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4. 천 원 다발
학교에 간 아들이 전화기 너머로 조른다.
“엄마, 멜로디언하고 리코더 갖다 줘!”
“너 그럴 줄 알았어.”
어디에 두었더라, 붙박이장을 열었다. 아이들 문구만 두었기에 부피 큰 멜로디언을 쉽게 찾는다. 리코더는 또 어디 있더라, 학교 종이 울리면 어떡하나. 마음이 바쁘다. 단소는 첫째 아이만 썼으니 거기 있을지 몰라. 첫째 아이 무지개 서랍장 맨 밑 칸을 당긴다. 단소를 둔 곁에서 분홍빛 리코더를 찾았다.
차를 몰고 길 건너 학교로 갔다. 아들이 전화 한 뒤로 쭉 문 앞에서 기다렸는지, 돌기둥에 앉았다가 빨간빛 차를 보고 저만치에서 웃으며 달려온다. 창문을 내리고 애써 찾아온 악기를 건넨다. 근데 아들이 손을 내밀다 멈춘다. 손에 든 악기를 빤히 바라보던 아들 낯빛이 갑자기 뾰로통하다.
“왜 그래, 늦겠다 얼른 받아?”
“쪽팔리게 빛깔이 이게 뭐야? 너무 했다.”
“누나들한테서 물려받아 쓰는 거라 괴안아, 다들 그래.”
“멜로디언은 크니깐 그럴 수 있다지만, 리코더는 그렇잖아.”
파란빛을 좋아하는 아들이 누나가 쓰던 꽃분홍빛 리코더를 보자 마지못해 건네받고 샐룩샐룩하며 들어간다. 빛깔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교실에 있는 사물함을 뒤졌단다. 집에도 파란빛이 하나 더 있는데 갑자기 찾느라 보이는 대로 들고 갔는데, 파란빛 리코더를 찾았다고 바꾸어 불었다.
집에서는 그림을 그리다가 파스텔을 찾는다. 방 구석구석을 뒤져도 없다. 작은 손전등을 켜고 문구 붙박이장을 뒤진다. 다시 집안에 들어와 세 아이 책상을 열어 뒤진다. 그때 첫째 아이가 찾았다고 소리쳤다. 책상 귀퉁이 작은 칸에 차곡차곡 깔끔하게 쌓아 두었다.
“영어로 적혀 못 읽어서 못 찾았지?”
곁님이 능청스럽게 짓궂은 말로 엄마를 놀리자, 아들 낯빛이 밝다. 울음을 뚝 그치고 일기를 쓴다. 밑그림을 그리고 파스텔로 고운 빛을 신나게 입힌다.
열두 살이 되어도 아침마다 준비물을 찾느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열 살 때는 머리만 믿고 더 엉망이었다. 두 딸은 알아서 스스로 잘 챙기는데, 아들은 알림글을 제대로 적지 않아 아침에 갑자기 떠올리며 바빠지는 일이 잦았다.
아침마다 준비물을 산다. 어떤 날은 바꿔 놓은 돈이 없어 큰돈을 준다. 보내 놓고 나면 이런저런 생각이 갈마든다. 형들이 돈을 뺏기도 한다던데, 돈을 갖고 다니는 줄 알면 괴롭힐까 싶어 마음이 쓰였다. 덜렁대느라 손에 쥔 돈을 잃고 울지나 않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 끝에 천 원짜리 종이돈을 한 뭉치 바꿨다. 아침마다 싸움판을 치르자 보다 못한 곁님 생각이었다. 빳빳한 새돈을 묶은 종이도 떼지 않고 작은 문짝에 잘 두었다.
낮에 내가 일하러 나가면 둘째 아이한테 맡겼다. 둘째 아이는 옷을 사고 머리를 손질하고 신발을 살 적에는 스스로 모은 돈을 보탰다. 치과에 가거나 주전부리를 사먹을 적에는 내가 넣어 둔 돈을 쓰게 했다. 쓸 때마다 말하고 말하면 나는 다 들어주었다.
하루는 아침에 돈을 준 적도 없는데 아들이 떡볶이를 사먹으면서 집에 오고 좋아하는 카드를 사 왔다.
“너 무슨 돈으로 사먹어?”
“흠….”
물어도 아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아차, 문갑에 둔 돈이 있었지, 서랍을 열어 본다. 쉰 장이나 사라졌다. 빳빳한 새돈이라 돈마다 번호가 줄줄이 찍혔다. 맨 윗장에 있는 끝자리 숫자를 보면 앞에 쓴 돈이 얼마인지 안 헤아리고도 안다.
“너, 여기 돈 몰래 꺼냈나?”
“어. 애들이 먹는데 나도 사먹고 싶어서 돈 꺼냈어.”
먹고 싶었다는 말에 잘못을 따지지 않았다. 몰래 꺼내 쓴 마음이 어땠을까. 백이나 되니 하나쯤이야 빠져도 엄마가 모를 줄 알았을까. 이제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배짱도 좋고 아빠처럼 씩씩해서 좋다. 가끔 빈정거리며 그 날 일을 놀리면 아주 참되게 말했다.
“엄마, 내가 돈 꺼내 썼다는 이야기 다시는 다른 사람한테 하지 마.”
“알았어. 나쁜 짓인 줄 알기는 아나?”
“어. 그러니 그 훔쳤다는 말도 하지 말아 줘.”
“알았어. 다음부터는 말하고 꺼내 쓰자.”
“그래.”
그래도 돈이니깐, 몰래 쓰거나 훔치는 짓은 나쁜 일로 여긴다. 그래서일까. 다시는 그 말을 못 꺼내게 하니. 우리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엉겁결에 천 원짜리 다발 이야기보따리가 나오자 딱 한 판 얼굴이 일그러졌다. 올바르지 않다는 일은 누가 꾸지람을 안 해도 제 가슴이 스스로 부끄러운 짓인 줄 먼저 알아차렸다.
아들이 더 어린 네 살 때는 어린이집에 보냈다. 아침에 버스가 올 때를 맞추어 나간다. 오른쪽으로 가지 않고 내 손을 잡아당기고 왼쪽에 있는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다른 과자에는 마음이 없고 꼭 ABC 초콜릿만 샀다. 하나에 오 십 원을 주고 사서 그 자리에서 다 먹고 차를 탄다. 어떤 날은 돈도 없이 그냥 나왔는데도 나를 끌고 간다. 마칠 때 사 준다고 꼬셔도 억지를 부리고 꼭 저 먼저 가게에 들어가 버렸다. 그때부터 늘 잔돈을 지녀야 했다.
그래서 이도 좀 섞었을까. 사탕은 녹지만 초콜릿은 녹지 않아 이 사이에 낀 채로 다녔으니 이가 성할까. 아침에 삼백 원어치 까먹고 저녁에 삼백 원어치 까먹고 어쩌다 밤늦게도 까먹는다. 하루에 천 원어치는 초콜릿을 사먹다가, 어느 날부터는 껌으로 바뀐다. 달콤한 물만 쪽쪽 빨아 먹고는 입김을 불어서 쓰레기통에 훅 분다. 어쩌다 이불이나 베개에 날아가 내 머리에 옮겨붙는 바람에 앞머리를 잘라낸 일도 있었다.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물릴 만큼 먹고 나면 딱 끊으니 놀라웠다.
아들이 처음 학교에 들어가던 날에 동전 저금 책을 사주었다. 세계그림을 익히는 동전 저금 책인데, 빳빳하다. 한쪽에 오백원짜리 동전을 스물씩 끼우고 모두 열 쪽이니 앞뒤에 넣으면 한 이십만 원쯤 모인다. 한 해에 한 번씩 털어내고 또 끼우고 여섯 해를 마치면 목돈을 모으고자 했다.
처음에는 동전 끼우는 재미를 솔솔 느꼈다. 세계그림 배우는 재미로 우리 주머니에 든 오백 원 동전을 탈탈 털어갔다. 그래서 일부러 슬쩍 바꾸어 놓는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다섯 해가 되었을 때 저금통 책을 펼쳐보고 깜짝 놀랐다. 그 많던 동전이 다 어디 가고 하나도 없다. 분홍빛 빈칸에 동그란 자국만 남았다. 학교 앞에 문구점이 있으니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까. 아들도 똑같았다. 마치고 나오면 문구점에서 파는 과자하고 장난감에 늘 눈길이 쏠렸으니 돈을 꺼내어 쓸 만도 했다. 오백 원 하나면 두세 가지는 사먹는다. 나는 어릴 적에 오 원만 있어도 설탕 발린 알사탕을 하나 사먹었다. 라면도 먹고 싶은데, 그때는 돈이 너무 없었다. 빈 저금통을 다시 동전으로 채운다. 방학 때 말 잘 듣고 받은 돈으로 다시 하나씩 끼우며 저금을 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아들이 텅텅 비웠다.
방학 때면 아들 밥 챙겨주고 돌봐 줄 사람이 없다. 내가 일 나갈 때 도서관에 태워 주려고 해도 아들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둘째 아이가 중학생이었는데, 곁일을 하겠다고 찾아보았다. 참 잘 되었다 싶어 한 달에 이 십만 원을 주기로 하고 집에 있는 동안 동생 챙기기를 맡겼다. 아들 두 끼 밥 챙기고 샛밥 챙기고 컴퓨터 하는 시간을 다스리고 학습지를 풀게 하고 책을 읽고 숙제를 스스로 하게끔 곁에서 살짝 거들게 했다.
아들은 딸들하고 달라서 일 나가는 엄마보다는 살림하며 푸근히 받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일하면서 애를 챙기는 일은 사랑보다 짐으로 무게가 실린다. 곁에서 아이가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게 되고 집에 오면 엄마가 안 본다고 컴퓨터에 쉬이 빠진다. 그렇지만 떨어졌다 저녁에 만나면 아들은 하루 동안 있던 이야기를 귀에 대고 미주알고주알 다 말해 주었다. 엄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이 그리 많은지. 신나는 날에는 이야기 듣기에 밤이 참 짧았다.
세 아이가 아침마다 손을 내밀며 준비물 값 달라고 조를 때는 얼이 다 빠졌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그때는 수선스러워 큰돈같이 느꼈다. 날마다 돈 돈 돈 달라는 말에 돌 듯했다. 손 내밀던 작은 손이 이제 와 생각하면 얼마나 이쁜지 그때는 왜 몰랐을까. 어린아이들 모습이 문득 거울 같다. 일터에서 천 원짜리 돈뭉치를 바꾸는 날이면 아들이 한 짓이 늘 떠오른다, 그럭저럭 한삶을 보낸 그때 우리 아이.
2021.01.22.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