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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말 3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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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한겨레 우리말’은 우리가 늘 쓰면서 막상 제대로 헤아리지 않거나 못하는 말밑을 찬찬히 읽어내면서, 한결 즐거이 말빛을 가꾸도록 북돋우려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우리 말밑을 우리 삶터에서 찾아내어 함께 빛내려는 이야기입니다.

 

한겨레 우리말
― 알맹이를 알아서 아름답네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이라 했습니다. 틀림없이 ‘아’랑 ‘어’는 다릅니다. 그러나 둘은 비슷하지요. 참으로 비슷하지만 달라요. 다시 말하자면, ‘비슷하다 =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는 뜻이라고 할 만합니다.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달라요. 그렇지만 둘은 어버이로서는 같습니다. 같은 어버이로되, ‘아’버지하고 ‘어’머니로 달라요.


  ‘알’이란 무엇인가 하고 헤아리면,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씨인 ‘얼’부터 생각할 만해요. 알하고 얼은 다르지만 닮은 대목이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다르’기 때문에 ‘닮’아요. ‘같다’고 할 적에는 다를 수도 없지만, 닮지도 않습니다.


  곰곰이 보면 ‘알’은 목숨입니다. 숨결이지요. 또는 목숨이나 숨결이 태어나서 자라는 바탕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두를 아우르는 알이에요. 얼도 이러한 느낌을 고루 담으니 비슷하지만 달라요.


  얼빠지거나 얼나간 사람이란 ‘얼’이 없는 모습일 텐데, 이는 ‘알’이 없다는, 목숨이나 숨결이라 이를 만한 티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알갱이·고갱이

 

  알에 다른 말을 붙인 ‘알갱이’라 하면 더 작은 곳이 떠오릅니다. 알은 목숨이나 숨결을 이루는 바탕이라면, ‘알갱이’는 이런 알을 이루는 더 작은, 더 깊이 있는 바탕을 가리킵니다. 한자말로 하자면 ‘물질·입자·결정·정수·요소’를 나타낸다고 할 만합니다. 알을 이루는 바탕인 알갱이라면 더없이 대수롭겠지요. 이러한 결하고 맞물리는 ‘고갱이’입니다.


  고갱이는 한복판에 있는 대수로운 숨결을 가리킵니다. 알갱이로는 한복판이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알갱이는 대수로운 숨결을 통째로 가리키지요. 고갱이는 알갱이나 알에서 한가운데를 가리킵니다.


  비슷하게 ‘알맹이’가 있어요. ‘-갱이’가 ‘-맹이’로 바뀝니다. ‘고맹이’란 말은 없습니다. ‘알맹이’는 ‘알’에서 껍질을 벗긴 속살을 가리켜요. 다만, 알맹이 한가운데를 나타내지 않아요. 그저 껍질만 벗긴 모두를 가리킵니다.

 

 알짜·알속

 

  알 하나에서 조금씩 가지를 뻗어 ‘알짜’나 ‘알속’을 생각해 봐요. ‘-짜’는 힘줌말로 붙입니다. 대수로운 숨결이 여럿 있으나, 여기에서 꼭 하나를 빼내어 그야말로 대수로운 숨결을 살핀다고 할 적에 나타내는 ‘알짜’예요.


  알에서 껍데기나 껍질을 벗겨 알맹이라 하고, ‘알속’을 따로 쓰는데, ‘알’은 껍데기나 껍질까지 아우르는 낱말이네 하고 어림할 만합니다. ‘알’이라 할 적에는 속엣것만 나타내지 않는 셈입니다. 겉속이 모두 대수롭다는 뜻입니다. ‘알속’은 겉을 뺀, 사람으로 치면 옷을 입히지 않은, 맨몸뚱이라는, 또 몸뚱이조차 잊고서 마음을 헤아리는‘알속’인 셈입니다.

 

 

 안·알다

 

  알 한 마디를 파고드니 ‘안’이 맞물립니다. ‘안팎’이라 하지요. 속하고 겉을 나타내는 비슷하면서 다른 ‘안 + 팎(밖)’입니다. 안은 품는 결입니다. 품고 품어서 태어나도록 하는 결입니다. 태어나면서 피어나고 자라나고 거듭나는 결입니다.


  이러한 ‘안’은 다시 ‘알’을 헤아리도록, ‘알-’을 붙인 ‘알다’를 생각해 보라고 다리를 놓습니다.


  ‘알다·알리다’ 두 가지를 쓰는데요, ‘알 + 이르다/있다’ 얼개입니다. 알에 이르거나 알이 있기에 ‘알다·알리다’예요. 배우는 길이든, 보는 길이든, 받아들이는 길이든, 바깥이 아닌 속(안)에 있도록 하기에, 품어서 ‘내’ 것이 되도록 하기에, ‘알다’이고, 나만 속(안)에 있도록 하거나 품기보다는, 나 아닌 너(남)도 속(안)에 있도록 하거나 품으려는 ‘알리다’이지요.

 

 나락·낟알

 

  서울말로는 ‘볍씨’라고 흔히 쓰지만, 시골말로는 ‘나락’이라고 씁니다. ‘낟알’이란 말도 있지요. ‘낱’으로 있는 알인 ‘낟알’인데, ‘낱’은 ‘나’하고 맞물립니다. ‘하나’는 ‘홀·혼자’로 맞물리니, ‘나·낱’은 ‘하나·홀’이기도 한데, ‘하나·하늘’로 맞물리는 낱말이니 ‘나 → 낱 → 홀 → 하나 → 하늘 → 거룩/훌륭/아름’으로 잇닿기도 합니다.


  자, 예부터 온누리에서는 “씨앗 한 톨에서 모든 일이 비롯한다”고 말합니다. 깊이 우거진 숲도 처음에는 씨앗 한 톨이었어요. 우리 몸도 그렇지요. 숱한 알갱이(세포)가 모여 몸뚱어리가 되는데요, 숱한 몸뚱어리가 되기까지 처음에는 알갱이 하나예요. ‘낱(나)’이 모여서 ‘우리(모두/온)’가 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얼거리이다 보니 나락 한 톨을 함부로 여기지 않은 흙살림입니다. 밥알 한 톨도 마구 흘리지 않도록 건사한 삶이에요. 가난하기에 아끼는 살림이 아닌, 아름답고 거룩하고 훌륭한 빛이 될 숨결인 줄 알기에 고이 모시거나 섬기려고 나락 한 톨을 알뜰살뜰 여미었습니다.

 

 알뜰하다·살뜰하다·알뜰살뜰

 

  ‘알’을 헤아려서 모시는 손길이기에 알뜰합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다르게 맞물리는 ‘살뜰’은 ‘사랑·삶·살림’뿐 아니라 ‘사람’이라는 결을 품습니다. 알뜰하게 돌볼 줄 안다면 깊이 흐르는 숨결을 생각할 줄 알 테고, 살뜰하게 보살필 줄 안다면 포근하게 감도는 숨빛을 헤아릴 줄 알 테지요.

 

 사랑·살·삶·살림

 

  처음에는 작은 알입니다. 이 작은 알에서 비롯하여 뭇목숨이 피어나고 퍼져서 숲으로 나아가는데,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에서는 사랑이 퍼져서 보금자리를 이룹니다. 알은 어느새 사랑으로 나아가요. 이 사랑은 ‘살’로 스며들어 바깥에 나타나고, 이렇게 나타나는 모습은 고스란히 ‘삶’이며, 이러한 모습을 알뜰살뜰 가꾸기에 ‘살림’입니다.

 

 나·바로 나·우리

 

  여러모로 따지자면 ‘알’에서 비롯하는 목숨 가운데 하나인 ‘나’일 텐데요, ‘알’은 처음에 언제나 하나입니다. ‘하나’라는 길, 또 ‘나’라는 흐름을 보면, ‘알 = 나’로 어우러지는 얼개입니다. “바로 나”인 ‘알’입니다. 나도 알이고 너도 알이란 뜻입니다. 나도 대수롭고 너도 대수로우니, 우리는 모두(온/누구나) 대수롭다는 이야기예요.

 

 속알·속알머리·속셈

 

  그런데 ‘알속’을 뒤집은 ‘속알’이 되면, 뜻이 확 갈리지는 않으나, 어쩐지 얄궂은 기운이 스며요. ‘속알머리’에 붙은 ‘-머리’는 나쁘게 가리키려고 붙이는 말씨는 아닙니다만, ‘알속’하고 ‘속알머리’는 달라도 한참 다른 말씨가 되어요.


  우리는 누구나 언제나 아름다운 숨결인데, 이 아름다운 숨결을 속에 품는, 다시 말해서 ‘아름다운 숨결을 알려’고 하는 몸짓에서 벗어나는 자리에 “속알머리 없는 놈”이란 말을 씁니다. 스스로 다 알 만한데 스스로 알 만하지 않은 엉뚱한 길로 가니까 속알머리 없는 모습이 되어요.


  속으로 셈하여 속셈일 터이나, 이 속셈은 꿍꿍이를 가리킬 적에도 써요. 남이 모르게 헤아리는 꿍꿍이인데요, 남이 모르게 하는 아름다운 일도 있으나, 남이 모르게 하는 궂은 짓도 있는 터라, ‘알속’을 뒤집은 ‘속알’에서 퍼지는 여러 말씨는 ‘뒤집어서 알지 못하는 결’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씨앗·씨알

 

  씨앗 석 톨을 심어 사람이 누리고 벌레가 누리며 새가 누린다고 했습니다. 혼자 누리는 씨앗이 아닌, 혼자 차지하는 열매가 아닌, 사람·벌레·새가 얼크러지는 살림이라 했습니다.


  이 옛말이자 삶길을 생각해 보면, ‘사람·벌레·새’가 얼크러지는 자리는 숲입니다. 서울 같은 큰고장이 아닌, 숲을 낀 시골이지요. 또는 숲 한복판에 마련한 보금자리예요.


  그런데 ‘씨’라는 낱말 하나로도 넉넉히 ‘새로 태어나서 자라는 숨결’을 가리킬 만한데, 다시 ‘-앗’이며 ‘-알’을 붙입니다.


  ‘씨·시’는 왜 ‘씨앗·씨알’로 다시 만날까요? ‘씨앗’도 쓰지만 ‘시앗’도 씁니다. ‘시집’이란 말이 있고 ‘시(媤)’를 한자로 여기곤 하는데, 어느 모로 본다면 소리는 같을 뿐인 ‘씨·시’가 얽혀 ‘시집’일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낳는 씨(씨앗·씨물)는 모두한테 있습니다. 사내랑 가시내 모두한테 있는데, 굳이 ‘사내집’을 ‘시집·씨집’으로 가리켰습니다.


  또한 나이가 찬 어른한테만 씨가 있지 않아요. 아이한테도 씨가 있어요. 그러나 사람몸에 깃든 씨(씨앗·씨물)를 섣불리 다루면 슬기로운 살림을 사랑하는 숲하고는 동떨어지기 때문에, 철이 들 때까지는 ‘몸에 있는 씨’를 함부로 밖으로 내보내지 않도록 다스렸습니다. 철이 들어야 비로소 알맞게 씨를 건사하거든요. 몸으로 맺는 씨뿐 아니라, 흙에 묻는 씨도, 우리 삶터 둘레에 있는 뭇숨결(뭇씨)도, 고이 어루만지거나 감싸거나 안는 몸짓이 되어요.

 

 안다·껴안다·얼싸안다·품다

 

  몸하고 몸이 만나는 씨앗은 몸을 낳습니다. 그런데 씨앗은 몸에만 아니라 마음에도 있어요. 그래서 ‘마음씨’입니다. 예부터 몸에만 숨결이 있지 않고 마음에도 숨결이 있다고 여겼고 알았으며 느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마음씨·마음결’처럼 ‘-씨’하고 ‘-결’을 붙여서, 비슷하면서 다른 마음 낱말을 갈라서 썼어요.


  몸하고 몸이 만날 적에 가시내랑 사내를 가르는 몸이 새로 태어난다면, 마음하고 마음이 만날 적에 가시내나 사내로 안 가르는 오롯이 하나인 빛이 깨어납니다. ‘마음빛’이라 할 텐데, 이 빛이란 바로 ‘얼’입니다. 바야흐로 ‘알’이 ‘얼’로 다시 태어난 말결입니다.


  서로 안습니다. 아끼고 싶으니 안아요. 어버이가 아이를 안고, 아이가 어버이를 안지요. 닭이 알을 품는 모습을 그려 봐요. 알을 품는 몸짓이란 포근한 숨결이면서, 이 포근한 숨결이란 언제나 사랑이에요.


  몸을 안든 마음을 안든, 언제나 사랑이라는 포근한 숨결이라면,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가시내 또는 사내)이란 몸을 입고 태어납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포근히 마주하는 눈빛이자 숨결이라면, 우리는 한결같이 새롭게 빛나는 얼을 품는 마음씨요 마음결이 되어요.


  이리하여 안는 매무새도 ‘껴안다’나 ‘얼싸안다’처럼 새삼스레 달리 나타냅니다. 더욱 가까이하고 싶어 껴안습니다. 크게 얼크러지려는 뜻으로 감싸려고 얼싸안습니다.

 

 

 아름답다·아름드리·한아름

 

  마음으로 안거나 품어서 태어나는 얼이란, ‘바로 나’이고, 오직 하나이며, 아름답지요. 아직 마음으로 안지 않거나 품지 않았으면, 우리는 아직 ‘나’로 태어나거나 깨어나지 않았으니, 아름답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어요. 태어나면서 환하게 빛줄기를 뻗으니 눈이 부셔요. ‘눈부시다’고 하지요. 눈부신 빛살이기에 ‘아름답다’ 하고 받아들이고 바라봅니다.


  품으로 안으니 포근한 숨결인 사랑이 퍼져요. 나무가 든든하게 자라서 이 땅에 튼튼히 뿌리를 뻗을 적에 줄기가 굵어요. 이러한 나무를 보면 ‘아름드리’라 하지요. 팔을 벌려 넉넉한 품으로 안을 만한 나무이니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한아름’이란 ‘한 + 아름’인데, 알고 보면 ‘아름’은 돌고 돌아 ‘하늘·나’로 맞물리니, 힘줌말이라 할 만해요. 비슷하면서 다른 두 말씨를 모둔 ‘한아름’인데, 한아름 베푸는 손길이란 얼마나 값지고 반가우며 기쁜 웃음꽃일까요.

 

 알차다·알맞다·맞춤하다·걸맞다

 

  한아름 내미는 손길에 흐르는 빛이란 참으로 곱습니다. 한아름 담긴 살림은 이모저모 알뜰히 건사한 품이 깃들 뿐 아니라 속속들이 야무져요. ‘알차다’고 하지요. 알찬 살림을 건네기에 ‘한아름’이라 할 만해요. 속은 텅 빈, 껍데기만 내밀면서 겉보기에만 우람해 보인다면, 이때에는 ‘알차다’고 하지 않아요. 덩이가 작더라도 속이 단단하면서 빛나기에 알찹니다.


  쓰임새가 그야말로 맞기에 ‘알맞다’라 합니다. “알이 맞”습니다. 쓸 자리에 제대로 쓰고, 놓을 곳에 제대로 놓으며, 나눌 데에 제대로 나누니 ‘알맞’지요. 비슷하면서 다르게 ‘걸맞다’를 써요. 걸려서 막힘없이 가도록 합니다. ‘맞다’를 늘려 ‘맞춤’이라고도 합니다. 맞게 하는 몸짓입니다.

 사람

 

  우리는 사람이란 모습인 몸을 입고, 사람으로서 마음을 품습니다. ‘사람’이란 낱말은 깊고 넓게 늘 새로 생각해 볼 만합니다. 이 ‘사람’을 ‘알’하고 맞물려서 한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알”입니다. “살아가기에 알다”라 할 만합니다. “살아가며 아름답다”라 할 테고, “살아가는 사이에 알차다”라 하겠지요.


  또 무엇을 생각해 볼까요? “살아가는 숨결이 사랑스럽다”고 해도 어울립니다. “사는 숨결이 사랑스러워 슬기롭게 숲으로 새롭다”고 해도 어울릴 테고요.


  바라보고서 받아들이는 숨결이기에, 바라보고서 받아들이는 사랑이기에, 바라보고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서지 싶습니다. 알맹이를 알아서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알인 줄 알 뿐 아니라, 너랑 내가 다르면서 비슷하고, 비슷하면서 다른 숨결로 서로 만나기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하늘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