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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40 낯설게 또는 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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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40 낯설게 또는 나답게


《미학 오디세이 2》
진중권
휴머니스트
1994.1.15.


《미학 오디세이 2》을 내처 읽는다. 둘쨋책은 ‘마그리트’를 바탕으로 화가와 철학가와 음악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철학가는 ‘모든 예술에서 꼭대기는 시’라고 여긴다는 이야기가 흐른다. 그러니까 ‘마그리트’는 철학가이자 화가였다는데, 이분 그림은 ‘시’와 같다고 한다. 시처럼 읽을 만하겠다.

 

내 어릴 적을 돌아본다. 의성 멧마을에서 나고자라던 그무렵에 우리 엄마아빠는 겨우겨우 먹고살았다. 겨우 먹고살아도 늘 빠듯했다.

 

열너덧 살 무렵을 떠올린다. 중학교에 다니던 그즈음, 다른 수업보다 미술이 싫었다. 참 싫었다. 학교에 연못이 있었고, 둑을 따라 풀밭인데, 밖에 앉아서 풍경화를 그릴 적에는 먼저 연필로 밑그림을 하고 물감으로 빛깔을 입히는데, 나는 물감질이 서툴었다. 빛깔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도 잘 알기 어려웠다.

 

붓질이 서툴어 그림을 가까이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그림을 못 그린다고 여겨 다른 사람 그림도 그리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그림을 못 그리고 모르니까 미학도 미술도 어려울는지 모른다.

 

《미학 오디세이》는 어렵다. 첫쨋책도 둘쨋책도 어렵다. 가만히 보니 ‘미학’이란 말도, ‘오디세이’라는 말도 어렵다. 글쓴이는 왜 이렇게 어려운 말로 어려운 이야기를 쓰려고 할까? 어려운 말로 어렵게 이야기를 풀어야 ‘미학’이고 ‘예술’이고 ‘학문’일까?

 

‘데페이즈망 기법’을 알아야 마그리트 그림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흔히 보는 것을 낯선 자리에 툭 던져 놓는 길이 ‘데페이즈망’이라는데, 쉽게 말하자면 ‘낯설게 하기’쯤일까? 그래, ‘낯설게 하기’일 테지. 그런데 왜 ‘낯설게 하기’라고는 안 하고 ‘데페이즈망 기법’이라 해야 할까? 이런 말을 그냥그냥 써야 미학이나 예술이나 철학이나 문학이 되는가?

 

책을 덮고서 생각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낯설게 하기’는 아니다. ‘나를 바라보기’로 글을 쓰고 싶다. ‘나를 내가 바라보기’를 하고 싶다. 그런데 내가 나를 바라보려면, 껍데기나 허울이나 옷이 아닌 속마음을 보아야 한다. 옷차림만 훑어서는 마음을 모를 수밖에 없다. 나를 나답게 참답게 느끼고 알려면 얼굴이나 몸이 아닌, 속으로 흐르는 숨결과 넋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읽는 문학은 ‘데페이즈망’에 빠져서 겉모습만 꾸미는 셈은 아닐까? 뭔가 남다르게 꾸며내어야 멋있거나 아름답다고 여기면서 문학상을 주지는 않을까?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다. 나는 내 마음을 읽고서 쓰고 싶다. 나는 내 하루를 스스로 가꾸면서 이 하루를 글로 쓰고 싶다. 시를 먼 곳에서 찾고 싶지 않다. 낯선 모습도 낯익은 모습도 아닌, ‘나’를 나로서 보고 싶다. 구름에 깃든 마음을 읽고서, 꽃송이에 깃든 숨결을 읽고서, 맨발로 멧길을 오르내리는 발바닥에 깃든 흙빛을 읽고서, 집안일을 하고 가게일을 하며 흘린 땀방울을 읽고서, 짝꿍하고 둘이서 꾸리는 집살림을 읽고서, 이 모든 하루를 고스란히 옮기고 싶다.

 


2023. 10. 03.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