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82 글쓰기 길잡이 《우리말꽃》 최종규 곳간 2024.1.31. 《우리말꽃》을 펼친다. 겉 종이에 '꽃' 글씨 하나가 꽉 찼다. 눈에 확 띄게 썼을까. 궁금해서 얼른 여는꽃을 읽는다. 글쓴이는 책이름처럼 ‘여는말’이 아닌 ‘여는꽃’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었다. 이 ‘여는꽃’을 읽으니, 글쓴이가 걸어온 길이 죽 흐른다. 어릴 적에 인천 바닷가에서 놀며 들은 말에,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을 추스르면서 이웃에서 만난 연변사람 말씨를 들은 하루에, 이제 전남 고흥 시골로 옮겨서 새·풀꽃나무·비바람·흙·별을 동무하는 삶을 말빛 하나로 옮긴다고 한다. 여는꽃 다음으로 닫는꽃도 읽어 본다. ‘여는꽃’이 여는말이듯, ‘닫는꽃’은 닫는말이다. 무슨 책을 맨앞과 맨뒤부터 읽느냐고 할 수 있지만, 열고 닫는 말이 글쓴이 마음을 스스로 간추려서 들려준다고 여겨서 둘을 먼저 읽어 버릇한다. 《우리말꽃》을 쓴 사람은 ‘국어학’이라는 일본말을 쓰기보다는, 우리가 우리 마음을 우리 말글로 담을 적에 스스로 꽃처럼 피어나리라 여겨 ‘우리말꽃’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나 같아도 ‘국어학’이라고 하면 너무 어렵겠다. 우리말꽃, 여는꽃, 닫는꽃,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81 떠난 사람을 헤아리기 《애도일기》 롤랑 바르트 김진영 옮김 걷는나무 2012.12.10. 나는 어릴 적에는 걸핏하면 울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도, 사흘 뒤에 무덤에 들어갈 때도, 나는 엄마처럼 오빠처럼 소리내어 울지도 않았다. 마음은 슬프나 눈물이 맺히기만 했다. 아파서 누운 아버지를 보니 차라리 잘 가신다고 생각했다. 세 해 동안 아버지 생각이 날마다 났다. 《애도일기》를 여섯 달 앞서 장만해서 다시 펼친다. 글쓴이는 어머니 죽음을 슬퍼한다. 글쓴이는 슬퍼하는 날이 열여덟 달을 넘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잊는데는 빨라도 한 해가 넘고, 어떤 사이냐에 따라 슬픈 너비가 다르다. 가장 큰 슬픔이 아마도 어버이를 잃거나 짝을 잃은 슬픔이 아닐까. 흔들리는 빈자리는 어버이보다 아이를 낳고 보금자리를 이룬 사람이 아닐까. 나쁜 사이로 지냈다면 시원할 테지만 살갑게 지낸 사이라면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리라. 짝꿍은 짝인 나보다 어버이가 먼저이다. 어제저녁에는 살짝 서운했다. 가게를 언제 넘길지도 몰라 힘이 빠지다가도 시골 친척 땅에서 ‘자연인’처럼 사는 꿈에 부풀었다. 창이 큰 농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80 고비 《아침의 피아노》 김진영 한겨레출판 2018.10.5. 《아침의 피아노》를 여섯 달 앞서 처음 읽을 적에는 깜짝 놀랐다. 글쓴이는 롤랑 바르트가 쓴 《애도일기》를 옮겼는데 두 책이 비슷한 글감이다. 《애도일기》는 옮긴 말씨가 썩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의 피아노》는 좀 다르다. 죽은 어머니를 슬퍼하는 옮김책은 슬프고 슬프다는 말만 헛되이 맴도는 알맹이 없는 멧울림으로 읽었다면, 《아침의 피아노》는 글쓴이가 죽기 사흘 앞서까지 적은 글이다. 이제 몸을 내려놓고서 떠난 글쓴이는 ‘물가에 앉았다. … 생이 음악이라는 것도 알겠다’ 하고 적는다. 어쩐지 이 말에 뭉클했다. 삶이 노래라는 말이 왜 내 마음에 와닿았을까 하고 돌아본다. 노래는 즐거운 노래도 있지만, 슬프거나 아픈 노래도 있다. 활짝 웃고 춤추는 노래고 있지만, 눈물에 젖으면서 처지는 노래도 있다. 요즘 우리 집은 웃음노래가 아닌 눈물노래를 닮았다. 아니, 요 몇 달은 눈물노래를 잇는다. 열한 해를 이어온 가겟일을 접는 마지막판인데, 일도 더 많고, 마음을 쓸 곳도 너무 많고, 지치고 힘든 일은 그야말로 넘친다. 우리 엄마가 언젠가 한 말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9 어린나무는 《나무를 심는 사람》 장 지오노 마이클 매커디 판화 김경은 옮김 두레 1995.7.1. 되살림쓰레기를 내놓다가, 헌책을 묶은 꾸러미에 있는 《나무를 심는 사람》을 보았다. 아직 읽어 보지 않은 책이다. 책은 멀쩡하다. 고맙게 건사해서 읽어 보았다. 어느 날 어느 사람이 나무 한 그루를 심고는 오랜 나날을 돌보고 아낀다. 긴긴 나날이 흐른 끝에 푸르게 우거진 숲을 이룬다. 작은 책에 담긴 작은 줄거리는 투박하다. 그러나 숲을 이루기까지 흐른 나날은 짧지 않으리라. 메마르고 거친 벌판에 나무를 심으려는 마음이 먼저 있고, 이 나무를 돌보려는 마음이 차츰 자라고, 어느새 잎그늘이 퍼지면서 풀도 돋고 풀꽃도 피어날 수 있다. 내가 일하는 가게 곁에 그늘진 모퉁이가 있다. 이곳에 어느 날 단풍 새싹이 올랐더라. 추운 날씨에 그늘진 모퉁이 단풍 새싹은 잘 견딜 수 있을까. 어린 나무싹이 걱정스러워서 따뜻하고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겨 주었는데, 오히려 시들시들하다가 죽었다. 싹나무는 내 걱정과 달리 겨울 추위를 잘 견디었을는지 모른다. 겨울에 추위를 견디는 힘으로 뿌리도 줄기도 곧게 뻗었으리라. 《나무를…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책숲마실 길, 메, 내 ― 구례 〈봉서리책방〉 00시에 하루를 엽니다. 05시 30분에 택시를 불러 고흥읍으로 갑니다. 06시 20분 첫 시외버스로 여수로 건너가고, 09시부터 여수 어린배움터에서 글읽눈(문해력)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겉으로 적힌 글씨만 훑을 적에는 ‘읽기 아닌 훑기’입니다. 둘레에서는 그냥 일본말 ‘문해력’을 쓰지만,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글읽기’를 얘기해야 생각을 나눌 만하다고 느낍니다. 북중미 텃사람을 끔찍하게 죽이면서 땅을 빼앗은 이들은 ‘북중미 텃사람 말’을 배우려 하지 않았고,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숱한 글바치(작가·교사·기자)는 어린이 말을 배우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으면서, 쳇바퀴에 갇힌 일본 한자말에 옮김말씨를 외우라고 닦달하는 얼거리입니다. 처음부터 어린이하고 푸름이 모두 못 알아들을 얄궂은 말을 쓰면서, 이 얄궂은 말을 억지로 외우라고 내모는 틀이 ‘문해력 교육’인 셈입니다. 순천을 거쳐 구례로 건너갑니다. 다시 택시를 탑니다. 택시 일꾼은 책집 앞까지 모시겠다고 자꾸 말씀하지만, 저는 책집을 둘러싼 마을을 걸을 마음이기에 “내려서 걸어갈 생각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책숲마실 ― 전남 순천 〈도그책방〉 새로 여민 책을 들고서 순천마실을 갑니다. 어릴 적부터 ‘책숲마실’을 해왔고, 이 삶을 고스란히 《책숲마실》이라는 이름으로 담았습니다. 책을 사고파는 곳도 숲이고, 책을 빌려서 읽는 데도 숲입니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다면, 마음에 안 드는 책이 있을 텐데, 뭇책이 어우러지기에 책숲입니다. 사람은 숲을 품고서 살아가기에 사람답습니다. 숲을 품지 않고서 살아간다면 사람빛을 잊다가 잃습니다. 몸짓에 마음이 드러나고, 말씨에 마음이 나타납니다. 글줄에 마음이 퍼지고, 눈망울에 마음이 흘러요. 책이 태어나려면 먼저 삶을 일굴 노릇입니다. 스스로 그려서 일구는 삶이 있기에, 이 삶을 누리는 하루를 마음에 담습니다. 삶을 마음에 담으니 날마다 천천히 가꾸고 돌봐요. 가만히 자라나는 마음에서 말이 피어납니다. 삶이 있기에 마음에서 말이 샘솟고, 삶이 없으면 마음에서 아무런 말이 안 나옵니다. 고흥 시골집부터 순천책집을 오가는 길은 서울 오가는 길 못지않게 품과 돈이 듭니다. 시골에서 살며 이 대목을 또렷이 느낍니다. 서울에서야 인천이나 연천이나 남양주나 안산쯤 가볍게 오갈 만하고, 천안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8 나비물 《아나스타시아 1》 볼라지미르 메그레 한병석 옮김 한글샘 2021.1.25. 《아나스타시아 1》를 읽는다. 열 자락 가운데 둘째와 여섯째를 먼저 읽었다. 이제 첫째를 읽어 본다. 《아나스타시아》는 우리가 잃어버린 길과 마음을 짚는다. 첫째, 우리는 꿈을 잃었고, 꿈을 잃었기에 숲을 잊어버리는데, 숲을 너무 오래 잊은 채 등지다 보니 숲을 나란히 잃었다. 둘째, 우리는 사랑을 잃었고, 사랑을 잃었기에, 입으로는 사랑타령을 하고 몸을 섞지만, 정작 사랑이 아닌 사랑 흉내에 그치는 탓에, 아이들이 사랑을 받아서 태어나지 못 한다. 이 책은 아주 쉬운 이야기를 부드럽게 들려준다. 얼핏 나무라는 듯 보이지만, 곰곰이 새기고 보면 나긋나긋하게 달래면서 알려주는 길잡이 같다. 이 길잡이란, 옛날부터 모든 엄마아빠가 해온 일이겠지. 사랑으로 집을 짓고, 사랑으로 밥을 짓고, 사랑으로 옷을 지어, 사랑으로 한 집안을 이룬다.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고, 어른들은 기쁘게 일한다. 이런 곳은 언제나 숲 한복판이거나 곁이었다. 손수 집과 밥과 옷을 짓는 터전은 내내 숲이었다. 사랑으로 짓고 돌볼 적에는 아플 일이 없다. 사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7 삶터 《생쥐와 고래》 윌리엄 스타이그 이상경 옮김 다산기획 1994.9.10. 며칠 앞서 《생쥐와 고래》를 장만했다. 아들이 어릴 적에는 무릎에 앉혀 놓고 그림책을 날마다 읽어 주었는데, 벌써 스무 해가 지난 일이다. 이제는 그림책을 들어줄 아이도 없지만 사서 읽는다. 짝한테 읽어 주고 나도 읽을 마음인데, 마음처럼 쉽지 않다. 《생쥐와 고래》를 보면, 처음에 생쥐 혼자 나온다. 뭍은 생쥐한테 이미 드넓은 터전일 테지만, 훨씬 드넓을 바다를 누비고 싶다는 꿈으로 손수 배를 뭇는다. 배를 뭇는 동안 틈틈이 여러 살림을 장만한다. 배를 타고서 너른바다를 얼마나 오래 누빌는지 모르니, 먹을거리에 여러 살림을 넉넉히 챙긴다. 드디어 배를 다 무은 어느 날, 생쥐는 혼자서 길을 나선다. 배도 혼자 무었고, 살림도 혼자 장만했다. 바다마실도 혼자 나선다. 낮바다를 누리고, 밤바다를 지켜본다. 별이 쏟아지는 밤바다에 고즈넉이 누워서 별바라기를 하다가 잠들기도 한다. 이러던 생쥐는 그만 뱃전에서 미끄러진다. 바다에 풍덩 빠진 생쥐는 아차 싶으나, 배는 생쥐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끝도 없을 바다에 홀로 둥둥 뜬 생쥐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076 집이라는 곳 《초원의 집 2 대초원의 작은집》 로라 잉걸스 와일더 글 가스 윌리엄스 그림 김석희 옮김 비룡소 2005.9.25. 《초원의 집 2》을 읽는다. 미시시피강이 꽁꽁 얼 적에 건너려고 추운 겨울에 집을 옮기는 이야기가 흐른다. 마차에 살림을 싣고서 간다. 마차에서 자고 풀밭에 옷을 말린다. 마차는 움직이는 집이다. 드디어 맞춤한 곳을 찾아내고서는, 너른들에 집을 작게 짓는다. 통나무를 베어 하나씩 올리고, 마차 덮개로 먼저 지붕을 삼는다. 이윽고 널빤지를 늘리고, 말이 머물 곳도 짓는다. 모든 일은 한집안 모두 힘을 모아서 한다. 내가 어릴 적을 돌아본다. 마을에서 곧잘 집을 옮겼지만,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가 아이를 낳고 집을 꾸린 뒤에도 고장을 떠나지 않았다. 일터 가까이 살림집을 얻었다. 대구로 옮기면서도 짐을 거의 옛집에 두었다. 옷가지만 갖고 대구로 왔는데도 집안에 온갖 살림이 가득했다. 예전에는 살림살이가 적었을는지 몰라도, 네 식구가 마차를 타고 집처럼 누리면서 옮기는 길은 만만하지 않았을 텐데. 가만히 읽어 보자니, 《초원의 집》은 내가 열 두 살 무렵에 티브이에서 보았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75 말이라는 빛 《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 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2013.6.24. ‘언어’라는 한자말을 어떻게 풀어서 쓰면 좋을는지 헤아리다가 《인간과 말》을 펼친다. 열 달쯤 앞서 읽은 책인데, 다시 펼치니 책 귀퉁이를 접어놓은 자국이 꽤 많다. 말에는 몸이 없다. 어려운 이야기도 쉽게 풀면 듣거나 읽기에 좋다. 자칫 어렵기만 할 수 있는 길을 나긋나긋 풀어낸 책이 아닐까 싶다. 문득 생각해 보니, 말이란 우리 스스로 몸을 짓는 길일 수 있겠다. 갓 태어난 아기는 말보다는 몸짓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루하루 겪고 물려받고 배운다. 말에 앞서 몸이 있는 듯하다. 몸으로 겪으면서 알아가고, 마음에 맺은 멍울을 하나하나 다스리면 어느새 마음이 스스로 낫는다. 어둡게 가라앉은 몸을 씻고, 어둡게 덮는 말을 씻는다. 몸은 좁거나 작은 곳에는 못 들어갈 테지만, 말은 어디에나 들어가고 흐른다. 손끝에서도 입밖에서도 말은 흐르고 들어가고 나오면서 돌고돈다. 숲에 깃든 모든 목숨은 사람한테 머물기를 바란다. 바다는 하늘과 닿을 때까지 판판하게 펼치다가, 어느 날 배가 지나가면 아득하게 물러나 돌아간다. 바다는 사람과 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