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28. 훔치다
“엄마 나 어떡해. 비밀번호 말해 버렸어.”
“그걸 말하면 어쩌노?”
“몰라. 윽박지르고 다그치니까 어쩌지 못해 말했어.”
“사이버 경찰한테 말할 테니 울지 마. 엄마 일 마치면 빨리 갈게.”
“벌써 내 비밀번호도 바꾸어 버렸어. 이젠 못 들어가. 어떡해.”
아들이 누리놀이(컴퓨터게임)를 하다가 덧이름(아이디)을 빼앗겼다. 집으로 빨리 가야 하는데 첫째 아이를 태우러 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엄마 차가 날아다니는 듯해.”
옆에 탄 딸이 말했다. 팔에 잔뜩 힘주고 달리느라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힌다.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땀이 눅눅하게 뒤범벅이 되어 집에 들어섰다.
아들은 엄마를 보자 덧이름만 잃지 않고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 온 누리돈(사이버머니)까지 잃었다. 아들은 아깝다고 자꾸 말하고 흐느낀다. 그 돈이 뭐길래 모은다고 학원도 빼먹고 학습지도 빼먹었다. 무리를 나누어 하느라 밥때도 놓치고 컴퓨터와 마주하고 꼼짝하지 않았다.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열쇠를 잃어버렸으니 기운이 없다. 괴로워하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울음소리가 쓸쓸하다.
이래저래 달래도 그치지 않는다. 어쩌지 못하다가 회초리를 든다. 아이가 미루고 풀지 않은 학습지를 들먹였다. 한 대 맞고서야 울음을 뚝 그친다. 집안이 고요하다. 고요해서 서늘하기까지 하다. 딴에는 눈물을 그치게 하려고 다른 일을 나무랐는데 잘못했구나 싶다.
“이미 돈을 잃었는데 그만 잊자.”
“내가 그 돈 모은다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있잖아, 엄마는 시장 갔다가 쌈지를 잃은 적 있어. 그날 마침 삼십만 원을 쓸려고 찾았는데 몽땅 잃었어. 백 미터도 안 되는 길을 가고 또 가 보아도 쌈지는 이미 사라졌어. 카드도 잃었다고 알리고, 주민등록증은 경찰서 가서 알린 다음 새로 받는다고 돈 내니 아깝더라.”
“엄마, 참말 그랬어 ?”
엄마가 저보다 더 크게 잃었다는 말에 아들이 차츰 마음을 돌린다. 조금은 홀가분하자 부드럽게 입을 연다. 덧이름을 빼앗기기까지 일어난 일을 말했다.
아들이 한 가지 놀이만 해서 일이 크지 않았다. 놀이는 수다를 하면서 했다. 잘 알지도 모르는 사람하고 짝을 이루고 나이가 두 살 많은 형 꾐에 넘어갔단다. 아들 방에 문 앞을 지나가면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보니 글을 주고받더라. 열 살이 열세 살 형하고 놀이한다. 낮 한 시나 세 시에 맞추고 놀이를 했다. 그래서 나들이를 마음 놓고 가지 못하고 안 나가려고만 했다.
책상맡에 종이가 하나 있는데 숫자를 빽빽하게 적었다. 열쇠말(비밀번호)을 적고 바꾸고 까맣게 지우고 또 쓴다. 공책에다 쓰면 흩어지지 않을 텐데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작은 종이에다 썼다. 엄마도 못 보게 감춘다. 셈틀에 열쇠말을 걸고 놀이에서도 날마다 바꾸었다. 잃어버리면 휴지통을 뒤엎어서라도 찾았다. 셈틀을 켤 적마다 바꾸니 하루에 여러 벌 바꾼 셈이다. 그토록 애쓰며 지켰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덧이름을 잃었다.
아들은 놀이에 푹 빠져 빼앗긴 날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쉰다. 아이가 여느 때 마음으로 돌아올 때까지 곁에 있었다. 아들은 사슴벌레를 머리맡에 두고 놀다가 잠이 든다. 나는 잠든 아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아들을 키우면서 나도 처음 보고 겪지만, 이 일을 겪은 뒤로 슬기롭게 넘기는 길을 배웠을까. 엄마 마음을 알까. 아들은 스스로 셈틀을 떼어낸다. 바퀴를 밀고 바깥마루에 내놓는다. 시끄럽게 울던 아이가 얌전하다. 의젓하기까지 하다. 아이 일로 근심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자나 깨나 엄마는 너만 생각하던데, 엄마 골나게 하지 말재이.”
밥상을 차릴 적에 곁님이 아들을 데리러 가서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여름 방학인데, 아들이 도서관으로 가려던 마음을 바꾸고 집에서 내내 혼자 보낸단다. 혼자 집에 있을 아들을 생각하며 먹을 빵을 굽고 과일도 깎는다. 아침밥을 먹고도 김밥이 먹고 싶대서 세 줄 사서 책상맡에 두고 라디오를 켜 놓고 일터에 갔다. 문득 아들이 궁금했다.
“뭐해?”
“밥 먹어.”
“또 밥먹나.”
놀이 한다고 억지부리느라 안 먹고 여태 어찌 버티었는지.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배를 채우느라 한꺼번에 많이 먹는다. 전화기 너머로 아침에 틀어 놓은 라디오 노래가 들린다.
“어떤 노래가 나와?”
“가만 있어 봐, 내가 들려줄게.”
아들은 전화기를 스피커에 대고 들려준다. 나는 들어도 무슨 노래인지 몰랐다. 그냥 아들이 전화기를 뗄 적까지 가만히 듣는 척했다.
이제 아들은 라디오를 듣고 사슴벌레, 구피, 시골에서 갖고 온 미꾸라지를 따로 통에 담아 곁에 두고 만진다. 까르르 웃음소리 내며 놀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일터에서 즐겁게 버텼다.
내가 노트북을 펼치면 아들 마음이 안 좋을까 싶어 집에서는 되도록 안 하려 했다. 아들더러 누리놀이를 좀 하지 말라고 하면 엄마를 빗대던 아들 마음을 헤아렸다. 하루 지나니 아들 마음이 한 걸음 나아간다.
“엄마, 어제 일이 벌써 오랜 일 같아.”
“그렇지? 빼앗은 사람보다 잃은 사람이 오히려 마음이 더 가벼워. 잘 생각했다.”
2021.04.02.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