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책숲마실
이미 벌써 아직
― 부산 〈학문서점〉
이미 읽은 책을 되읽습니다. 예전에는 그무렵까지 살아온 나날을 바탕으로 읽었고, 오늘 읽는 책은 오늘까지 살아낸 숨결을 바탕으로 익히는 살림입니다. 열 살에 읽은 책을 스무 살에 되읽으면 남다르고, 서른이랑 마흔이랑 쉰에 되읽으면 새롭습니다. 어릴 적에는 어떻게 느꼈는지 돌아보면서 되읽습니다. 지난날 무엇을 놓쳤는지 짚고, 어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한결같이 바라보는 대목을 곱씹습니다.
속깊은 책이라면 두고두고 되읽습니다. 얕은 책이라면 몇 쪽 넘기지 않아도 벌써 줄거리가 다 보이고 허전합니다. “나라면 이런 줄거리를 이처럼 안 쓸 텐데.” 하고도 생각하고, “나라면 이 줄거리를 어떻게 살릴 수 있나?” 하고 살핍니다. 굳이 모든 사람이 책을 쓸 까닭이 없지만, “내가 책을 쓴다면 글결을 어떻게 북돋울 만한가?” 하고 톺아보면서 더 깊고 넓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아직 안 읽은 책을 장만합니다. 앞서 읽은 책을 되사더라도 오늘 손에 쥐는 책은 ‘새책’입니다. 새책집에서도 새책을 장만하고, 헌책집에서도 새책을 사들입니다. 모름지기 모든 책은 새책이면서 헌책입니다. 이미 읽었어도 두벌째 읽거나 닷벌째 읽을 적마다 새책입니다. 갓 나온 책이어도 우리 손길이 닿으니 헌책입니다. ‘헌-’이 붙는 ‘헌책·헌옷·헌집’을 묵거나 낡거나 오랜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우리 손길이 허허들판이나 허허바다처럼 드넓게 닿는다고 여길 수도 있어요.
부산 보수동 〈학문서점〉에서 ‘계몽사문고’를 한 꾸러미 품습니다. 이미 산 책도 있지만, 굳이 또 삽니다. 벌써 읽은 책이 있되, 애써 새로 집습니다. 아직 안 읽은 책도 있어요. 어릴 적에 동무네 집에서 슬쩍 구경한 책을 오늘 비로소 두 손으로 만지작거립니다.
사람도 책도 나이를 먹을 수 있어요. 사람도 책도 언제까지나 빛날 수 있어요. 삶이라는 길에서 사랑으로 이룰 길 하나만 바라보면, 어느새 다른 모든 것은 눈녹듯이 사라집니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사랑으로 마주보면, 어느덧 우리 둘레를 봄꽃처럼 맑게 달래면서 환하게 일으킵니다.
다릿심을 들여 걷는 사람이 마을을 읽습니다. 손품을 들여 찾는 사람이 책을 읽습니다. 우리 다리는 이웃을 만나러 떠나는 이음목입니다. 우리 손은 동무랑 어깨를 겯는 길목입니다.
둘레에서는 ‘그림(유튜브·영상·영화)’ 탓에 책을 덜 읽는다고 읊습니다만, 제가 보기로는 ‘쇳덩이(자가용)’를 끌어안느라 책을 안 읽지 싶습니다. 생각해 봐요. 손잡이를 쥔 손이란, 책을 쥘 틈이 없이 바쁘고 힘겹고 가난합니다.
ㅅㄴ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