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한겨레 우리말’은 우리가 늘 쓰면서 막상 제대로 헤아리지 않거나 못하는 말밑을 찬찬히 읽어내면서, 한결 즐거이 말빛을 가꾸도록 북돋우려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우리 말밑을 우리 삶터에서 찾아내어 함께 빛내려는 이야기입니다.
한겨레 눈말 비말
― 눈 눈 눈, 비 비 비
하늘을 바라봅니다. 여름에는 비요, 겨울에는 눈인, 철마다 다르게 퍼지는 구름이로구나 싶습니다. 봄가을에는 눈이랑 비가 섞이면서 여름겨울 사이를 오가는 구름꽃이 되어요. 하늘눈은 몸눈하고 꽃눈에 잎눈하고 맞닿습니다. 눈이란 피어나는 숨결입니다. 포근히 덮으면서 꿈꾸는 빛이에요.
하늘비는 마당비랑 잇닿습니다. 비란 쓸거나 씻는 숨결입니다. 시원히 쓸거나 씻으면서 살리는 빛이지요.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는 아이들 눈망울에서 환하게 빛납니다. 푸나무한테서 새롭게 잎이며 꽃으로 돋아나는 송이송이, 그러니까 꽃송이에 잎송이는 우리 보금자리랑 숲에서 맑게 빛납니다. 눈송이란, 얼마나 눈부실까요. 눈망울이란, 얼마나 맑을까요. 싹눈이란, 얼마나 싱그러울까요.
이 눈이 덮어 주는 땅은 겨우내 고이 잠들어요. 새근새근 꿈을 지핍니다. 눈이 모두 녹아 흙으로 스며들어 땅에 폭신폭신 녹으면 바야흐로 빗방울로 바뀌는 구름송이가 하늘을 환하게 씻어 주면서 우리 마음마다 파랗게 틔우는 바람을 베풉니다. 파랗게 일렁이는 바람을 머금으니 푸르게 춤추는 숲이 깨어나는 셈인가요.
이 눈을 손바닥에 얹으면서 내 눈으로 널 바라봅니다. 이 비를 혀로 톡톡 받으면서 네 눈은 나를 쳐다봅니다. 눈비가 섞이면서 푸른별이 산뜻합니다. 비눈이 어우러지면서 파란별이 새롭습니다.
하늘눈·눈송이
꼴이 같고 소리가 같은 ‘눈’ 석둥이입니다. 꼴이며 소리가 같기에 밀거나 당기거나 높이거나 낮추는 결은 살짝 다를 만합니다. 사람마다 고장마다 조금씩 숨결을 달리 담아내어 혀에 얹었으리라 봅니다.
바다는 아지랑이가 되고, 아지랑이는 이슬로 온누리를 덮다가 살살 하늘로 올라가서 구름을 이루더니 겨울에 ‘눈’으로 내립니다. ‘하늘눈’인데요, 하늘에서 이 땅을 굽어살피는 듯합니다. 포근히 덮을 곳을 바라보면서 찾아오는구나 싶습니다. 겨우내 깊이 잠들라고 지켜보면서 포근포근 감싸거나 어루만지는 기운이지 싶어요. 물빛이란 모든 빛을 담아내기도 하고, 모든 빛이 고스란히 지나가기도 해요. 냇물이나 바닷물에 물풀이 자라면 물빛은 푸르지요. 냇물이나 바닷물이 하늘빛을 담아면 물빛은 파랗지요. 하늘로 올라가 하얗게 구름으로 피어난 물방울은 송이송이 눈송이로 거듭나면서 구름빛을 그대로 옮긴 흰눈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 흰눈을 손바닥으로 받아서 바라보면 그저 물빛이에요. 손에 닿으면 물빛인 눈빛인데요, 눈송이가 모이고 모이면 ‘덩이진 물빛은 흰빛’으로 환합니다.
물이 담은 하얀 기운이란 ‘하늘’이요 ‘해’일 테지요. 하늘눈은 ‘하양하양(하양 + 하양)’으로 온누리를 토닥입니다. 하얗게 토닥토닥하면서 몸이며 마음에서 모두 비우고 새롭게 꿈꾸어 깨어나라고 이끕니다.
몸눈·눈망울·눈길
우리 몸에서 눈은 왼눈하고 오른눈입니다. 때로는 ‘셋쨋눈’을 뜨곤 해요. 몸으로 보는 두 눈이라면, 마음으로 보는 셋쨋눈이요, 사랑을 깨닫고 꿈을 지켜보면서 온넋을 감도는 셋쨋눈입니다.
‘몸눈’은 봅니다. 보고 누립니다. 누구인가를 봅니다. 누구나 봅니다. 누구인지를 알아봅니다. 누구나 알아차려요. 저기에는 누가 있나요. 거기에는 누가 있을까요. 아직 모르는 사람인 ‘누·누구’입니다. 어느 하나라고 가리키지 않는 사람인 ‘누’입니다. 궁금한 사람이요, 찾아올 사람이며, 찾아갈 사람입니다. 만날 사람이고, 두루 아우르는 ‘누’예요. 모두이자 다 될 수 있는 사람인 ‘누’이지요.
몸눈은 ‘누’를 봅니다. 따로 무엇을 콕 짚어서 본다기보다 두루 봐요. 두루 보는 우리 눈망울은 환합니다. 무엇을 새로 만날는지 궁금하지요. 무엇을 새삼스레 알는지 설레지요. 눈망울에 서리는 빛살은 반짝반짝 눈길로 뻗습니다. 눈이 가는 길이란 우리가 삶을 알아가는 길입니다. 눈으로 보는 길이란 우리가 사랑을 알아차리는 길입니다.
싹눈·꽃눈·잎눈
싹이 트려고 눈을 뜹니다. 처음으로 내밀고 싶으니 눈이 돋습니다. 싹은 앞으로 꽃싹이 될까요, 잎싹이 될까요. 꽃잎이 하나로 얼크러지는 싹일는지 몰라요. 바야흐로 깨어나고 싶으니 눈을 뜹니다. 온누리를 지켜보면서 푸르게 빛나고 싶은 씨앗 한 톨이기에 싹이 트는 눈이 돋고 뿌리가 내립니다. 뿌리를 뻗으면서 ‘싹눈’이 깨어나 줄기를 올려요.
자, ‘꽃눈’이 되는군요. 꽃으로 보는 눈입니다. 꽃이 되어 보는 눈이에요. 꽃이란 몸을 입으면서 둘레에 꽃빛을 나누고픈 꽃눈이지요.
와, ‘잎눈’이 되네요. 잎으로 보는 눈이군요. 잎이 되어 보는 눈이라지요. 잎이란 몸으로 두르면서 곁에 잎빛을 퍼뜨리려는 잎눈입니다.
아직 모르는 숨결(누)을 만나고 싶어 설레는 꽃싹이나 잎싹은 어떠한 풀꽃나무로 자라려나 기다리고 꿈꾸면서 온마음을 뜨면서 보려 합니다. 푸르게 눈뜨는 싹이며 움은 숲이 되고 별이 됩니다.
눈빛·눈부시다·눈뜨다
눈이 빛납니다. 하늘눈이 빛나요. 눈이 빛나요. 몸눈이 초롱초롱합니다. 눈이 어쩜 이리 빛날까요. 꽃송이로 태어나는 꽃눈이, 잎새로 피어나는 잎눈이, 더없이 맑으면서 푸릅니다.
빛나는 석둥이 ‘눈빛’은 반들반들 반짝반짝 마치 별이 내려온 듯합니다. 아니 저 온별누리 별도 별입니다만, 하늘에서 구름으로 뭉쳐서 다시 낱낱으로 흩어져 내리는 눈도, 우리 몸에 있는 눈도, 푸르게 우거지는 숲마다 깨어나는 눈도, 그야말로 ‘눈부시다’고 할 만해요. 환하게 아름다운 하늘눈이고, 맑게 고운 몸눈이며, 푸르게 사랑스러운 싹눈입니다.
이제 하늘눈은 하늘을 확 열면서 내립니다. 이제 눈꺼풀을 올려 몸눈을 틔우고 생각을 열어젖힙니다. 이제 모든 싹눈은 기지개를 켜고서 새몸이 되려고 껍데기를 열고서 밖으로 나옵니다.
누리다
‘누리’에 있기에 ‘누린다’고 합니다. 이 땅이 ‘누리’입니다. 이 땅에 있는 하루가 ‘누리는’ 나날입니다. 바람이며 물도 이 땅, 그러니까 이 별을 누립니다. 사람을 비롯한 뭇목숨도 이 땅, 바로 이 별을 누려요. 풀꽃나무는 여러 숨결하고 사이좋게 얼크러지면서 이 땅, 그야말로 이 별을 누린답니다.
저마다 다른 꼴이자 빛이자 넋인 세 가지 눈은 저마다 즐겁게 살아가려 합니다. ‘누리다 = 즐기다’예요. ‘누리다 = 맛보다’예요. ‘누리다 = 해보다’예요. ‘누리다 = 살다’예요. ‘누리다 = 보다’예요. ‘누리다 = 웃다’예요. ‘누리다 = 춤노래’예요. ‘누리다 = 잔치’예요. ‘누리다 = 사랑’이고요.
누리지 못하면 슬픕니다. 누리지 못하니 울어요. 누리지 못하는 나머지 아파요. 누릴 길이 없으면 갑갑하고, 못 누리도록 가로막으면 그만 죽어 버립니다.
누릴 틈을 내려고 애써요. 혼자 아닌 함께 누리려고 기운을 냅니다. 서로서로 새롭게 누리면서 어깨동무하려는 마음이기에 이러한 터에서 사랑이 자라납니다.
누·누구
우리 사는 푸른별에는 사람만 있지 않습니다. 이 별에는 사람을 비롯한 모두 고루 있어요. ‘동식물’이란 이름으로는 못 갈라요. 풀꽃나무도 움직이는걸요. 짐승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짐승도 뿌리를 내려요. 우리가 집을 짓고서 어느 곳을 보금자리나 마을로 삼는다고 한다면, 이 몸짓이 바로 뿌리내림입니다.
우리는 ‘누구’일까요? ‘누’가 ‘누구’를 말하는가요? 이제부터 모두 처음으로 돌려서 헤아리고 맞아들여야지 싶습니다. 틀에 박힌 굴레가 아닌, 사슬에 매인 수렁이 아닌, 스스로 꿈꾸고 노래하면서 포근하게 품는 숨결로 나아가야지 싶어요.
모든 숨결은 뿌리를 내리면서 움직입니다. 사람·풀꽃나무·짐승은 움직이면서 뿌리를 내립니다.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보면 좋겠어요. 누가 누구인가를 눈으로 누리면서 느끼기를 바라요.
누르다·누리
땅빛은 누렇습니다. 붉은 흙이나 까만 흙도 있지요. 땅심이 어떠한가에 맞추어 땅빛이 다른데요, ‘누렇다·누르다’는 “땅이 이렇다·나는 땅이다”를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이 누런 곳, 누른 터, 바로 땅, 그러니까 푸른별(별)에서 살아가기에 ‘누리’는데요, 이렇게 누리는 곳이라서 단출하게 ‘누리’라 합니다. 온누리예요. 사랑누리예요. 한누리예요. 꽃누리이고 기쁨누리입니다.
울타리가 없고 담이 없으면서 넘나드는 데라서 ‘누리’입니다. 누구나 눈을 뜨고서 누리는 삶이기에 ‘누리’라고 할 만합니다. 이러한 누리에서 조금조금 금을 긋고서 나누는 동안 ‘나라’가 됩니다. 나라에는 울타리가 있고 담이 있어요. 섣불리 넘나들지 못하도록 해요. ‘누리’나 ‘나라’나 똑같은 땅이되, 한쪽은 울타리 없이 흐드러지는 홀가분한 빛이요, 다른 한쪽은 울타리를 세우면서 너랑 나를 가르는 틀입니다.
‘누리’에서는 그야말로 누립니다. 누구나 누리면서 봅니다. 누구이든 맛보면서 해보고 만나고 사귀고 반갑고 즐겁습니다. ‘나라’에서는 참말로 나눕니다. 누구이든 나누면서 남남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하나”인데, ‘나라’라는 틀을 세워서 스스로 울타리에 갇힐 적에는 “서로 달라서 그냥 다른 것”으로 옭아맵니다.
하늘비·빗물
하늘에서 비가 옵니다. 비님이 옵니다. 비를 두고는 으레 ‘비님’인데, 눈을 놓고는 딱히 ‘눈님’이라 하지 않아요. 눈은 눈 그대로 누(모든 사람이자 숨결)이니까 저절로 님인 터라 구태여 ‘눈님’이라 할 까닭이 없을 만합니다. 이와 달리 비는 물방울인 채 구름으로 덩이가 졌고, 덩이가 진 물방울이 ‘흩어지기’보다는 ‘덩이째’ 땅으로 찾아가서 온누리를 싹싹 쓸고닦듯이 말끔히 씻어 줍니다. 이런 짓이며 품이며 삶을 바라보며 따로 님을 붙여 ‘비님’이 되는구나 싶어요.
빗물은 안 가립니다. 무엇이든 씻어요. 누구나 씻지요. 앙금도 씻고 생채기도 씻습니다. 다친 몸이며 마음은 빗물로 정갈하게 씻어서 다스립니다. 빗물은 사람을 씻으면서 몸에 기운을 북돋웁니다. 지저분한 티끌이랑 먼지를 쓸어냈으니, 이제부터는 온바다를 아우르던 숨빛에다가 온하늘을 누비던 바람빛을 여미어 살갗을 거쳐 몸으로 스미도록 하지요.
빗물을 먹어야 풀꽃나무가 자라고 싱싱합니다. 빗물 먹은 풀꽃나무를 곁에 두어야 사람도 짐승도 싱그럽습니다. 비를 맞으며 노는 아이는 듬직하고 야물찬 어른으로 일어섭니다. 비를 모르거나 꺼리거나 싫어하는 채 나이만 먹은 어른은 소담스러운 ‘함박비’를 ‘물폭탄’이라고 함부로 말하면서 스스로 삶을 더럽힙니다.
마당비·빗자루·비질
‘하늘비’는 푸른별을 두루 쓸고닦아서 치웁니다. 하늘비가 지나간 자리는 그지없이 깨끗해요. 모두 쓸어내니까 깨끗하지요. 남기지 않아서 깨끗합니다. 이 하늘비를 바라본 사람들은 삶자리인 집하고 마을에서 새롭게 ‘비’를 엮습니다. 수수빗자루라든지 갈대빗자루를 묶어요. 마당을 ‘마당비’로 쓸어요. ‘빗자루’를 쥐고서 티끌이며 먼지이며 쓰레기이며 샅샅이 쓸어냅니다. 남기지 않고 쓸어내기에 깨끗해요.
‘비질’로 잘 쓸어내어 깨끗한 터전이라면, 이대로 바람을 맞이하고 해를 맞아들이고 눈비를 머금도록 하면서 그대로 가꿉니다. 그대로 나아가는 맑은 손길로 살림을 가다듬습니다.
비다·비움·비우다·빔
비가 오니까 ‘비다’입니다. 비가 하는 일이니까 ‘비움’입니다. 남기지 않고 쓸어내니까, 깨끗하게 치우니까 ‘비우다’예요. 좋고 나쁘고를 가리지 않고서 처음부터 모두 새롭게 하도록 다스리는 비님이에요. ‘빔’을 느껴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즐거이 바라보라고 알려줍니다.
어렵던 살림을 비웁니다. 힘들던 나날을 비웁니다. 아파서 멍울이 진 곳을 비웁니다. 생채기도 고름도 다 비웁니다. 짜증이며 성이며 부아이며 고스란히 비웁니다. 슬픔도 비우고 기쁨도 비워요. 좋아도 비우고 싫어도 비웁니다. 왜 비우는가 하면, 자잘한 것이 그동안 너무 많이 뭉치거나 쌓이거나 맺힌 터라, 사랑이 싹틀 틈이 없거든요. 꽃송이가 터질 만한 틈새가 없으니 비워요. 꽃망울이며 잎망울이 흐드러진 곳을 바라볼 눈빛이 해맑을 틈바구니를 열려고 비웁니다.
빗방울·빗소리·비내음·비노래·빗길
‘빗방울’이 듣습니다. 빗방울을 듣습니다. 비가 오는 몸짓은 ‘듣다’예요. 비를 덜 맞거나 안 맞고 싶으면 ‘긋다’를 합니다. 비를 긋지요. 빗방울이 들으니 눈을 뜨고 귀를 열고 마음을 틔워 몸을 일으키고서 듣습니다. 무엇을 들을까요? 바로 ‘빗소리’를 듣습니다. 코로는 ‘비내음’을 맡아요.
온누리를 깨끗하게 씻어 주는 빗방울 몸짓이란 늘 노래입니다. 노래하면서 쓸고닦아요. 춤추면서 치워요. 놀이하듯 살림을 해요. ‘비노래 = 살림노래’로군요. ‘비노래 = 삶노래’네요. ‘비노래 = 사랑노래’이자, ‘비노래 = 숲노래’이지 않나요?
이 빗물을 마셔요. 골짜기에서 솟는 샘물이란 바로 빗물인데, 바다에서 아지랑이란 몸으로 바꾸어 바람을 타고 하늘을 가르다가 구름이 되어 다시 하늘을 바람 타고 돌면서 이 땅을 찾아들어 숲에서 모여 하나가 된 물방울인 빗물이라서 샘물입니다. 이 샘물은 골짜기를 타고서 냇물로 흐르고 다시 바다로 갑니다.
그냥 물이 아닌 빗물이랍니다. 그냥 물이 아닌 빗물을 마시기에 모두모두 살아나고 하루를 지어요. 어떤 물을 마시려나요? 어떤 물을 맞이하면서 노래하려나요? 스스로 삶을 짓는 눈길이라면 바로 ‘빗길’을 달리는 어린이놀이를 사랑할 노릇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눈이면서 비입니다. 우리는 바로 고스란히 물입니다. 푸른별을 이루는 풀꽃나무를 비롯한 뭇숨결은 언제나 ‘방울’이에요. 빗방울, 물방울, 꽃방울, 빛방울, 숨방울입니다. 방울지는 마음을 하나로 모두면서 다 다르게 피어나서 흐드러진 푸른별 보금자리예요. ㅅㄴ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