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8. 언니
한 해 끝자락 작은딸이 왔다. 푹신한 걸상 팔걸이에 잠옷을 얹었다. 짙은 파랑에 작고 하얀 점이 촘촘히 찍히고 단추 달린 옷이다.
“엄마가 안동 간 날 문 앞에 있던 그 잠옷이가?”
“응. 빨려고 내놓았지.”
“아직 안 입은 옷 같던데?”
“새로 샀으니 빨아서 입으려고 했지.”
“그날 손빨래를 할 때 말하지. 엄마는 물리는 줄 알았어. 이쁘네!”
“언니는 더 이뻐. 분홍빛이야!”
“언니 잠옷 사줬나?”
“아니, 이달에 둘이 돈 안 넣고 그 돈으로 똑같은 잠옷 샀지.”
새해라고 내게 돈 자루를 준다. 두 딸이 일 다니고 돈을 쪼개서 모은다. 그러께는 둘이 모은 돈으로 언니하고 이웃나라 태국을 다녀오고, 설날하고 한가위와 오월 어버이날하고 엄마 아빠 생일에 그 돈을 헐어 쓴단다. 두 딸이 준 돈은 기쁘게 받는다. 떠나갈 때는 내가 받은 돈만큼 찻삯으로 돌려준다. 두 딸이 돈을 모아서 같이 가고 같은 옷 입으니 부럽다.
나는 언니도 없고 여동생도 없다. 오빠 둘하고 남동생 둘이고 딸은 혼자다. 클 때 싸우고 놀던 바로 밑 동생하고 바로 위 오빠하고는 이야기가 조금 있지만, 모두 짝을 맺고 나서는 다들 부딪치는 일이 애들을 키울 때 같다. 우리 아이들하고 오빠네 아이들하고 동생네 아이들이 같이 크니깐 오빠하고 동생보다는 올케들하고 가깝게 지냈다. 언니가 무척 부럽던 내게 새언니가 둘씩이나 생겨 좋았다. 우리 엄마보다 시누이 쪽을 들고 미운 시누이 짓도 안 했다.
이제 아이들도 훌쩍 크자 큰일 때만 엄마 집에서 만난다. 살림을 꾸리던 손에서 아이들이 떨어진 뒤로는 배움삯이라도 보태려고 올케들도 일을 나간다. 어쩔 길 없는 까닭이 있는 집도 있어서 예전 같지 않다. 나는 마흔이 되기가 무척 싫었고, 마흔을 넘길 때부터 딸이 혼자라서 마음이 허전했다. 쉰이 넘으니 더 허전하고 다른 일로 채울 수 없다고 느낀다.
고등학교 적 동무는 제 언니하고 사이좋게 지낸다. 쉬는 날마다 언니 집에 가고 일손을 돕는다. 철마다 나들이를 같이 다닌다. 이제는 큰언니보다는 작은언니가 없으면 못 산다는 말까지 한다. 동무는 어찌어찌하여 곁님하고 헤어져 산다. 그러니 언니하고 더 가깝게 지내는가 싶다. 지난해는 살림집도 옮겼다. 언니가 사는 시골에서 이웃 마을에 집을 하나 장만했다. 그 낯선 시골에서 혼자 버티는 까닭은 언니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니하고 가까이 지내는 동무가 부럽다.
나이가 들수록 외톨이가 된다고 느낀다. 소꿉동무· 배움터 동무· 일터 동무· 글동무· 한때 그 많던 동무들이 말도 없고 나도 먹고사는 일이 바빠 먼저 말을 건네지 못한지도 어느덧 아홉 해다. 모두가 모래처럼 손아귀에서 술술 빠져나갔다.
그나마 이제는 글을 벗삼을 만큼 일이 몸에 익어 조금은 넉넉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한테 늘 곁을 나누어 주는 곁님이 언니 같은 동무가 아닐까 싶다. 더 나이 들면 동무가 한결 좋겠지만, 그런 벗이 아직 없다. 내가 사는 울타리에서는 곁님이 동무이자 언니 같다. 싸우면서도 기댄다.
두 딸을 보면 그냥 흐뭇하다. 나는 언니가 없어도 딸을 둘 낳았으니 서로 언니 동생이 되기 때문일까. 바라볼 적마다 둘이 부럽고 좋아 보이는데, 두 딸도 그럴까.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짝 물었다.
큰딸한테는 ‘여동생이 있어 무엇이 가장 좋은가’를 묻고, 작은딸한테는 ‘언니가 있어 무엇이 가장 좋은 가’를 물었다. 두 딸이 대꾸했다.
“엄마는 오빠들 있어서 뭐가 좋아? 오빠 동생 다 있잖아. 비슷해!”
“엄마는 오빠가 있어 좋은 점이 뭐야? 똑같애.”
두 딸이 대꾸가 똑같다. 서로 아쉬운 일이 없어 보인다. 스물일곱하고 서른인데.
가만히 보면 두 딸은 어떤 날은 좋아서 동무처럼 지내다가, 또 어떤 날은 삐져서 말도 안 하더라. 내가 보기에는 두 아이가 서로를 흉보아도 이쁘다. 내가 낳은 딸이지만 둘은 사뭇 다르다. 당돌하고 무던하고, 목소리가 크고 나지막하고, 셈이 밝고 착하고, 내세우고 미루고, 이모저모 서로가 어긋난다. 마음이 맞는 날은 척척 돌아가지만, 둘이 조금만 섞이면 좋겠다 싶다.
언니는 수능을 치르자 미루던 운동을 가장 먼저 했다. 살을 뺀다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갔다. 몸이 굵다면서 그동안 입고 싶은 옷 못 입고 운동복만 입고 고등학교에 다닌 언니는 끝내 몸무게를 13kg을 빼고 짧은치마를 처음 입었다. 동생은 잠이 많아 마음이 느긋하여 이래저래 빠지고 얼굴을 가꾸는 일에 마음을 썼다. 이를 고르게 해서 그런다지만, 아직도 거울을 껴안고 잔다. 엄마 몰래 일하고 돈을 벌어 옷을 사 입었다. 방학 때 또 곁일을 하려고 하길래 일거리를 주고 품삯을 치른다.
“엄마는 사장님 같고 누나는 짬일을 하는 듯해.”
“누나는 우리 집에서 일하니깐 설날이라고 덤으로 주지!”
아이들이 심부름이나 일을 맡을 적에, 누구는 더 주고 누구는 안 주고 하는 말썽이 안 나게, 모두 일한 만큼 돈을 주었다. 어릴 때는 셋이 붙어서 설거지를 했다. 작은딸은 돈을 벌려고 군소리 않고 잘했다. 보기 딱해서 내가 설거지를 하면 하루 품삯을 못 받는다고 말린다. 안쓰럽기도 해서 큰딸 몰래 덤으로 이만 원을 주니깐 좋아서 언니 몰래 더 하겠다고 사랑스럽게 굴었다. 뒤늦게 안 언니는 샘바리가 된다.
하루는 작은딸이 수학을 풀이했다. 막혀서 내게 묻지만 내가 뭘 알아야지. 언니한테 물어보라고 말하고 언니한테는 잘 가르쳐 주라고 일러두었다. 언니 방에 들어갔다 나온 작은딸이 엉엉 큰소리 내어 서럽게 울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 울어?”
“언니가 그것도 모르냐고, 학교서 뭐 배웠나, 하고는 안 가르쳐 주잖아!”
이날 얄밉도록 매몰차게 군 큰딸 때문에 다시 잘해 보려던 수학에 마음을 잃을까 걱정스러웠다.
그 버릇이 어디에 갈까마는, 이제는 둘이 마음이 다르면서도 잘 맞춘다. 언니 말이라면 어깨도 펴지 못한 작은딸이 이제는 나긋나긋 제 하고 싶은 말을 잘한다. 찍소리 못하던 그때와 달리 사근사근 언니한테 다가가고 오히려 언니를 잘 타이른다. 가끔은 언니 동생이 바뀐 듯 헷갈릴 적도 많다.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돈을 벌었다. 지난해는 동생이 언니가 태어난 날에 카드 지갑을 보내고, 언니는 동생 스물여섯 돌에 옷을 사주었다. 언니는 여름이고 동생은 겨울인데, 삼십만 원 넘는 겉옷을 사주더라고 이날 말했다. 언니가 사주더라는 말에 내가 얻어 입은 듯했다. 서울 삶이 빠듯하여도 손 벌리지 않고 아껴 쓰고 꿋꿋하게 버티어 준다. 우리한테 옷을 사주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고 동생한테 비싼 옷을 사주는 언니이다.
두 딸이 언젠가 짝을 만나 함께 살면 여러 가지 일도 겪고 아이도 낳으면서 서로 바람막이가 되는 줄 알 테지. 언니가 얼마나 좋은지, 동무 같은 여동생이 얼마나 좋은지, 앞으로 더욱 잘 알 테지. 저마다 마음을 둥글게 다듬으면서 기대기도 하고 속으로 힘도 붙겠지. 피를 나눈 언니와 동생이란 둘 사이가 마음을 터놓는 가장 좋은 동무인 줄 차츰 알아 가리라 본다. 그때가 되면 언니가 있어서, 여동생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할까. 외롭지 않게 낳아 주었으니 나한테 고맙다고 말할까.
내게는 두 딸이 동생같다. 똑 부러지는 큰딸이 어떨 때는 어리숙한 내게 언니가 되고, 그냥그냥 내가 두 딸한테 언니가 된 듯하다. 앞으로 홀로서기를 어떻게 하려나. 걱정도 하지만 설레면서 지켜본다. 고맙다.
2021.02.09.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