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41] 보리 보리가 누렇게 익어간다. 마을을 벗어나 재를 넘으면 산비탈에 보리밭이 있었다. 새싹이 한 뼘쯤 올라오면 학교 오가는 길에 보리를 밟았다. 밟으면 보리에 좋다고 해서 좋아라고 밟는다. 우리가 뭉개듯 밟아도 참말로 자랄까 궁금했다. 우리가 밟은 보리가 무릎까지 자랐다. 학교 오가는 길에 뒤가 마려우면 하나둘 보리밭에 이랑에 들어갔다. 보리밭이 길가에 있어 아이들이 지나가면 몸을 숨기고 뒷일을 봤다. 우리 집은 땅이 얼마 없어서 보리를 얼마 뿌리지 못했다. 보리를 밟으면 좋다고 하면서도 우리 보리를 밟지 않고 어머니도 남일이 바빠 보리를 밟지 않았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마늘 캘 무렵이면 보리를 벤다. 어머니는 도리깨질로 두들기며 털고 꼰 새끼줄에 동여매서 털기도 했다. 우리 집은 쌀보리를 하지 않고 굵고 거친 겉보리를 먹었다. 보리가 야물어서 물에 불린 뒤 삶는다. 삶은 보리쌀을 건져 놓고 밥을 할 적마다 밑에 깔고 쌀을 한 줌씩 얹어 가마솥에 밥을 짓는다. 벼는 오월에 심어 가을에 거두는데 보리는 가을에 심어 유월에 거두네. 마늘은 비닐이라도 덮는데 보리는 추운 땅에서 겨울을 나자면 뿌리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40] 잔대 우리 마을 멧골이 잔디밭이다. 마을로 잇는 여러 등성이 골골에 마을사람이 다녔다. 풀이 자라고 잔디를 소한테 먹이고 낫으로 베어서 땔감을 했다. 멧골에 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잔디가 살고 우리는 소 먹이러 가서 잔디밭에서 뛰어놀았다. 잔디 가까이 잔디보다 잎이 넓은 풀이 자랐다. 노란꽃을 피우는 잔대가 있는데, 우리는 ‘짠대’라 한다. 쪼그리고 앉아 잔대를 캔다. 호미를 안 갖고 간 날에는 손으로 흙을 팠다. 뿌리에 붙은 모래흙이 잘 털렸다. 뿌리가 까맣다. 깎거나 훑어낸 뒤 잘근잘근 씹어먹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가끔 잔대를 캐서 먹지만 일하느라 캐고 먹을 틈이 없다. 잔대는 소 먹이러 가면 누리는 우리 새참이다. 배불리 먹지는 못해도 몇 뿌리 캐서 씹으면 씹을수록 뿌리맛이 달콤하다. 내 혀는 어린 날 먹은 잔대를 떠올릴지 모른다. 이제 잔디가 사라졌다. 민둥산에 더는 나무를 베지 않아 나무가 자라고 햇볕을 쬐지 못한 잔디가 많이 사라졌다. 산등성이 모두가 잔디밭이었으나, 이제는 무덤에서나 본다. 내가 들녘을 좋아하는 까닭이 어쩌면 우리 마을 온 등성이를 잔뜩 덮은 잔디밭에서 뒹굴며 놀아서인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06] 질그릇 우리 어머니는 장터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가 시장에서 질그릇(옹기) 장사를 했다. 우리 마을에서 재를 하나 넘어 서너 마을에 있는 저잣판이다. 질그릇은 전쟁이 일어나자 더 잘 팔렸다. 물이며 된장이며 똥물이며 담는 그릇이 모두 질그릇이다. 전쟁으로 살림을 다 짜들었기에 질그릇만큼은 바로 써야 하기에 불티났다. 외할아버지가 총각 때 삼촌 밑에서 크며 질그릇 솜씨를 배웠다. 그때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외할머니를 만났다. 외할머니는 데리고 온 아이가 있어 외할아버지와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를 새 장가를 보냈다. 두 여자가 한집에 사니 살림이 시끄럽고 장사도 잘 안 풀렸다. 질그릇을 잘못 구워 하얗게 되어 깨뜨리기를 거듭하자 외할아버지는 노름에도 손을 대고 천천히 무너졌다. 맏딸인 우리 어머니가 공장에서 일하고 설 쇠러 왔다가 외할아버지가 시집을 보냈다. 어머니 입 하나 덜어 보려고 아무데나 짝을 맺어주었다. 질그릇을 파는 집 딸이면서도 우리 집에는 단지가 몇 없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엉망이 된 삶이 떠오를까 질그릇을 장만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집이 기울어 질그릇을 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39] 깨꽃 장골에 사는 숙이네를 지나 등성이 따라 올라가면 감나무가 있는 깨밭이 있었다. 깨가 한창 자라 꽃을 피우고 마디마다 깨집이 열릴 적에 손가락 굵기인 푸른 깨벌레가 꼬물꼬물 참깨잎을 갉아먹었다. 열두세 살 적에 동무들과 깨밭에 모였다. 두 손 모으고 눈을 감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기도했다. 교회에 나가니 밥을 먹을 적에도 어디에 가면 기도 먼저 하라고 배웠다. 어머니 몰래 교회를 나갔다. 어머니는 교회 다니는 사람을 예수쟁이라 부르며 싫어했다. 나는 교회에 나가고 싶은데 어머니는 말린다. 집에서는 기도하지 않고 동무하고 놀 적에만 기도했다. 밭에서 모여 기도하는데 서로 입맞춤이라도 한 듯이 “하느님 고맙습니다.” 같은 말만 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기도를 마치고 갖고 온 공책을 펼쳤다. 나는 동무들 앞에서 새 공책 첫 쪽에 빽빽하게 적은 글을 읽었다. 기도할 적처럼 돌아가면서 읽었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쓴 글은 소설인지 모른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길게 썼다. 학교에서 나온 책 말고는 책 한 자락 읽지 않은 어린 날이다. 책은 우리한테 너무 멀리 있었다. 얼마나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38] 왕고들빼기 깊은 산에서 왕고들빼기를 만난다. 무릎까지 자랐다. 잎이 넓고 찢은 듯 자라서 축 늘어지고 크다. 둘레에 자라는 풀은 어린 날 우리 소가 잘 먹은 풀이고 왕고들빼기도 군데군데 자라는데 토끼가 잘 먹었다. 커다란 바위 앞이라 큰 나무가 없고 풀이 고만고만하게 자라 풀밭을 이룬다. 소먹이로 베어 오는 꼴에는 왕고들빼기가 섞였다. 나는 몇 골라내기도 하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논둑이나 길가에서 한 줌 뜯어 토끼를 보러갔다. 토끼는 샘터 앞집에서 키운다. 대문이 없고 오른 담벼락에 나무로 지은 이삼층 토끼집이 있었다. 풀을 넣어 주고 칸막이를 내려 잠그고 토끼가 풀을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하얀 토끼 까만 토끼가 입을 오물거리며 풀을 뜯어먹는 입이 귀여웠다. 쫑긋하는 긴 귀도 깜찍하다. 가끔 문을 열고 토끼 귀를 잡아 들어 보았다. 아버지가 겨울에 잡아 온 굳은 토끼는 본 적은 있어도 살아 움직이는 토끼를 쓰다듬으면 털이 곱고 따뜻하고 말랑했다. 만지고 놀고 바라보느라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서서 노느라 해 떨어지는 줄도 모른다. 집에 가면 어머니 아버지는 들일을 나가고 우리는 소꼴은커녕 앞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37 채송화 채송화 세 뿌리를 얻었다. 줄기가 부러져도 뿌리가 남아서 곱게 옮겨심는다. 이 아이가 살아날까 싶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몸을 곧추세운다. 어린 날 채송화는 코스모스가 올라올 적에 길가에 흔하게 피었다. 열두 살 적에 배움터에서 마을마다 꽃밭 가꾸기를 시켰다. 우리 마을에는 꽃밭을 꾸밀 터가 없어 마을 어귀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오는 비탈진 골에 꽃밭을 꾸미기로 했다. 육학년 언니오빠가 풀을 베고 호미로 풀을 매고 조그맣게 꽃밭을 꾸몄다. 일요일마다 마을지기가 노래를 틀었다. 어른은 마을을 쓸고 치운다면, 아이는 꽃삽을 갖고서 꽃밭을 가꾸었다. 어른은 한 집에 한 사람은 꼭 나와 마을을 치워야 하고, 안 나오면 돈을 물렸다. 봉숭아 분꽃 접시꽃을 심었던가. 배움터에서는 마을을 자전거로 돌아보면서 꽃밭을 살핀다고 했다. 비가 오면 개울에 물이 불어 꽃밭에 가지 못한다. 꽃을 심어 놓은 자리로 둘레 나무하고 풀이 뻗고, 몇 날쯤 꽃밭을 돌본다고 해도 아이들은 으레 시들하기 마련, 꽃밭이 풀밭이 되었다. 해가 들지 않는 자리라 꽃이 자라기 힘들다. 채송화는 마을에서 흔하게 보았다. 우리 집 마당에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36] 쪽제비싸리나무 아까시나무하고 많이 닮아 헷갈리는 나무이다. 아까시나무는 빳빳하고 하얀꽃이 송사리로 피어 축 처진다. 쪽제비싸리나무는 가시가 없다. 대가 억센 풀 같고 꽃이 하늘로 곧게 자라고 줄기만큼 길쭉하다. 아까시나무와 같이 가위바위보 하면서 손가락으로 잎사귀 따먹기하고 가지를 머리에 감아 볶으며 놀았다. 우리는 쪽제비싸리나무를 꺾어 손톱에 발랐다. 내 손톱은 넓적하고 끝이 잘 부러진다. 어릴 적에는 손톱깎이가 없어 칼이나 이로 물어뜯으며 깎았다. 손톱 밑살이 드러나면 아프다. 손톱 둘레에 까시래기가 일어나 따끔하다. 손톱 뿌리에 하얀 반달을 덮은 살을 칼이나 연필로 밀어넣고 칼로 자르다가 피도 나고 까시래기가 더 일어났다. 어른들은 손톱에 까시래기가 일어나면 미움받는다는 말을 했다. 가지를 꺾어 나무물을 손톱에 바르면 반짝거리고 손톱이 힘이 있어 덜 부러지고 손톱이 오목하다. 손톱 빛깔이 맑게 그대로 보인다. 내 손톱은 빠졌다가 다시 나기도 하고, 부채꼴로 퍼지기도 했지만 마알간 빛이 돌아 내 눈에는 고왔다. 어린 날에는 손톱에 덧발라도 답답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 손톱에 뭘 바르면 손톱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05] 멍석 산에 멍석 넷이 돌돌 말려 우두커니 있다. 계단 끝에서 숲 쪽으로 멍석을 펴려는 듯하다. 그쪽 길이 질다 싶더니 깐다. 짚이 흙빛하고 비슷해서 티가 나지 않고 이젠 진흙을 안 밟을 듯하다. 어린 날에 알곡이 많이 나는 통일벼를 심은 뒤로 쌀밥을 먹는다. 짚으로 땔감을 하고 삼태기를 짜서 소죽 끓일 적에 담아 옮긴다. 할아버지는 짚으로 짠 삼태기가 무거워 소죽 끓일 적에는 들지 못하시니, 내가 거든다. 멍석은 새끼를 여러 가닥으로 꼬고 틈을 두고 줄을 한 가닥씩 위로 아래로 지나면서 엮는다. 멍석은 여름에 마당에 펼쳐 놓고 나락을 널거나 지게에 지고 밭에서 낟알을 털 적에도 깐다. 뻣뻣한 멍석에 널어 둔 벼를 거둘 적에는 쇠바가지로 톡톡 치면서 틈에 낀 알곡을 털어낸다. 집안에 큰일을 치를 적에 앉아 밥을 먹거나 신발을 벗고 들어가 누워 잠도 잤다. 설이나 한가위에는 윷도 던진다. 안 쓸 적에는 돌돌 말아 마굿간에 얹거나 장대에 올린다. 천막이 들어온 뒤로 낟알은 가볍고 질기면서 매끈한 천막을 깔아서 턴다. 마루가 들어온 뒤로 멍석은 멀어진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 대문 앞에 두고 멍석으로 덮었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04] 두부 어릴 적에 어머니는 겨울이면 두부를 쑤었다. 우리 논밭이 없을 때라 콩을 사서 하룻밤 물에 매 불렸다. 콩이 잘 불어야 두부가 늘어난다. 고무대야에 챗다리를 걸치고 무거운 맷돌을 올린다. 어머니가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맷돌을 힘껏 돌리면 나는 곁에서 불린 콩을 한 숟가락씩 떠넣는다. 콩이 다 내려가면 또 한 숟가락 붓는다. 맷돌 가운데 구멍에 물과 섞여 들어간 콩이 두 맷돌이 돌아가는 틈에 갈려 하얀 물이 여기저기 흘러내린다. 챗다리 밑에 둔 대야에 떨어진다. 콩을 다 갈면 가마솥에 붓고 불을 지핀다. 끓으면 광목 자루에 퍼담아 챗다리에 얹고 나무판을 꾹 누르면서 물을 짠다. 물만 따로 모아 간수를 넣으면 허옇게 굳으면서 두부가 된다. 천에 싸서 뚜껑을 덮고 무거운 돌을 얹어 두었다가 칼로 자른다. 물을 짜낸 찌꺼기를 비지를 해서 먹고 소도 준다. 소죽 끓일 적마다 한 바가지씩 넣는다. 티브이가 없어 마을 어른들이 도가에 모여 화투를 치고 두부내기를 한다. 어머니가 쑨 두부를 마을에서 팔고 이웃마을에 내다 판다. 어머니는 두부를 머리에 이고 거친 흙길을 걸어서 아랫마을 신리 도가와 재 너머 윗마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35] 노간주나무 소나무 곁에 노간주나무가 가지를 펼쳤다. 나무가 가늘고 잎도 여리다. 나무가 곧고 굵다. 아버지는 이 나무를 잘라 도끼 손잡이로 끼우고 소코뚜레를 삼았다. 껍질을 벗기고 아궁이 불을 쬐며 나무를 구부려 코뚜레 꼴을 잡았다. 하루는 소가 새끼를 낳는다. 마당에 모아 둔 거름을 둔 자리에 아버지가 볏짚을 깔아 준다. 나는 소 옆에서 구경하는데 어머니가 보지 못하게 했다. 방에 들어가 문을 빼꼼히 열고 구경했다. 소 앞발을 보았다. 소는 아프다고 소리도 지르지 않는다. 소가 숨을 고르고 힘을 주자 새끼가 뚝 떨어졌다. 어미는 새끼 몸을 혀로 햝고 새끼는 이내 일어서려고 비틀거린다. 온몸을 다 닦으면 새끼가 일어나서 어미 젖을 먹는다. 새끼 소는 어리지만 크다. 어린 송아지가 조금 자라 코를 뚫을 때가 되었다. 미리 꼴을 잡아 묶어둔 코뚜레를 코에 끼우려고 송아지를 잡고 애쓴다. 나무는 송아지와 지내고 싶었을까. 곧게 자라면서 부드럽게 구부러지기에 여러 곳에 썼겠지. 바람이 그렇게 노간주나무를 키웠을지도 몰라. 노간주나무는 소하고 동무가 되는 나무. 노간주나무는 도끼이며 여러 연장을 든든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