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42 내가 꼽는 책
《담론》
신영복
돌베개
2015.4.20.
2019년 2월 어느 날을 떠올린다. 일곱 사람이 책모임을 하자며 처음으로 찻집에서 만났다. 어느 분이 나한테 《담론》을 읽어 봤냐고 물었다. 안 읽었다고 얘기하는데 “그 책도 모르느냐”는 듯이 자꾸 말을 해서 참 부끄러웠다. 나는 여태까지 뭘 하며 살았나.
그런데 모인 일곱 사람 가운데 한 분이 전라도라면 아주 싫어했다. 우리 일곱 가운데 전라도사람이 있었다. 모처럼 다들 큰마음을 먹고 책모임을 하기로 했지만, 그만 첫모임이 끝모임이 되고 말았다.
그 뒤 그 책모임을 잊었는데, 어느 날 책집에 갔더니 《담론》이 보였다. 이 책을 어떻게 모르느냐고 타박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책을 집어 보았다. 《담론》은 신영복 님이 들려준 말을 받아적어서 꾸렸다고 한다. 크게 두 갈래로 이야기를 묶는데, 앞쪽은 ‘시경’과 ‘주역’ 같은 중국 옛책에 나온 이야기를 풀어낸다. 뒤쪽은 사슬(감옥)에 갇히던 무렵에 겪은 일을 풀어낸다.
곰곰이 보면, 옛책(고전)으로 배운다고 할 적에는 다들 중국책을 손꼽는다. 중국에서 나온 책이어도 훌륭한 책은 훌륭하겠지만, 책으로 적히지 않은 훌륭한 삶도 많지 않을까?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멧골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내내 일만 하셨는데, 아마 두 분은 책을 모르셨을 만하지만, 삶에서 배우고 곱씹을 이야기가 많다고 느낀다.
나는 ‘노자’ 이야기에 많이 끌린다. 《담론》에서 풀이하는 노자를 보면, ‘공부’라는 한자말에서 ‘공’은 하늘과 땅을 잇는다는 뜻이고, ‘부’는 하늘땅을 사람이 잇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삶에서 공부 아닌 길이란 없고, 공부하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라고 한다. 모름지기 모든 공부는 옛책(고전)을 바탕으로 쌓으며, 예부터 사람들이 일군 살림을 물려받는다고 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이 공부이고, 낡은 생각을 깨트리는 일이면서, 가슴부터 발까지 가는 동안 삶에 발을 디딘다고 한다.
신영복 님은 ‘변방’을 되풀이해서 말한다. 한 나라나 한 사람도 ‘변방’이 짓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쓰는 ‘말’이라는 그릇은 매우 작기에, 이 작은 그릇으로 바닷물을 뜬다고 한들, 작은 그릇에 담긴 물은 바다가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런데 알쏭달쏭하다. 커도 바다이고 작아도 바다이지 않을까? 귀퉁이(변방)가 한 나라와 한 사람을 짓는다면, 작은 그릇에 담긴 물이 온누리를 이루고, 작은 말 한 마디가 모든 마음과 삶을 일구지 않을까?
멧골에서 나고자란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언제나 씨를 뿌리고 돌보고 일구어서 거두었다. 작은 씨앗 한 톨은 나중에 쌀이 되고 열매가 되었다. 작은 씨앗 한 톨은 우리 목숨이면서 숲이고 이 별(지구)이지 않을까?
공자나 맹자나 시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공부’해야 한다는 뜻은 좋다고 느낀다. 작은 조각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크게 하나를 보아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을 ‘병법’에 빗대는 이야기도 아리송하다. 공부이든 시쓰기이든, 시골사람이 논을 갈고 밭을 가는 일하고 닮지 않았을까? 배우는 길이든 글을 쓰는 길이든, 시골내기가 씨앗 한 톨로 새 숨결을 일구는 길하고 닿지 않을까? 말과 글이란, 아주 작은 말과 글이어도 바다를 담고 하늘을 담지 않을까? 시쓰기를 ‘병법 군사배치’하고 빗대는 일이란, 마치 ‘공부란 전쟁이다’ 하고 읊는 셈이지 않을까?
숲을 숲 그대로 받아들이면, 누구나 어질게 배운다고 느낀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이웃 아주머니 아저씨도, 먼 옛날부터 경북 의성 멧골마을에서 나고자란 모든 할매 할배도, 책을 모르고 옛책(중국 고전)은 더더구나 몰랐을 테지만, 하늘과 땅을 알고 바람과 숲을 알고 씨앗 한 톨을 알고, 아이들을 사랑하며 돌보았다.
여러 옛책을 바탕으로 삼아서 배워도 좋으리라. 그렇지만 책이 없어도 삶으로 배운 사람이 훨씬 많다. 책을 모르고 글조차 몰랐지만, 착하고 참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주 많다. 2019년에 타박을 듣고서 2023년에 이르러서야 《담론》이란 책을 다시 폈지만, 이 책을 읽어야만 시나 글을 쓸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신영복 님은 잡지사에서 ‘삶에 이바지한 책 하나’를 꼽아 달라는 묻자, 《논어》와 《자본론》과 《노자》를 꼽았다고 한다. 다 좋은 책일 테지만 너무 어려운 듯하다. 나는 아직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줄 만한 책이 무엇인지 모른다. 책을 다시 읽고 책을 보는 눈이 뜨이면 그때는 스스럼없이 하나를 집을는지 모르겠지. 아직까지 나한테는 ‘어머니라는 책’과 ‘아버지라는 책’과 ‘의성이라는 멧골마을이라는 책’, 이 세 가지하고 ‘우리 세 아이라는 책’이 내 삶에 이바지한 책이라고 느낀다.
2023.10.05.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