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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아이] 34. 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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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34. 손질

 

  셋째 아이가 장난감 비행기를 손에 들고 몸을 이리저리 휘젓고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비행기 놀이를 했다. 침대에도 올라가고 끄트머리를 등지고 앉아 비행기를 들고 몸을 틀다가 그만 기우뚱 뒤로 넘어졌다. 미닫이를 박고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얼떨결에 일어난 아들은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머리를 박은 유리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엄마 유리 깨서 어떡해?”

  “좀 얌전히 놀아. 클날 뻔했잖아.”

 

  유리에는 아들이 세게 박은 곳에서 사방으로 촘촘하게 금이 가고 머리 자국이 어렴풋이 드러난다. 맑은 유리가 아닌 부옇고 두꺼워서 금이 나도 와르르 떨어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조각이나 가루가 떨어졌더라면 큰일날 뻔했다. 우리 아들 눈하고 머리하고 얼굴이 박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덜컹했다. 잘게 금 간 유리를 쓱윽 훑으니 날카롭다. 유리가 깨지면서 살짝 꺼지고 흔들렸다. 아이들이 모르고 손을 댔다가는 베일 듯하다. 금이 난 유리가 떨어지지 않게 안팎을 단단히 붙였다.

 

  우리 집은 마루를 가른 방이 있다. 미닫이를 닫으면 아들 방이 되고 열어 두면 부엌하고 트여 지나가는 자리인데, 마냥 열어 두지 못한다. 찬바람이 들어오면 뻑뻑한 문을 닫으니 덕지덕지 붙여 놓은 자국이 눈에 거슬리고 아슬아슬하다. 벽 쪽으로 두 문짝을 밀쳐 두 문짝을 포개니 깨진 유리가 그나마 덜 드러나지만 닫고 열 적에 깨진 유리가 덜컹거려 언제 와르르 내려앉을지 몰라서 깨진 문짝을 떼어 안쪽에 바꿔 끼웠다.

 

  문짝 하나가 얼마나 무거운지 곁님이랑 둘이서도 들기 힘들고 아래쪽 도르래도 깨져서 뻑뻑했다. 유리를 가릴 적에 도르래도 가릴 생각하고 벽 쪽으로 열어 붙인다. 두 문을 닫으면 깨진 유리가 아래 네 칸 가운데 벽에서 둘째 자리가 된다. 문 한 짝에 유리가 아래위로 둘씩 있어 두 문짝에 유리창이 아래 넷 위 넷 여덟인데 깨진 유리를 갈아 끼우려고 알아보니 똑같은 유리가 안 나온단다. 한 짝 유리만 바꾸면 티가 나고 모두 바꾸자니 돈이 많이 들어서 테이프를 붙이고 이대로 둔다. 한낮이면 햇살이 문까지 들어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붙인 자리가 누렇다. 말라서 너덜너덜 뜨면 떼고 다시 붙였다.

 

  깨진 자리를 붙인 유리 쪽으로 내 자리를 하나 마련한다. 아이들이 쓰는 책상을 하나 놓고 숙제를 봐주거나 책을 보았다. 책상을 세 아이가 들고 다니면서 쓰고 나도 쓰느라 이제 그 책상다리 하나가 삐거덕하고 아들이 팔을 괴면 자꾸 기운다. 자꾸 기울어서 짜증도 낸다. 운동하고 온 아빠한테 투덜거리니 뚝딱 하고 고친다. 살살 다루면 말짱할 책상인데 내가 책상을 탕탕 치기도 하고 아들이 울다가 발로 밀치기도 해서 책상다리를 막 다루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곁님이 말없이 고쳐준다.

 

  내친김에 화장실 선반도 달고 바깥마루에 짐칸도 한 층 올려 깔끔하게 선반을 놓아 주었다. 시골집에서는 말썽이 나면 곁님이 고쳐줄 때까지 기다린다. 밥솥도 고치다 안 되면 맡기고 불도 갈아끼우고 물꼭지도 고치고 보일러도 손보고 트렉타도 손본다. 그렇지만 재바르지는 않다. 흙살림을 거들 적에는 노는지 일하는지 느릿느릿 움직이고 아무리 바빠도 뛰거나 서두르는 일이 드물다. 어머니를 많이 닮아 무엇이든 고이 만지고 아껴 쓰고 남들이 버린 물건을 잘 주워서 쓴다.

 

  하루는 곁님이 둘째 아이와 유리 미닫이에 판종이를 붙인다. 아들이 네 살 적에 머리를 박아 금 간 곳을 얼렁뚱땅 붙여 놓았는데, 너덜너덜한 데를 떼어내고 판종이로 곱게 붙이며 곁님이 말했다.

 

  “집을 꾸미는 일을 배우고 싶다. 나이 들면 엄마처럼 붓글씨 쓰고 싶어. 여보 먼저 배워 보지.”

 

  나이 들면 어머니처럼 붓글씨를 쓰고 싶고 나 먼저 배우라고 말하지만 나는 글쓰기를 하고 싶어 붓글씨는 미룬다. 곁님은 이것저것 고치는 일에 재미가 있어 아이들 방도 손수 꾸미고 싶다는 말을 처음 듣는다. 나는 사내들은 모두 잘 다룬다고만 여겼다.

 

  이제 아빠가 손질한 미닫이를 열 살 난 아들이 열어 보고 웃는다. 어릴 적 머리를 박아 깨진 채로 다섯 해를 묵혀둔 곳을 아직 유리를 바꾸지 않았다. 다른 유리하고는 티가 나는데도 제가 깬 유리가 판종이에 가려 안 보여서 좋아하고 아빠가 고쳐 놓은 비틀거리던 작은 책상에서 책을 펼친다.

 

  우리 아들도 오래된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다. 다리가 덜렁거리고 접히던 책상도 버리지 못하게 하고, 베개를 새것으로 사 주어도 너덜너덜 다 떨어진 베개를 하얀 천을 덮어서 바늘로 기워 달라 한다. 베고 잠을 자면서도 낡은 것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이다음 엄마는 버리지 않겠네.”

 

  늘 새것만 좋아하는 딸하고 다르게 아들은 아빠 닮아 고쳐쓰고 물려입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아빠는 살림살이에 이모저모 보태 쓸까 싶어 남들이 쓰다 버린 쓰레기를 꽤 집에 들고 왔다. 이건 아들 장난감으로 저건 내 책장으로 크고 작고 낡은 물건을 들고 와서 나도 그럭저럭 잘 썼다. 집을 옮길 적에는 모두가 버릴 짐일는지 모르지만 아빠는 살림꾼이다. 얼마 앞서 누가 새 받침자리를 버렸다고 넷을 주워 온다. 이제는 주워 쓰려고 덜 기웃한다더니 또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2021. 5. 4.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