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에서 짓는 글살림”은 숲을 사랑하는 눈빛으로 시골자락에서 아이들하고 살림을 짓는 길에 새롭게 맞아들여 누리는 우리말 이야기입니다.
숲에서 짓는 글살림
11. ‘씨’하고 ‘님’ 사이에서
우리가 쓰는 말은 우리 삶을 나타냅니다. 아름답게 잘 쓰는 말이 넘실거린다면 우리 삶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거칠거나 딱딱한 말이 넘실거린다면 우리 삶이 거칠거나 딱딱하다는 뜻입니다. 이웃나라에서 총칼로 쳐들어와서 억누르던 무렵인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이나 일본 말씨가 흘러넘쳤어요. 사람한테 금을 매겨서 위아래로 가르던 조선 무렵에는 여느 사람들 말씨하고 벼슬아치·임금·글쟁이 말씨가 뚜렷하게 갈렸어요.
우리 삶터를 살피면 총칼나라가 물러난 1945년 뒤로 아름길(민주)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사슬길(독재)이 판쳤어요. 사람들이 마음껏 말을 하거나 일을 하거나 어울리기 어려운 사슬길이 열 해 스무 해 서른 해가 흐르는 사이, 여느 말씨를 비롯하여 글이나 책이나 배움터 말씨가 갇히거나 얽매였습니다. 힘으로 윽박지르는 터전처럼 위아래로 가르는 말씨였습니다.
생각에 날개를 달도록 하기보다는, 총칼이나 힘이나 돈으로 윽박지를 뿐 아니라, 이제는 배움수렁(입시지옥)을 거친 배움끈(학력)으로 겉치레나 겉멋을 내세우는 물결이 인다면, 우리말도 이 올가미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말만 바를 수 없거든요. 터전이 바른 곳에서 말이 바르게 싹트고, 이웃하고 푸르게 어우러지는 곳에서 맑으면서 고운 말이 자랍니다.
곰곰이 본다면, 조선 무렵까지는 한문을 앞세운 글이 여느 자리 수수한 말씨를 억눌렀고, 총칼나라이던 때에는 일본말하고 일본 한자말이 여느 삶터 수수한 말씨를 짓밟았어요. 총칼나라가 물러간 뒤에도 오랫동안 사슬나라였으니, 여느 마을 수수한 말씨인 사투리는 어깨를 못 펴면서 숨죽이거나 밀려났습니다. 누구나 배움터를 다니면서 배움책을 펼 수 있는 삶은 좋다고 할 테지만, 모든 책이며 새뜸(신문)은 서울말이에요. 시골말(사투리)을 낮추거나 꺼리는 물결이 꽤 오래 흘렀어요.
새뜸이 한문 아닌 한글을 널리 쓰며 이야기를 제대로 편 때가 고작 1988년 무렵인 만큼, 우리글에 담는 우리말은 이제서야 꼬물꼬물 싹이 터서 줄기가 오르려는 흐름이라고 할 만합니다. 수렁하고 사슬에서 풀려나고서 스스로 어깨를 펴며 꽃을 피우자면 아직 갈 길이 멀어요.
2000년을 넘어설 즈음까지 나라지기(대통령)한테 ‘각하’란 이름을 깍듯이 붙여야 했습니다. 그즈음 나라지기가 된 분은 ‘각하’를 치우고 ‘님’을 쓰자고 했습니다. 낡은 말씨를 한 꺼풀 벗긴 셈이에요. 그런데 ‘대통령’이란 이름부터 ‘통령’에 ‘대(大)’를 붙인 일본 말씨이니, 앞으로는 이런 이름도 갈아치우도록 생각을 그러모은다면 좋겠습니다. 우러르는 벼슬이 아닌, 맡으려는 몫을 수수하게 담아내는 이름으로 갈 적에 참답고 아름다운 나라로 거듭날 테니까요.
님.
나라지기를 가리키는 이름이 “대통령 각하”에서 “대통령님”으로 바뀌었다면 ‘선생님’ 같은 이름은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요? 배움터에서 어린이나 푸름이를 가르치는 어른은 으레 “선생님은 말이야”나 “선생님한테 말해야지” 하고 말하지만, ‘님’은 남이 나를 높이거나 내가 남을 높일 적에 붙입니다. 내가 나를 가리키며 ‘님’이라 하지 않습니다.
아이하고 어버이 사이도 매한가지예요. 아이는 어버이한테 ‘어머니·아버지’라고만, 손위한테는 ‘언니·누나·오빠·형’이라고만 할 뿐입니다. 큰집하고 작은집 사이에서도 ‘작은아버지·작은어머니’라고만 하지요. 이웃이거나 동무나 모르는 사람일 적에 비로소 ‘아버님·어머님’이나 ‘누님·형님’이라 해요.
곰곰이 보면 우리말 ‘님’은 누구라도 고르게 높이는 이름입니다. 어느 자리이건 가리지 않고 높입니다. 사람도 높이지만 ‘해님·별님·꽃님·풀님’처럼 뭇목숨을 두루 높이기도 합니다.
이 ‘님’ 가운데 무척 오래도록 쓰면서 뿌리가 내린 낱말이 몇 가지 있으니, ‘하님’하고 ‘손님’이에요. 지난날에는 ‘종살이를 하는 가시내’를 높이려는 뜻으로 ‘하님’을 썼다는데, 요즈음에는 ‘품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두루 높이는 자리에 새롭게 쓸 만합니다. 낯선 곳에서 찾아온 손(길손)을 깍듯이 여기면서 ‘손님’이라 했어요.
누리꾼. 누리님.
지난날에는 ‘임금님’이 아니고서는 섣불리 ‘님’을 못 붙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디에서나 쉽게 “아무개 님”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누리판(인터넷)을 들여다보면서 글을 남기거나 읽는 사람을 영어로 ‘네티즌’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누리꾼’으로 손질하기도 하는데, ‘-꾼’을 붙인 말씨가 나쁘지 않습니다만 ‘누리님’이라 할 만해요. 우리는 예부터 낯선 이를 높이면서 아끼던 살림이거든요. ‘이웃님’이나 ‘동무님·벗님’ 같은 말씨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씨. 씨앗. 싹트다.
서로 섞이는 터전에서는 서로 가르거나 나타낼 이름을 갖가지로 헤아리기 마련입니다. 미운 사람이라서 ‘놈·놈팡이’라 하고, 그냥그냥 ‘이’라고만 하고, 가시내하고 사내를 갈라 ‘순이·돌이’라 합니다. 여기에 ‘씨’란 말씨가 있어요. ‘님’처럼 높여 주는 말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낮추는 말씨도 아닙니다. 그저 서로 알맞게 섞이면서 지내려는 사이에 쓰는 수수한 말씨입니다.
이 ‘씨’를 한자 ‘氏’로 적는 사람도 제법 있습니다만, 우리말 ‘씨’를 굳이 한자에 맞추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씨 = 씨앗·씨톨·씨알’이거든요. 씨앗이 트기에 ‘싹트다’입니다. 씨앗 한 톨이 바탕이 되어 아름드리로 드넓은 숲이 태어납니다. 한자말로는 ‘백성’이니 ‘민초·민중’이니 ‘국민·시민’이니 하지만, 예부터 수수하게 가리키던 이름은 ‘들풀·들꽃’이에요.
하나하나 보자면, 우리는 백성도 민초도 민중도 국민도 시민도 서민도 인민도 대중도 군중도 집단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사람’이되, 이 땅에서는 ‘들사람(들풀)’이요 ‘꽃사람(들꽃)’입니다. 들풀이나 들꽃은 대단히 작은 씨앗 한 톨에서 비롯해요. 작은 씨앗 한 톨이 퍼지고 자라나면서 들을 이루고 숲이 됩니다.
이웃님이나 동무님을 마주하면서 “아무개 씨”라고 일컫는 이름이란, 너랑 나랑 같은 자리에서 수수하게 어깨동무하자는 마음을 나누려는 숨결이라고 할 만하다고 느껴요. 수수하게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길에 즐겁게 사랑을 일구고 피워내면서 어느덧 서로 아끼고 높이니 “아무개 님”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요.
대통령. 각하. 영부인. 여사. 사모님. 선생님 ……
오랜 낱말로 ‘허울’이 있습니다. ‘허전하다·허술하다’라든지 ‘허튼·헛발질’이라든지 ‘헛간’ 같은 데에 쓰는 ‘허-’가 말밑인데요, 이런 낱말은 한자 ‘허(虛)’를 붙이지 않습니다. 우리 말결은 ㅏ 다르고 ㅓ 다르면서 ㅏ랑 ㅓ가 센말하고 여린말로 갈려요. ‘허·하’가 한동아리입니다. 하늘을 보며 드넓고 가없다고도 여기지만 ‘비었네’ 하고도 여깁니다. ‘하·허’로 맞물리는 ‘허울’은 ‘한울(하늘)’하고 확 다른 결입니다.
이 ‘허울’이란 속은 텅 비었으면서 겉만 번지르르할 적에 써요. “허울뿐인 이름”이나 “허울좋은 말”이라 하지요. 나라가 크고 삶터가 복닥복닥하면서 갖가지 일자리나 일꾼이 있기 마련이니, 곳곳에서 온갖 이름이며 말을 쓸 텐데요, 한자로 이모저모 갖다 붙여서 어느 자리나 누구를 높일 수 있지 않아요. 허울로 높이는 말씨는 이제 허물기로 해요. 헌말은 헐어서 새말로 짓기로 해요. 봄에 새로 싹트는 잎눈이며 꽃눈처럼, 서로 가리키는 이름 한 마디를 고운님이 되고 고운씨가 되도록 가꾸어 봐요. 서로 아름님이 되고 아름씨가 되기를 바랍니다. ㅅㄴ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