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5. 짐꾼
아들하고 가게에 갔다. 유리문이 활짝 열리자 아들이 저쪽으로 뛰어가서 수레를 끌고 온다. 잿빛 장바구니를 얹은 작은 수레에 봄나들이 가서 먹을 샛밥을 골라 담는다. 어쩐 일인지 좋아하는 과자를 안 사고 부피가 큰 과자 둘 담는다. 모자랄까 해서 아들이 좋아하는 초코송이하고 고래밥을 슬쩍 담아 놓았다. 돈을 내는 동안 아들은 가게에서 거저 주는 네모난 종이상자에 주섬주섬 담는다. 이제 상자를 들려고 보니 아들이 먼저 든다.
“엄마, 내가 들고 갈게.”
“안 무거워?”
“어, 괴안아 나는 남자잖아.”
“앞 잘 보고 천천히 가.”
자동차를 반듯하게 세우는 동안 아들이 엘리베이터 단추를 꾹 누르고 기다린다. 계단을 둘씩 건너뛰어 오르자 아들이 짐을 무릎에 올리고 상자를 벽에 기대다가 꼭 누르던 손을 떼더니 깨금발하고 10층 단추를 누른다.
짐을 풀고 쌀을 씻는데 방에 들어갔다 나온 아들이 노란 쪽지를 둘 건넨다.
“잠 와. 잠 와. 잠 와. 잠 와. 초특급 잠 와.”
“엄마 잠 오면 어떡해? 풀이?”
“잠 오면 자야지”
말을 마치자 마룻바닥에 벌러덩 눕는다. 빙 둘러서 말하고 얼렁뚱땅 숙제를 미루고는 바로 잠들었다. 몰아서 하려면 힘든데……. 한숨 자고 나면 더 빨리할는지, 잠을 푹 자게 두었다.
이때만 해도 나도 눈치가 빨랐다. 어디로 튀고 어떻게 말할지 종잡을 수 없는 아들 마음만큼은 눈치채지 못했다. 늘 내 머리 꼭대기에 앉은 사람처럼 바라는 쪽으로 엄마를 다스린다. 잔머리가 따라 주니 꾀를 쓴다. 그래도 아이답게 구는 모습이 좋다. 바로 말하는 엄마와 달라 아들은 빗대기를 잘한다. 짓궂게 노는 아들을 볼 적마다 흐뭇하지만, 얼마 못 가서 일이 뒤집히곤 힌다.
밥을 다 지어서 밥상 맡에 둘러앉았다. 티브이를 보느라 마음이 빠져서 밥 먹자고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부르고 또 불렀다. 나는 밥 먹다 말고 일어나 마루로 쿵쿵 걸어가서 전깃줄을 확 뽑았다. 그러자 아들이 밥을 안 먹겠다고 고개를 돌린다. 그때 밥을 먹던 곁님이 한마디 거든다.
“아들 나무랄 일 없이 티브이를 내다 버리면 된다.”
말을 마친 곁님이 숟가락을 놓더니 티브이를 번쩍 들고 문밖에 내다 놓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아들도 나도 벙벙했다. 웃음 없이 웃기고는 두 손을 털면서 겅중겅중 걸어와 밥상에 앉는다. 뜻밖에 일어난 아빠 몸짓에 아쉬워하는 낯빛조차 할 틈도 없이 아들은 깨끗이 마음을 턴다. 저 때문에 멀쩡한 티브이를 버렸다는 생각을 했을까, 울어야 할 때인데 울지 않고 밥을 먹고는 만화책을 펼친다. 티브이도 마음대로 못 보는 아들이 문득 딱했다. 아들 곁에 다가가서 마음을 슬쩍 떠본다.
“티브이 들고 와서 보렴?”
“무거워서 혼자 들지 못해. 아빠가 전깃줄을 다 빼버려서 어디에 꽂는지 몰라!”
며칠 두고 보다가 빼앗은 오락기를 돌려주려고 별렀다. 달라진 모습을 찾을 수 없어서 하루하루 핑계를 내어 미루고 틈만 엿보았다. 오락기를 빼앗겨 마음 한구석이 얼마나 허전했을까, 날마다 묻는다.
“엄마, 월급 얼마야?”
“흠, 백만 원쯤?”
“엄마, 월급은 언제 나와?”
“20일 나오지.”
“아직도 많이 남았네.”
돈을 모아서 오락기를 사주겠다는 말만 믿고 아들은 엄마가 월급 타는 날을 애타게 기다렸다. 문득 아들이 불쌍하다.
아들이 열 살인데,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를 보기가 어렵다. 학원으로 간 아이들도 있고 검도나 태권도장에 운동 간 동무도 많다. 첫째 아이하고 여덟 살 터울인데, 그때는 마을에 뛰어노는 아이들 소리가 꽤 시끌벅적했는데, 사뭇 다르다. 우리 아들도 함께 뛰어놀 마을 아이들이 없어 운동을 배운다.
다섯 살 때부터 시켜 달라고 졸랐다, 집집이 붙은 태권도 알림종이를 몽땅 떼왔다. 떼어온 종이를 피아노보다 더 큰 통나무 수족관 유리에 쭉 붙여 놓고 발을 차고 팔을 뻗으며 흉내 내고 태권도를 배우게 해 달라고 날마다 노래를 불렀다. 곰곰이 생각하니 아들을 차분하게 하는 운동을 해야겠다 싶어 태권도는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었다.
그렇게 두 해를 노래 부르고 일곱 살이 되어 검도를 했다. 나무칼을 알맞게 휘두르며 마음을 모으며 숨소리를 넣는 운동이 발차기가 많은 태권도보다 아들한테 맞았다. 그런데 처음에만 재미를 붙였다. 검도 옷만 비싸게 갖추고 옷값도 다 못하고 두 해를 배우고 그만둔다. 검도를 그만둔 까닭은 놀이감(닌텐도)이 생긴 뒤부터이다.
우리 집은 이무렵부터 세 아이가 티브이를 거의 보지 않았다. 아들이 오락기하고 티브이를 안 보자 한동안 가게 갈 때마다 따라나서고 내 짐을 도맡아 든다. 몸집이 동무들보다 작아서 무거운 짐을 드는 일은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이 나름대로 사내라고 힘을 보탰다. 큰 짐을 들어 주고 차츰 의젓해졌다. 짐을 들어 줄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아빠가 운동 나가면서 이것저것 쓰레기를 들고 나가는 일을 보고 그랬을까. 아들이 이제는 더 듬직하다. 어린 날 따뜻한 마음을 담아 짐을 들어 준 작은 몸짓이 잘 자랐구나.
2021.01.27.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