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20 빈손 《무소유》 법정 지음 범우사 1976.4.15. 예전에 나온 낡은 판으로 《무소유》를 장만하던 날은 뛸 듯이 기뻤다. 나는 절에 다니지 않지만, 교회에도 나가지 않지만, 법정 스님 글이 그냥 좋았다. 스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 많이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짐이 늘어났다. 어쩌면 법정 스님은 아이를 안 낳고 안 돌보셨기 때문에 ‘빈손’이나 ‘빈몸’을 얘기했는지 모른다.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기저귀를 빨고 포대기에 이불도 빨래하는 살림에 ‘빈손’이나 ‘빈몸’이기는 어렵다. 아니, 말이 안 되겠지. 그러나 아기가 맨몸으로 풀밭에서 뒹굴며 자란다면 빈손이나 빈몸이어도 된다. 아기가 맨발에 맨손으로 풀꽃나무하고 동무하며 자란다면 얼마든지 빈손이나 빈몸일 만하리라. 예전에 어느 이웃은 큰집을 얻고서 비싼 접시에 오백만 원이 넘는 침대를 사더라. 집을 잘 꾸며야 한다고 하던데,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비싸면서 좋다는 것을 들여야 ‘살림’이지는 않으리라. 얼마 안 되더라도 길이나 멧골에서 꽃내음을 맡고, 이따금 꽃집에서 꽃 한 줌을 사서 집에 두면 넉넉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아이들하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19 꿈꾸는 씨앗 《씨앗의 희망》 헨리 데이빗 소로우 이한중 옮김 갈라파고스 2004.5.12. 이제 새책으로 안 파는 《씨앗의 희망》이다. 2020년에 헌책으로 만났는데, 책에 적힌 값보다 이천이백 원을 더 치렀다. 웃돈을 치르는 헌책이라면 틀림없이 사랑받는 책일 텐데 왜 새책으로는 더 안 팔릴까. 이 책을 찾는 사람들은 꽤 있지만 많지는 않아서 새로 찍기는 어렵다는 뜻일까. 우리는 값지거나 아름다운 책에 선뜻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는 뜻일까. 어느 날 갑자기 씨앗이 궁금했다. 숲에 갈 적마다 열매를 몇 알씩 줍는 버릇이 있는데, “그런데 이 씨앗이란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숲에서 갖고 온 열매는 박바가지에 차곡차곡 담았다. 솔방울·동백·꽈리·도토리·쥐똥나무·노박덩굴·가시 칠엽수·연꽃씨에 여러 나무씨이다. 씨앗은 크기도 빛깔도 다르다. 우람하게 자라는 나무여도 씨앗 한 톨은 매우 작기 일쑤이다. 솔방울은 종이보다 더 얇은 씨앗이 켜마다 티없이 붙었다. 하나를 떼어내려니 날개가 부서진다. 씨앗은 언젠가 흙에 닿으면 눈을 뜰 때를 기다렸다가 깨어날 테지. 뒷산에 열매가 익어간다. 어미 나무가 하나같이 아기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18 편지 《그대 타오르는 불꽃이여》 칼릴 지브란 글 김한 옮김 고려원 1979.2.20. 《그대 타오르는 불꽃이여》는 벌써 마흔 해가 넘어가는 빛바랜 책이다. 칼릴 지브란 님하고 메리 헤스켈 님이 주고받은 글을 묶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메리 헤스켈 님 이름이 지은이 이름으로 안 들어갔다. 세로쓰기인 묵은 책이고, 종이를 넘기려고 집으면 으스러진다. 불에 타다 만 종이 같고, 둘레가 나무빛깔처럼 짙다. 헌책집을 숱하게 들락거렸을는지 모른다. 내가 모아 놓은 글월을 떠올려 본다. 고등학교 때부터 큰아이를 낳아 기를 적에 쓴 글월을 그대로 두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때에는 좋아하는 동무한테 보내고, 크리스마스나 생일에 맞추어 서로 글월을 주고받았다. 묵은 책 못지않게 묵은 내 글월을 헤아리는데, 이 글월꾸러미 가운데 우리 짝하고 주고받은 글월이 있다. 내가 짝한테 보낼 적에는 공책에 먼저 써서 옮겨적었다. 까맣게 지우고 쓴 글월이 있고, 짝한테서 받은 글월이 다섯 자락이고, 꽃다발에 넣어 준 엽서가 둘 있다. “표현을 못하는 것이 안타깝소 … 나의 앞으로도 변함없는 사랑 보내오!!! 여보!!!” 예전에 받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17 어떤 일을 하나요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 피터 볼레벤 글 강영옥 옮김 더숲 2018.04.10.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를 지지난봄에 샀다. 이 책을 사던 날 책시렁 이곳저곳을 기웃하는데, 나이든 어느 분이 옆에서 ‘글쓰기를 잘 하고 싶다면 이바지할 책’이 있다면서 여러 가지를 얘기하셨다. 그런가 보다 하고 이분이 알려주는 책을 집어서 펼치는데, “어떤 일을 하나요?” 하고 묻고, “일하는 곳이 이곳만 해요?” 하고도 물어보았다.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우리 일터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선뜻 밝히지 못 했다. 처음 보는 어르신이 물어보았기 때문이기보다는, 내가 하는 일이 어설프고 부끄럽다고 여기는 마음이었다.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는 사람이 함부로 숲(자연)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들려준다. 숲이라는 그물은 빈틈이 없이 짜인 터전이기에, 사람이 멋모르고 건드리면서 작은 목숨붙이 하나라도 사라지면,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도 흔들리고 무너진다고 들려준다. 늑대가 사라질 적에 사슴이 불어나면서 들숲이 어떻게 바뀌는지 들려주고, 이러면서 비버가 살아갈 터전이 흔들리면 또 잇달아 다른 터전이 어떻게 흔들리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16 집안이라는 이름 《혼불 1》 최명희 글 한길사 1996.12.5. 《혼불 1》을 처음 장만해서 읽던 2019년 3월 26일을 돌아본다. 이날은 가게일꾼이 달삯을 미리 당겨서 달라고 했다.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슬쩍 물으니 은행에 빌린 돈을 갚는다고 했다. 결혼한 딸이 어디로 사라지고 은행 금리가 11% 되는 빚을 갚는다고 했다. 가게일꾼은 아저씨한테 늘 두들겨맞다가 집을 뛰쳐나온 지 열 해째란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데 딸은 어쩌다가 돈수렁이 얽혔더라. 퇴직금이라는 돈에 목숨을 걸은 듯싶다. 이날 나는 오그랑이도 사그랑이도 새줄랑이도 아니지만, 뿔난 마음을 감춘 채 일하는 모습을 봤다. 내가 오기를 하마하마 기다린 날 참 슬프게 보였는데 일이 커졌다. 이 삶을 어떻게든 앞당기거나 미리 갚을 수 있을까? 이 삶에 매듭삯(퇴직금)은 무엇으로 받을까. 근심에 걱정에 휩싸이면서 펼친 《혼불》은 어떤 삶을 들려주는가. 집안하고 집안이 억지로 맞추는 길은 꽃길일 수 없겠지. 꽃 같은 두 사람이 만나서 꽃 같은 집안을 가꾸어 나갈 삶길이어야 아름다울 텐데, 처음부터 꽃짝이 아닌 ‘집안이라는 이름·돈·힘’을 지키려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15 초원의 집 《초원의 집-첫 번째 이야기》 로라 잉걸스 와일더 글 김석희 옮김 비룡소 2005.09.25. 백 해쯤 앞서 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 나도 어느새 나이가 들었기에, 내가 경북 의성 멧골에서 보낸 어린 나날을 돌아보면 ‘쉰 해가 지난’ 일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고 손가락을 꼽다가 ‘백 해가 훌쩍 지난 미국 어느 들판 이야기’가 그리 멀지않은, 어쩌면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는 조촐한 살림살이일 수 있겠다고 느낀다. 쉰 해쯤 앞서 멧골집 어린이는 멧자락을 타고 넘으면서 배움터를 다녔다. 멧골에서 사니까 늘 멧자락을 탈밖에 없었겠지만, 자동차나 버스를 타고서 집이랑 배움터를 오간다는 생각부터 없었다. 다들 걸었다. 누구나 걸었다. 어린이라면 걷다가 달리고, 뛰고, 놀고, 웃고, 노래했다. 이제 나는 대구에서 살며 자동차를 몬다. 자동차를 몰면서 대구 시내를 지나다 보면, 길에서 걸어다니는 어린이를 보기 어렵다. 나도 우리 아이를 자동차에 태워서 배움터를 보냈다. 다들 아이들을 자동차에 태워서 오간다. 요즈음은 아이들끼리 걷고, 뛰고, 달리고, 놀고, 웃고, 노래할 틈이 없다고 할 만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14 살아가는 집 《세계문화예술기행 3 스페인, 들끓는 사랑》 김혜순 학고재 1996.11.1. 《세계문화예술기행 3 스페인, 들끓는 사랑》을 처음 장만한 2018년 12월 겨울을 떠올린다. 그무렵 작은딸은 필리핀 세부로 동무하고 나들이를 갔다. 작은딸은 필리핀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다 큰딸하고 대만으로 나들이를 간다고 했다. 두 딸이 나누는 말을 들으면서, 두 딸이 함께 다닐 나들이를 헤아리면서, 나도 둘 사이에 섞여 같이 나들이를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두 딸은 저희끼리 나들이를 떠났다. 나는 대구에 남아 가게일을 보았다.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책을 읽으면서 달랬다. 그런데 《세계문화예술기행 3》을 쓴 분은 딸하고 스페인 나들이를 했구나. 글쓴이는 “예술가는 폼잡는 엄숙주의가 말할 수 없이 싫었다” 하고 밝히면서, 세르반테스에 여러 스페인 글님 이야기와 삶을 곁들여서 줄거리를 풀어낸다. 글을 쓰는 사람은 왜 머나먼 곳으로 나들이를 가는가? 뭔가 남기고 싶은 하루를 글로 쓰는가? 어느 삶자락을 잃거나 잊지 않으려고, 어느 날 품은 꿈이 날아가지 않도록 글로 붙잡는가? 《세계문화예술기행 3》을 쓴 분은 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13 바람 바다 숲 《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옮김 문학사상 1998.8.8. 2019년 1월에 《총, 균, 쇠》라는 책을 장만했다. 어느새 다섯 해가 지나는데, 그때에는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둘레에서 좋다고 말하는 책이면 덥석덥석 장만부터 했다. 나한테 맞는 글이 무엇인지 느긋이 살피지 않았고, 내가 글쓰기 첫걸음을 떼기에 어울리는 책을 천천히 헤아리지 않던 즈음이다. 창피한 소리인데, 누가 좋다고 하는 말을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무턱대고 사서 쌓아두었다. 집에 좋은 책을 잔뜩 갖추면 좋은 글도 척척 나오는 줄 여겼다. 2019년에는 이 두꺼운 책을 읽으며 무엇을 느끼고 배웠을까? 2023년 8월에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 보는데, 줄거리도 이야기도 도무지 안 떠오른다. 낯선 책을 처음 읽는 듯하다. 예전에 읽고서 귀퉁이를 접은 데를 들여다보아도, 띠종이를 붙인 대목을 다시 펴 보아도, 어쩐지 썩 와닿지 않는다. 다섯 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래, 다섯 해 사이에 두 딸이 제금을 나서 짝을 만났고, 막내가 군대를 다녀왔고, 막내가 군대에 있던 무렵 코로나가 번져 면회조차 갈 수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12 모이터 《토리빵 1》 토리노 난코 글 이혁진 옮김 AK 커뮤니케이션즈 2011.1.30. 《토리빵》을 세 해 앞서 여름이던 이맘때 장만했다. 책을 산 지 닷새 뒤에 하얀 새우리를 샀다. 어느 날 내가 누운 창가에 참새가 날아왔다. 누운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틀에 앉은 참새는 내가 안쪽에서 저를 보는 줄을 모르더라. 살금살금 일어난다. 들키지 않으려고 천천히 움직인다. 가리개를 살포시 들고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하다가 참새하고 눈이 맞았다. 여태 잘 놀던 참새가 깜짝 놀라서 포르르 날아갔다. 겨울이면 굴뚝 아닌 굴뚝, 보일러 연통에 비둘기 한 짝이 가끔 내려앉았다가 날아간다. 어쩌면 알아볼까 싶어, 에어컨 실외기에다가 물그릇을 두고 질그릇에 사과하고 감자를 담아 보았다. 새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렇게 한 달을 기다리니 드디어 새가 물을 먹으러 왔다. 대단히 기뻤다. 우리 집으로 목을 축이려고 새가 찾아오고서 여섯 달째부터는 빵을 잘게 뜯어서 날마다 두었다. 가끔 멸치하고 베이컨도 담았다. 바나나나 사과는 잘 먹지 않더라. 까치가 모이터를 짓밟아 지저분하기에 비닐을 깔았더니 바람에 휙 날아간다. 바람에 날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11 거꾸로 《거꾸로 사는 재미》 이오덕 글 산처럼 2005.2.20. 이오덕 님이 멧골학교에 깃들어 아이들을 가르치던 곳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데하고 가깝다. 어릴 적에 나는 멧골짝에서 놀고 뛰고 학교를 다녔고, 집안일을 하고 심부름을 다녔다. 멧골짝에는 나무도 흙도 숲도 늘 곁에 있다. 아침에 일어나도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도 언제나 나무에 흙에 숲을 본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노상 마주하는 나무랑 흙이랑 숲이다. 이오덕 님이 처음 《거꾸로 사는 재미》를 쓰던 무렵에, 나로서는 국민학교란 데를 한창 다녔다. 2005년에 새롭게 나온 책이지만 참 아득하다 싶은 예전 이야기와 예전 눈길을 들려준다. 1970∼80년대 시골은 오늘날 시골하고 아주 다르다. 뭐, 시골뿐 아니라 도시도 예전하고 오늘은 아주 다르지. 대구만 해도 1970∼80년대하고 2020년대는 아주 딴판이라고 할 만하다. 딸아이가 사는 서울이란 곳도 예전하고 오늘은 확 다르리라.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자기 보물을 옳게 가질 줄 모르는 민족이 불행하다. 말은 그 민족의 피”라고 들려주는 대목을 곱씹는다. 어린이를 높이 여기면서 슬기롭게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