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한실 손보아 옮김 ]
이 글은 이오덕님 <우리글 바로쓰기> 1,2,3 과 <우리월(문장) 쓰기>를 간추려, 빗방울(김수업)님이 하신 말씀을 한실이 배달말 아닌 말을 되도록 배달말로 바꾸어 고쳐 놓았습니다. 본디 글은 묶음표 안에 묶어 놓았어요. (이오덕님이 우리글 바로쓰기를 내놓은 지 서른 해가 되었고, 빗방울님이 이 말씀을 한 지도 열다섯 해가 지났어도 우리말을 왜 살려 써야 하고 어떻게 살려낼지를 아주 잘 간추린 말씀이어서 세 차례에 나누어 싣습니다.)
첫(제1회) 이오덕 배움(공부) 마당 : 김수업 (선생)님 알맹이 말씀(주제 발표)
때: 2006. 8. 24. 10:00-16:00
이오덕 우리 말 생각(사상)
-《우리글 바로쓰기》와 《우리 월(문장) 쓰기》를 다시 읽으며-
3. 누리에(세상의) 감춰진 참(이치)
이오덕님(선생)은 배달말과 한글이 당신에게는 모든 것을 환히 비춰 보여주는 햇빛이라고 말했습니다.
“훌륭한(위대한) 우리 한아비 나라(조국의)말, 배달말은 뛰어난(위대한) 글자 한글을 낳았고, 이 말과 글은 내게 모든 것을 환히 비춰 보여주는 햇빛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배달말과 한글이라는 햇빛에 힘입어 눈을 뜨고 겪은(경험한) 바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 짓 하나하나와 생각과 느낌(하나하나의 행동과 생각과 감정)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한 무리가 풀어내야 할 일 알맹이(가지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며, 한 겨레가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 내려오는(오랜 세월에서 어떤 특수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 오고 있는) 까닭까지도, 그 무리와 그 겨레가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글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하는 데서 아주 쉽게(신통하게) 술술 풀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배달말과 한글이라는 햇빛에 힘입어 사람들이 말을 어떻게 하는가, 글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니까 “사람들 하나하나 짓과 생각과 느낌(의 행동과 생각과 감정)”, “한 무리가 가지고 있는 풀 일 알맹이(문제의 본질)”, “한 겨레가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 내려오는 (오랜 세월에서 어떤 특수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 오고 있는) 까닭”이 “아주 쉽게(신통하게) 술술 풀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놀라면서 깨달은 이들 세 가지는 누리(세상의) 깊숙한 속내입니다. 곧 “사람들 하나하나짓과 생각과 느낌(의 행동과 생각과 감정)”은 ‘사람됨’이고, “한 무리가 가지고 있는 풀 일 알맹이(문제의 본질)”은 ‘무리됨’이고, “한 겨레가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 내려오는(오랜 세월에서 어떤 특수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 오고 있는) 까닭”은 ‘겨레됨’입니다. ‘사람됨’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그 사람이 말을 그렇게 하기 때문이고, ‘무리됨’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도 그 무리가 말을 그렇게 하기 때문이며, ‘겨레됨’이 그러한 것도 그 겨레가 말을 그렇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됨됨이, 곧 사람과 그 동아리(의) 됨됨이는 그들이 쓰는 말과 글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오덕님(선생)은 배달말과 한글이라는 햇빛을 힘입어 바라보니까 ‘우리 섬김(정치)’, ‘우리 갈라짐(분단 문제)’, ‘우리 살림(산업과 경제)’, ‘우리 갈배움(교육)’, ‘우리 바른 소리(언론)’ ‘우리 말꽃(문학)’, ‘우리 갈(학문)’, ‘우리 믿음(종교)’ 이런 모든 것들 참 꼬라지와 풀일(의 실상과 문제)까지도 환히 보인다고 했습니다.
“우리 나눔이(정치가) 왜 이렇게 바로잡히지 않는가, 겨레가 갈라져서 하나 되지 않는 참(분단문제가 풀리지 않는 근본)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어째서 살림살이(산업과 경제의) 밑바탕이 제대로 다져지지 않고 바드러운가(위태위태한가), 왜 갈배움(교육)이 엉망이고 바른 소리가(언론이) 제 구실을 못하는가도 내 눈에는 말 때문임이(말의 문제로) 환하다. 말꽃(문학)이고 갈(학)이고 믿음이(종교)고 모든 풀 일이(문제가) 다 그렇게 잡힌다.”
그리고 마침내 이오덕님(선생)은 “숨어 있는 누리 참과(세상의 감춰진 이치”와) “우리 살아온(역사의) 밑뿌리가 그 무엇에 얽혀 있는가 하는 것이” 훤히 들여다보였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어떻게 하는가, 글을 어떻게 쓰는가를 눈여겨보고 듣고 하니까 뜻밖에도 이 ‘말’로 하여 감춰진 누리흐름이(세상의 감춰진 이치가) 자꾸 드러나 보였고 그래서 마침내 우리 지난 삶(역사의) 밑뿌리가 그 무엇에 얽혀 있는가 하는 것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우리 지난 삶(역사의) 밑뿌리가 그 무엇에 얽혀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 겨레됨’(의) 속내입니다. 오늘 우리 겨레(의) 겨레됨이 어째서 이러한가를 훤히 들여다보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됨과 무리됨과 겨레됨(의) 속내를 이오덕님(선생)은 한 마디로 ‘감춰진 누리흐름이(세상의 감춰진 이치)’라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로 하여 감춰진 누리흐름이(세상의 감춰진 이치가) 자꾸 드러나 보인다.”는 말은 끝내(결국) 이런 모든 참(사실)을 한 마디로 묶은 셈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말하는 ‘감춰진 누리흐름이(세상의 감춰진 이치’가) 다름 아닌 그림표 ㉡에 담겨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림표 ㉡이 보여주는 ‘감춰진 누리흐름이(세상의 감춰진 이치)’란 한 마디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본) 자리 ❶> → <잘못된 흐름 ❷> → <바로 세우기 ❻>입니다. 본디 있었고 언제나 있어야 하는 마땅하고 오롯한(온전한) 자리(❶)가 어떤 매개(사정)들 때문에 뒤틀리고 거꾸로 서서 잘못된 흐름이 되어 가고 있으니(❷) 우리가 모두 얼(정신)을 차리고 일어서서 본디 자리에 바로 세워야 한다(❻)는 것입니다. ❸과 ❹와 ❺는 모두 <잘못된 흐름 ❷> 속에 감춰진 속내이기 때문에 거기 싸잡혀집니다. 이것은 말을 바꾸면 <오롯(온전)함(바로 흐름) → 흐트러짐(거꾸로 흐름) → 오롯(온전)함(바로 흐름)>입니다. 본디는 흠도 티도 없이 바람직한 오롯(온전)함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땐가 흠과 티가 끼어들어 잘못된 흐름을 일으키면서 흐트러져 버렸습니다. 그런 흐트러짐은 여태 바로잡히지 않았고 앞과 같이(여전히) 바로잡힐 낌새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나서서 흠과 티를 가려내고 본디(의) 바람직한 오롯(온전)함으로 바로 세워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감춰진 누리흐름(세상의 감춰진 이치)입니다. 이렇게 그림표 ㉡은 말하고 있습니다.(있는 것입니다.)
(제(본) 자리) [ 말 ] ⇒ [ 글 ] ❶
| |
(잘못된 흐름) [ 입말 ] ← [ 글말(책) ] ❷
| |
(바로 [삶]→[말] ⇒ [ 글 ] ❻
세우기) (삶을 가꾸는 글쓰기,
우리 말 살리기)
벌써 눈치 채셨을 줄 압니다만 누리흐름을(세상 이치를) 이런 눈으로 보는 것은 이오덕 님(선생)뿐이 아닙니다. 일찍이 뛰어난 스승들은 너나없이 입을 모아 누리흐름이(세상의 이치가) 이렇다고 부르짖으며 가르쳤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랬고, 공자님도 그랬고, 예수 그리스도님도 그랬고, 마호메트님도 그랬습니다. 그밖에 참된 가르침(종고)에서는 모두 그렇게 가르치고 일찍이 우리 겨레가 믿고 받들며 살았던 굿(무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오덕님(선생)이 우리 겨레(의) 말을 살피면서 깨달은 누리흐름이(세상 이치가) 이분들(의) 가르침과 꼭 같은 틀임은(틀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갖가지 거룩한(종교의) 가르침에서는 그야말로 온 누리를(세상을) 보지만 이오덕님(선생)은 우리 겨레가 어우러져 사는 누리(세상)만을 보아서 크게 다릅니다. 그런 까닭에 누리를(세상을) 잘못된 흐름으로 몰고 나간 흠과 티도 거룩한(종교의) 스승들이 짚은 것과는 저절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가르침을(종교를) 일으킨 스승들은 누리를(세상을) 잘못된 흐름으로 몰고 가는 흠과 티를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하고픔(욕심)’과 ‘뽐냄(교만)’으로 짚는 것이 한결같지만 이오덕님(선생)은 우리 겨레(의)삶을 잘못된 흐름으로 몰고 간 흠과 티를 ‘글말(책)’이라고 짚었습니다. 아주 놀라울 만큼 올바로 짚었다고 저는 늘 생각합니다.
우리 겨레(의) 누리(세상)에 글말(책)이 들어와 지난 삶(역사) 흐름을 잘못된 길로 몰고 간 자취는 제법 뚜렷하지만 여느 사람들은 그것을 눈여겨보지 못했고 잘못된 길임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중국 진나라 태학을 본받아 고구려 임금집안(왕실)이 서기 372년에 세운 태학을 비롯하여 다시 중국 당나라 국학을 본받아 신라 임금집안(왕실)이 서기 682년에 세운 국학에 이미 중국(의) 글말(책)이 임금집안(왕실의) 품에 안겨 버젓이(당당히) 들어왔습니다. 남(의) 글말로 남(의) 삶을 써서 담은 책이 들어와서 우리 겨레(의) 다스림이들(지배층)을 하루하루 잘못된 길로 밀어 넣었습니다. 신라(의) 국학 뒤로 중국 글말(책)은 조선임금나라(왕조)가 무너진 스무 온 해(20세기) 맏무렵(초엽)까지 즈믄 서온 해(일천 삼백 년을) 넘게 갈수록 활개를 쳤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임금나라(왕조)가 무너질 즈음에 이르자 다스림이(지배층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어 이제는 하늬녘(서양)을 배워야 살 수 있다고 다투어 부르짖었습니다. 나라 으뜸사귐일꾼쯤 되는(외교통상부 장관쯤의) 자리에 있던 독일사람 묄렌도르프가 세운 <동문학>(1883)과 미국 보빙대사 박영익이 이른바 제어미말 가르침이(원어민 교사)를 불러들여 세운 <육영공원>(1886)을 비롯하여 1894년에 일본 손아귀에 쥐여 틀을(체제를) 바꾼 나라일 곳이(정부가) 세운 <일어학교>, <영어학교>, <법어학교>, <덕어학교>, <노어학교>가 잇달아 남(의) 글말(책)을 다투어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지난 삶(역사의) 흐름은 오늘까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은 채 굽이치며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겨레(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일이 우리 삶을 잘못된 길로 밀어 넣는 흠과 티가 됨(된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길임을 알아보기는커녕 그런 길이야말로 우리를 살리고 키우고 드높이는 길이라고 굳게 믿으며 앞을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 것을 좀 더 멀리 팽개쳐버리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남(의) 것을 좀 더 알뜰하고 오롯하게(온전하게)배워서 본받지 못한 것을 뉘우쳐 한숨지었(한탄했 )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라도 다른 사람보다 남(의) 것을 빨리 배우고 많이 본받아서 우리 것으로부터 멀리 떠나갈 수 있을까 하며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이런 지난 삶과 모둠살이(역사와 사회) 안에 이오덕님(선)은 감춰진 흐름을(이치를) 이렇게 꿰뚫어본 것입니다. ‘감춰진 누리흐름을(세상의 감춰진 이치’를) 제대로 꿰뚫어보았기 때문에 잘못된 흐름을 바로잡아 일으킬 길도 환히 밝혀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림표 ㉡에서 이오덕님(선생)은 그 길을 ‘바로 세우기’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세우기’를 이루어낼 길(방도)까지 ‘삶을 가꾸는 글쓰기’와 ‘우리 말 살리기’ 두 가지라고 똑똑히 밝혀 놓았습니다.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에는 언제나 밝은 빛으로 길을 밝히는 등불이 있고,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길잡이가 있게 마련임이(마련이라는 사실이) 어김없이 드러났습니다.
4. 거꾸로 흐른 지난 삶과 모둠살이(역사와 사회)
이제 <이오덕 우리 말 생각(의) 알맹이>에서도 가장 알맹이를 더듬어볼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말이 놓여 있는 매개를(형편을) 이오덕님(선생)은 어떻게 밝혀놓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분(의) 우리 말 살펴본 글을(진단서를) 따져(살펴)볼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름난 나숨이는(의원은) 무엇보다도 살핌(진단)을 올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이 살핌글이야(진단서야)말로 <이오덕 우리 말 생각(의) 알맹이> 가운데서도 가장 알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오덕님(선생의) 살핌글은(진단서는) 오늘날 우리 말 누리가(세상이 )온통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흐름을 네 가지 뼈대로 가려내어 아래와 같은 그림표로 나타내 놓았습니다.
(잘못된 흐름) [ 입말 ] ← [ 글말(책) ] ❷
| |
(어른) [여름지기와(농사꾼과) ← [책을 읽고 ❸
그밖에 일하면서 (배움(교육)․ 글 속에 사는
사는 백성들] 뱀뱀이(교양)․ 이들 ]
깨우침(계몽)․
말꽃(문학)․ ,
재주(예술)․
갈(학문))
| |
(갈배움(교육)) [어린이(학생)] ← [갈침이(교육자(어른)] ❹
배움책 (교과서)
| |
(뿌리) [ 나, 우리 ] ← [ 남의 것 ] ❺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그림표에 보이는 ❷, ❸, ❹, ❺는 뜨레가 서로 다릅니다. ❷는 ‘잘못된 흐름’(의) 큰 줄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이 그림표(의) 뼈대입니다. ❸은 그처럼 잘못된 흐름을 만들어내고 일으키고 키워가고 하는 힘(세력)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뼈대인 ❷를 살아 있는 몸집으로 만들어내는 피와 살입니다. ❹는 그런 힘(세력) 가운데서도 잘못이 가장 큰 힘(세력), 곧 몸집(의) 피와 살이 살아 있도록 만드는 핏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본 ❸의 속내인 셈입니다. ❺는 ❷, ❸, ❹, 이런 모든 잘못된 흐름(의) 뿌리며 심줄입니다. 잘못(의) 큰 줄기인 ❷(의) 심줄이며 뿌리라 해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표를 ❺ → ❹ → ❸ → ❷로 읽으면 우리 겨레가 거꾸로 걸어온 삶 흐름을(삶의 역사를) 환히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일본, 서양 같은 남(의) 것을 우러러보며 그들(의) 글말(책)을 불러들여서 ‘나’를 내버리는 마음과 ‘우리’를 업신여기는 마음(외국숭배, 사대주의)을 키운 것, 이것이 잘못된 흐름(의) ‘뿌리’가 되었습니다.(❺)
“이와 같이 서양말 즐겨 쓰는 버릇은 일본말 즐겨 쓰는 버릇이었고, 중국글자말 자랑스럽게 쓰는 버릇이었다. 중국글자말에서 일본말로, 다시 하늬(서양)말로...... 이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그만둔 얼 꼬라지(정신 상태)에서 보여주는 슬픈 버릇이다. 우리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나랍게(천하게) 여겨서 덮어 가리고 지워 없애고 싶어 하고, 그래서 남(의) 것을 쳐다보고 흉내 내고 따라가고 싶어 하는 앓는(병든) 몸가짐, 바로 얼이 빠진 종살이 버릇이요, 나라를 잃고 겨레를 잃는 얼앓이(망국망족의 정신병)이다.”
중국을 우러러보며 그들의 글말(책)을 불러들여 ‘나와 우리’를 내버린 해와 달(세월)은 적어도 즈믄 닷온해(일천오백 년), 일본과 하늬녘(서양)을 우러러보며 그들(의) 글말(책)을 불러들여 ‘나와 우리’를 업신여긴 해달(세월)은 온해 남짓(일백여 년), 이것이 우리네 마음을 다른 나라 우러르고 큰 나라 섬기는(외국숭배와 사대주의라는) 잘못된 구렁으로 밀어 넣은 지난 삶(역사)입니다.
“우리 겨레 다(전체)를 보아도 그렇다. 지난 즈믄 해(천 년) 동안 우리 겨레는 끊임없이 남(의)나라 말과 글에 우리 말글을 빼앗기며 살아왔고, 이제는(지금은) 온통 남(의) 말글(의) 큰물(홍수) 속에 떠밀려 가고 있는 판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이 나라(의) 어버이(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어미말을(모국어를) 가르치는 일조차 아예 그만두었다.”
“말과 글이 병든 것은 삶이 병들고 지난삶이(역사가) 병든 것이다. 이래가지고 우리가 무슨 말꽃(문학)을 하고 배움(교육)을 하고 삶꽃을(문화를) 꽃피운다고 하겠는가? 삶에서 아주 떠난 말, 하늘(공중)에 붕 뜬 말과 글을 가지고!”
이처럼 부끄럽고 서글픈 지난 삶(역사), 이렇게 어리석고 얼빠지게 살아온 삶을 이오덕님( 선생)은 중국글과 중국글자말이라는 ‘미구’(의) 짓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째서 우리가 이 꼴이 됐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겨레 안에 우리를 잡아먹는 ‘미구’가 있는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피 속에 미구(의) 피가 들어 있는 것이다. 몰라도 아는 척, 없어도 있는 척, 우리 것은 부끄럽게 여겨서 짓밟아버리고 남(의) 것을 흉내 내어 가지고 싶어 하는 이 더러운 소갈머리는 즈믄 해(천 년)도 더 앞(이전)부터 우리 겨레(의) 말과 얼을 끊임없이 야금야금 잡아먹는 중국글과 중국글자말이라는 꼴로 나타난 미구였다. 이 미구가 온 해 앞(백 년 전)부터는 일본말로 겉 바꿈(둔갑)을 하고, 하늬(서양)말로도 겉 바꾸며(둔갑하면서) 나라를 송두리째 팔아먹더니 아직도 뻔뻔스럽게 서울(의) 거리를 활개치고 다닌다. 겨레를(동족을) 마구 죽여(학살하여) 힘(권력)을 휘두르고 가멸짐을(부귀를) 누린 것도 끝내(필경 )미구(의) 짓이다.”
우리를 잡아먹는 ‘미구’에게 홀려서 잘못된 마음을 키운 어른들, 무엇보다도 가르침이(교육자)가 남(의) 글로 이루어진 배움책을(교과서를) 들고서 배움이(학생), 곧 어린이들을 잘못된 흐름으로 밀어 넣었습니다.(❹) 중국 ‘미구’는 진나라 태학과 당나라 국학을 고스란히 옮겨놓고 거기서 배움책을(교과서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잘 읽고 잘 쓰는 재주만을 겨루어서 벼슬자리를 주었습니다. 일본 ‘미구’는 서른다섯 해 동안 쳐들어 와 다스리면서(침략 통치를 하면서) 일본말을 우리(의) ‘나랏말이(국어)’라고 우기며 일본 글말로 이루어진 배움책으로(교과서로) 온 나라 어린이를 닦달하며 가르쳤습니다. 하늬(서양) ‘미구’는 지난 온해 남짓(일백여 년) 동안 갑배곳(중학교)부터 높배곳으로(학교로) 올라갈수록 더 많이 하늬(서양 )글말로 쓰인 배움책으로(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배곳(학교)에 들어가기 앞(전)에 어버이(부모)로부터 한뉘를(평생을) 쓰게 되는 나날말을 거의(일상의 말 대부분을) 배웠다. 그러나 학교란 곳에 들어가고부터는 집에서 배운 말과는 바탕이 다른 얼개(체계의) 말을 익혀야 했다. 그래서 어버이(부모)한테서 배운 말을 부끄럽게 여기고 잊어버리게 하는 갈고닦기를(훈련을) 오랫동안 받았던 것이다. 배곳(학교)뿐 아니라 모듐살이(사회)에 나와서도 그랬다. 나 혼자(개인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렸을 때 배운 어미말을(모국어를) 배곳과 모둠살이(학교와 사회)에서 끊임없이 빼앗기고 또 스스로 짓밟으며 살아왔음을(살아왔다는 사실을) 나이가 60이 훨씬 넘은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아이들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어른말, 글말만을 하도록 갈고닦는 배움(훈련하는 교육)이 우리말 모두(전체)를 앓게(병들게) 하고, 우리 겨레(의 )마음을 앓게(병들게)하고, 그래서 우리 말꽃(문학)이며 재주(예술이)며 갈(학문)이며 나눔이며(정치며) 지난 삶 모두(역사 전체)를 앓게(병들게) 하는 뿌리가(근원이) 되었다고 본다.”
이런 배움(교육)이 쌓이면서 책을 읽으며 글 속에 사는 사람들(알음알이꾼(지식인), 글쟁이(문필가), 갈이(학자), 믿음꾼(종교인), 벼슬아치(관리), 판가름벼슬아치(법관))이 날이 갈수록 불어났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글쟁이(문인)들은 방안에 앉아 제멋대로 글재주만 부리고 있다. 이들은 또 어렸을 때부터 책만 읽고 글 속에서 자라났다. 그 글이 죄다 일본글을 잘못 옮겨 놓은 글이고, 떠들썩한(요란한) 중국글자말로 된 글이고, 그래서 우리말은 아주 매개(형편)없이 망가져버린 글이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거기 빠져서 그런 글만 되풀이해서 쓰고 있으니, 이래가지고 무슨 이야기가(소설이 )되고 노래(시)가 되겠는가? 겨레말꽃(민족문학)이고 뭐고 해도 다 뿌리 없이 만든 종이꽃에 지나지 않는다.”
남(의) 글로 된 책을 읽으며 그런 글 속에 사는 사람이 불어나서 배움(교육), 뱀뱀이(교양), 깨우침(계몽), ), 재주(예술), 갈(학문) 같은 이름으로 여름지기와(농사꾼과) 그밖에 일하며 사는 백성까지 잘못된 흐름으로 밀어 넣었습니다.(❸) 우리 겨레(의) 삶을 아주 밑바탕까지 망가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름지기(농민)들이 모인 어느 자리에서 그곳 사투리로 된 옛이야기를 읽어준 일이 있다. 바로 『배달 이야기 말꽃 큰 갈래(한국 구비문학 대계)』에 나온 이야기다. 이거야말로 진짜 우리말이고 우리 얘기다 하고 무릎을 칠 것이라 바라(기대하)면서. 그러나 내가 읽기를 마치자마자 여름지기(농민)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요!” “좀 알음 많은 말꽃(유식한 문학) 얘기를 해주세요!” 하고. 나는 그 눈깜짝할 새(순간) 벼랑(절벽) 아래로 떨어진 느낌(기분)이었다. 여름지기(농민)들만은 살아있는 우리 말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이제는 온 나라(의) 알음쟁이(지식인)들, 글 쓰는 이들이 모두 딴 나라 말본(외국말)으로 다른 나라말을 곧이곧대로 뒤친(외국말 직역한) 말투로 ‘많이 아는 체(유식하게)’ 쓰고 말하고 하니 여름지기(농민)들의 말도 아주 뿌리가 뽑혀버린 것이 마땅(당연)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겨레(의) 지난 삶이(역사가) 거꾸로 흐르면서 굴러 떨어진 삶(의) 꼴(현실)이 이런 매개(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매개(지경)에까지 다다른 지난 삶(역사의) 기나긴 흐름을 한 마디로 묶어 뭉뚱그리면 남(의) ‘글말(책)’이 우리 ‘입말’까지 잘못된 길로 밀어 넣었다(❷)고 말할 수 있는 그것입니다. 그런 삶터를(현장을) 몸소 맞춰보던(확인하던) 눈깜짝할 새 (순간)에 받은 느낌을 이오덕님(선생)은 “벼랑(절벽) 아래로 떨어진 느낌(기분)”이었다고 했습니다. 벼랑(절벽) 아래로 떨어진 느낌(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