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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아이] 17. 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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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7. 눕다

 

  그러께 여름에 헌 자전거를 얻었다. 그날 하루는 아들이 해가 질 무렵에 자전거를 탔다. 집을 나간 지 삼십 분도 안 되어 발을 다쳤다.

 

  “엄마, 못에 찔렸어. 피가 많이 나!”

  “피 안 나게 얼른 양말 벗어서 묶어.”

  “아파 죽겠는데, 괜찮냐고 묻지도 않네?”

  “피가 흐르는데 그 말이 뭐가 그리 서운하노, 얼른 손부터 써야지. 어디고?”

  “아, 여기가 궁전 가까이 같은데, 몰다. 아파 죽겠어.”

  “엄마가 이제 나가는데, 있는 곳을 알아듣게 말해야 찾아가지. 엄살 그만 부리고 찾기 쉬운 간판이 뭐가 있는지 휙 둘러 보아.”

  “아. 엄마. 피가 뚝뚝 떨어져!”

  “가까운 아무 가게라도 들어가서 도움을 받아.”

 

  운동화를 신고 타라고 그만큼 말해도 안 듣고 끌신을 신어 다친다. 피가 뚝뚝 떨어져서 무서운지, 피를 많이 흘려 티나게 하고픈 지, 못에 찔려서 아픈지 다 큰 녀석이 징징댄다. 내 말을 안 들어서 나도 고운말이 안 나왔다. 아들이 있는 곳을 똑바로 말해 주지 않아 차를 몰고 이쪽 길로 갈지 저쪽 길로 갈지 두 길을 두고 머뭇거렸다. 차를 한쪽으로 세우고 아들한테 전화했다. 낯선 아저씨가 받는다.

 

  “119인데요, 아드님을 어느 병원으로 보낼지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움직이면서 알아보고 있어요. 응급실에 잘 데리고 갈 테니 집에 가 계시다가 전화 하면 그때 보호자님 오세요.”

 

  타고 나간 자전거는 어디에 두었을까, 마음이 쓰일때 재건 병원으로 간다고 전화가 왔다. 우리 아버지가 며칠 머물던 병원이라 쉽게 찾았다. 아들은 벌써 석고를 바르고 휠체어에 앉아 석고가 마르기를 기다린다. 응급실 여의사가 다친 발을 돌본 일을 차근차근 덧붙여 준다. 석고가 다 마르자 붕대를 감았다.

 

 엄지하고 검지하고 발바닥이 찔렸다. 힘줄을 건들지 않아 한시름 던다. 뼈 사진은 하루를 지낸 다음에 찍기로 한다. 절룩거리는 아들을 어깨로 부축하고 병원을 나왔다.

 

  밖은 어두컴컴했다. 택시를 잡으려다 가게에 들어갔다.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하다가 복숭아 한 상자를 산다. 피를 닦아주고 119를 불러준 손전화 가게 아저씨를 찾아간다. 아저씨가 아들한테 힘을 북돋는 말을 한다. 빨리 나으라고 벽에 걸린 손전화 덮개 하나를 거저 주었다. 아저씨가 하얀 문을 열고 나가더니 아들 자전거를 낑낑거리며 들고나온다. 깨끗한 가게에서 낡은 자전거가 나오니 미안스러웠다. 가게 앞에 두어도 되는데 굳이 가게 안에 넣어 둔 마음이 고마웠다.

 

  우리는 가게를 나왔다. 아들이 나를 부른다. 다친 자리를 찾아 이만큼 피를 쏟았다고 자랑한다. 어둑해도 바닥에 흘린 검붉은 얼룩이 많아 쉽게 눈에 띈다. 아들이 많이 놀랐겠다 싶다. 길가에 심은 나무 곁에 나무판이 몇 쌓였고, 그 가운데 하나가 못이 박힌 채 큰길 쪽에 뒤집혔다.

 

  찻길로 달리다 차들이 차츰 늘자 찻길을 벗어나려고 했다. 발판에서 발을 떼어 자전거를 멈추려다 어쩌다 뾰족한 못에 발을 딛고 일어서면서 푹 찔렸다. 못이 녹슬었다. 손가락 두세 마디쯤 되는 긴 못을 보니 소름이 돋는다. 누가 못도 빼지 않고 길에 널빤지를 버렸을까. 둘레를 보아도 집을 뜯거나 고치는 집이 없다. 붉은 녹 때문에 잘못 도질까 마음이 쓰였다.

 

  손전화에 깔아 놓은 ‘안전 신문고’를 찾아 사진을 올렸다.  다른 사람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다음날 그 일을 맡은 일꾼이 전화했다. 이런저런 말이 오가고 답답한 마음을 헤아린다. 어디다 서류를 내면 병원비를 받을 수 있단다. 의사도 그렇게 말하고 비싼 사진을 찍자고 했다. 작은 일을 크게 벌려 눈먼 돈으로 꿀꺽하려는 마음 아닌가 싶어 손사래를 쳤다. 아들이 발을 고친다고 택시를 탄 값하고, 치료비를 내고 약국에 낸 값만 적어서 어디로 보냈다.

 

  까마득히 잊었다. 한 해하고 여섯 달 만에 등기로 온 글월에 사만사천구백오십일 원을 준다는 알림 글이 왔다. 그 돈이라도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 갖추어 내야 할 종이뭉치가 귀찮고 돈도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둘까 머뭇거렸다. 한참 지나서야 다 갖춘 종이뭉치를 들고 우체국에 가서 보냈다. 며칠 앞서 그 돈이 통장으로 들어왔다. 내가 쓴 병원비하고 택시비만 받고자 했지만, 해도 해도 너무 적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값을 적게 썼다고 할 적에 숫자 하나 더 그릴 걸 싶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넘어 점잖게 굴더니 이럴 때는 엄마한테는 보채고 싶을까. 아픈 마음 모르진 않지만,  신발 바꿔 신고 가라는 말도 듣지 않고, 피를 흘리지 않게 하려는 엄마 마음도 몰라준다. 토닥거려 주지 않는다고 짜증 내고 대꾸하다 아까운 피를 쏟는다. 다쳤다고 호호 해 주고 엄마 등에 업히던 어린 날을 떠올렸을까. 어지간히 엄살을 부리는 아들, 어린 날에 나를 두 판이나 넋나가게 했다.

 

  다섯 살 적에 길을 잃었다. 누나들이 훌쩍 크자 잘 안 놀아 주니깐 또래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놀이터에 노는 아이들이 없어 따분하면 길 건너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뛰논다. 그날도 저녁 무렵에 집을 나간 뒤 이내 날이 어둑했다. 아이 셋하고 놀다가, 두 아이가 달려왔다.

 

“아줌마, 근이가 없어졌어요!”

 

  두 아이를 따라 학교에 갔다. 어두운 학교를 구석구석 돌며 소리를 쳤다. 아들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찾지 못했다. 다시 집에 왔다. 집 바깥마루에서 창문으로 내다보면 학교가 훤히 보인다. 그래도 없으면 아파트에 방송하고 그래도 못 찾으면 아이를 잃었다고 경찰서에 알릴려고 했다.

 

  때마침 경찰한테서 전화가 왔다. 길을 잃고 우는 아들을 길 가던 아줌마가 112에 신고하고 바쁜 일이 있어 편의점에 맡겼다. 곧 아이를 태워서 오겠단다. 나는 1층으로 내려와서 아이 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순찰차가 소리내며 들어왔다. 엄마는 애가 타는데 아들은 순찰차 뒷자리에 앉아 초콜릿을 아주 맛있게 먹는다. 경찰 아저씨가 사 준 초콜릿이 그렇게 맛있었을까. 울음도 그치고 처음으로 경찰차를 타고 장난감으로 놀던 차를 참말로 타니 신바람이 났다. 울던 아이가 맞나 싶었다.

 

  아들이 길을 잃은 까닭은 서문 밑에 좁은 틈을 빠져나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먼저 빠져나간 아들이 길 따라 더 멀리 달아났다. 끝내 혼자만 빠져나가고 두 아이는 몸집이 커서 좁은 틈으로 나갈 수 없자 우리 집으로 뛰어왔다. 아들은 그대로 죽 따라서 큰길까지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 두 아이가 집으로 달려오지 않고 큰소리로 아들을 불렀다면 다시 문 밑으로 들어왔지 싶다.

 

  우리 집은 도시에서 가장 높다. 24층 집이라 어디를 가더라도 눈에 띈다. 북극성 같다. 아들은 길을 잃었지만 높은 우리 집을 알고 집전화도 외우고 있다. 동무한테 놀러 갈 때는 늘 전화 먼저 하고 가는 버릇이 있어 우리 집 전화번호하고 동무네 집 전화번호는 외운다. 경찰한테 저 높은 아파트가 우리 집이라고 손짓을 했단다. 아들을 찾다가 학교에서 주저앉고 집에 와서도 어쩔 줄을 몰랐는데, 아들은 초콜릿을 맛있게 먹으며 웃으면서 내린다. 얼마나 어이없던지. 순찰차를 타고 경찰 아저씨를 만난 일을 자랑하며 좋아했다.

 

  두 해가 지나고 일곱 살이 되었다. 길 건너 학교 유치원을 다녔다. 건널목은 어릴 적부터 다니던 곳이라 혼자서 손들고 잘 건넌다. 그날도 다섯 살 적에 함께 놀다가 길을 잃었던 그 애들하고 놀았다. 이날은 건널목에서 큰 사고가 났다. 나는 집에서 설거지하다가 철퍼덕 퍼벅 하는 큰소리하고 끽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 또 사고가 났구나, 생각하고 자주 일어 나는 일이라 내다보지 않았다.  조금 뒤에 두 아이가 숨차게 뛰어왔다.

 

  “아줌마, 근이가 다쳤어요. 빨리 가요.”

  “어디서, 어떻게?”

  “우리는 먼저 건넜고요, 근이가 건널목 가운데쯤 오다가 오토바이에 깔렸어요.”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바깥을 내다보니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토바이는 건널목에 널브러졌고 철가방이 저만치 길바닥에 떨어졌다.

 

  7차선 건널목은 아이들 걸음으로 건너기에는 너무 길다. 다음 신호를 받았으면 느긋하게 건널 텐데, 우리 아들이 두 아이를 바쁘게 쫓아갔다. 차들은 멈추는데 가운데 자리를 따라 오토바이가 달렸다. 오토바이가 신호를 무시하고 건널목을 지나치려다 작은 아이를 보고 갑자기 멈추었다.

 

  그런데 놀라웠다. 아들이 몸집이 작아서 살아났을까. 넘어진 오토바이 밑에서 기어 나왔다. 이마가 살짝 긁히고 무릎조차 한 군데도 까지지 않고 몸이 말짱했다. 지켜보던 사람들하고 구급대원도 오토바이 아저씨도 모두 놀랐다. 이내 나오지 않아 죽었다고 여긴 아이가 말짱했으니깐. 오토바이 아저씨가 아이 쪽으로 덮치지 않으려고 오토바이를 누이면서 줄였다.  멈추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우리 아들 목숨을 건졌다.

 

  자장면 아저씨도 많이 놀랐을 텐데, 나는 신호도 안 보고 건널목을 달린다고 소리를 꽥꽥 질렀다. 구급차에 내가 탈 자리가 없었다. 아이 먼저 가고 나는 뒤따라 병원에 갔다. 곁님도 일터에서 얘기를 듣고 바로 달려왔다. 우리 둘을 깜짝 놀라게 하고 응급실 침대에 앉아서 아들은 또 방긋 웃는다. 오토바이에 깔리고도 다친 곳이 없다고 아들도 믿기지 않는지 그걸 엄마 아빠한테 씩씩하게 자랑한다. 어머님이 한 말이 떠올랐다.

 

  “아이는 열 살 때까지는 살펴야 한다. 그때까지 삼신한테 목숨 달렸어.”

 

  그래서일까. 어렵게 얻은 손주를 잃을까 싶어 한 돌 지날 때마다 수꾸떡을 먹이고 열 해를 꾸준히 해왔다. 엄마인 나는 그렇게까지 아들 생일을 챙기지 못했다. 어머님은 아들을 나리처럼 떠받들며 끔찍이 생각했다. 아마도 삼신 할매가 부릴 골질을 어머님이 막았지 싶다. 아들은 맛이 없다고 한 입만 베어 먹었을 뿐인데, 열 해를 애써 손으로 빚어 온 붉은 떡을 먹인 깊은 뜻을 깨닫는다. 어머님이 아들을 지켜 주었다고 생각하고 한시름 놓았다.

 

  어린 날 아들은 밖에 나가면 고삐 풀린 망아지같이 쏘다녀 손을 꼭 잡고 다녔다. 길을 걷다가도 더우면 내 손을 뿌리치고 길바닥에 드러눕던 아들이다. 건널목에서도 참말로 누웠다. 길에서 길을 잃고 길에 눕고 여기까지 용하게 왔다. 못에 찔린 일로 엄마한테서 따스한 말이 듣고 싶었거나, 그때 못한 어리광을 부리는 듯했다.

 

  “아들아, 엄마가 달래 주지 않았다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제?”

 

  일에는 차례가 있어. 전화를 받았을때 먼저 말하고 뒤에 들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보채느라 머뭇거릴 틈에 빨리 피부터 달래야 한다는 엄마 말을 믿으렴. 피를 흘리는데 아픈 너를 왜 모를까, 바삐 다투는 일이기에 엄마는 그렇게 먼저 했을 뿐이란다. 그러니 다음에는 운동화를 꼭 신고 타야 한다.  

 

2021.02.04.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