 hbooklov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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