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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우리 말 생각(사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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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한실 손보아 옮김 ]

 

  이 글은 이오덕님 <우리글 바로쓰기> 1,2,3 과 <우리월(문장) 쓰기>를 간추려, 빗방울(김수업)님이 하신 말씀을 한실이 배달말 아닌 말을 되도록 배달말로 바꾸어 고쳐 놓았습니다. 본디 글은 묶음표 안에 묶어 놓았어요. (이오덕님이 우리글 바로쓰기를 내놓은 지 서른 해가 되었고, 빗방울님이 이 말씀을 한 지도 열다섯 해가 지났어도 우리말을 왜 살려 써야 하고 어떻게 살려낼지를 아주 잘 간추린 말씀이어서 세 차례에 나누어 싣습니다.)

 

 

첫(제1회) 이오덕 배움(공부) 마당 : 김수업 (선생)님 알맹이 말씀(주제 발표)

때: 2006. 8. 24. 10:00-16:00

 

이오덕 우리 말 생각(사상) 3

-《우리글 바로쓰기》와 《우리 월(문장) 쓰기》를 다시 읽으며-

 

    5. 바로 세우기

 

  살핌글이(진단서가) 이렇게 나왔으니 이제 남은 일은 낫숨(치료), 곧 “바로 세우기”입니다. 낫수는(치료의) 길도 말할 것 없이(물론) 그림표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로                     [삶]→[말]                       ⇒                              [ 글 ]            ❻

  세우기)                                           (삶을 가꾸는 글쓰기,

                                                         우리 말 살리기)

 

  보시다시피 ‘바로 세우기’는 [삶]에서 [말]이 나오도록 하고, [삶에서 나온 말]에서 다시 [글]이 나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것 없이(물론) [말]에서 [글]이 나오는 (제(본) 자리), 곧 ❶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본) 자리)에서는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삶]이 [말](의) 뿌리며 바탕임을(바탕이라는 사실을) 여기서는 굳이 드러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본) 자리)에서 [글]이 [말]로부터 나올 적에는 말할 나위도 없이 그 [말]은 또 그 바탕인 [삶]에서 나오고 있어서 굳이 드러낼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글]이 [말]을 망가뜨리는 잘못된 흐름을 되돌려 바로 세우고자 할 적에는 [말]이 이미 [삶]을 떠나 망가져 있기 때문에 굳이 [말]을 [삶]에서 끌어내도록 못 박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오덕님(선생)은 “삶을 가꾸는 글쓰기”와 “우리 말 살리기” 두 가지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두 가지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고, 무게가 다를 것도 없고 먼저와 나중이 있다고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말씀에서도 ‘말 살리기’를 이야기하지만 삶과 글을 함께 싸잡아 이야기합니다.

 

“말을 살리는 길은 글을 바르게 따지고(비판하고) 책을 바르게 따지는(비판하는) 길이요, 삶을 찾아가지는 길이다. 말을 살리는 길은 책과 글 속에 빠져 있는 앓는(병든) 삶에서 벗어나 참된 삶을 살아가는 길이다. 책과 글 속에 묻혀 있도록 하는 그릇된 배움(교육0을 바르게 따지고(비판하고) 바로잡는 길이다. 책만 읽고 글만 쓰는 글쟁이들(의) 글에 끌려가지 말고, 그것을 마다하고(거절하고) 그것에 맞서서 제 스스로 살고(자기 자신의 삶과) 삶에서 우러난 말을 자랑스럽게 쓸 때 비로소 말은 살아날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세우기)는 [글] → [말] → [삶](의) 흐름을 되돌려 [삶] ⇒ [말] ⇒ [글] (의) 흐름으로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런 일(사실)을 이오덕님(선생)은 두 가지 길(방도), 곧 “삶을 가꾸는 글쓰기”와 “우리 말 살리기”에다 기막힌 솜씨로 갈라 얽었습니다. 이들 두 가지를 하나가 되도록 그림을 그려보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 [말] 살리기                                                       [말]

                             △                                  ⇒                               △

                 [삶]을 가꾸는 [글] 쓰기                                           [삶]           [글]

 

[삶]과 [말]과 [글]이 반반한 자리(평면)에 나란히 놓여서 흐르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제(본) 자리)로 되돌리도록 (바로 세우기)를 하자면 세모꼴(의) 꼭지에 하나씩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반반한 자리(평면)에 나란히 놓이면 두(양)쪽 끝에 있는 [삶]과 [글]은 서로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삶]을 가꾸는 [글]쓰기”라고 하니까 그것이 서로 닿아야 함(한다는 사실)을 곧장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말] 살리기”를 따로 떼어서 세우니까 마침내 [삶]과 [말]과 [글]이 저마다 세모꼴(의) 꼭짓점에 앉아서 서로 닿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말]이 세모꼴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삶]과 [글]을 모두 살리는 열쇠며 지렛대임이 제대로 드러났습니다. 우리 [말]을 살리면 우리 [글]도 살아나고 우리 [삶]도 살아나고 우리 모두가 살아난다. 이것이 <이오덕 우리 말 생각(의) 알맹이>임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다른 나라말과 다른 나라 말본(외국말과 외국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백성이 임자 되고 겨레를 하나로 잇는 일은(민주고 통일이고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는 것이 좋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세해(3년) 뒤에 이뤄질 것이 스무해(20년) 뒤에 이뤄진다고 해서 백성이 임자 되고 겨레를 하나로 잇는(그 민주와 통일의) 바탕이 아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말이 아주 바뀌는 일은(변질되는 그것은) 끝내(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한번 잘못 앓아(병들어) 굳어진 말은 다스려도(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뒤집어도(혁명도)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끝장이다. 또 이 땅(의) 백성이 임자 되는 일은(민주주의는) 남(의) 말 남(의) 글로써 애지을(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써 애짓고(창조하고) 우리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말을 살리는 일이 바로 목숨을 살리는 일임을 모두가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땅에서 떳떳하게(당당하게) 살아남을 겨레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말이 살아나지 않고서는 도무지(절대로) 우리 겨레가 살아날 수 없음을(없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가 갈 길이 환히 트일 것이다.”

 

“죽어가는 배달말, 그것은 소리 한 번 질러 보지 못하고 산채 묻힌(생매장당한) 숱한 우리 백성들(의) 목숨이다. 큰 고을 쓰레기마당에서 비닐 자루에(도시의 쓰레기장에서 비닐 부대에) 무더기로 처넣어 꽉 막힌(봉한) 채 버려져 숨이 막혀 죽어가고 썩어가 흙으로 돌아갈 수도 없이 된 그 수많은 여린 병아리들(의) 불쌍한(처참한) 모습이기도 하다. 아아, 이래가지고 우리가 죽어선들 어느 땅이고 하늘이고 헤맬 자리조차 있겠는가?”

 

“쌀을 열면(쌀 개방은) 밥그릇을 미국 사람들에게 맡겨버리는 짓이지만, 말을 열면(말 개방은) 우리들(의) ‘얼’과 ‘기’를 송두리째 일본과 미국에 팔아넘기는 짓이 된다. 밥그릇을 남에게 맡기는 것도 큰일이지만(문제지만), ‘얼’과 ‘기’를 빼앗기면 뿌리 없는 나무와 다름이 없다. 산것과 푸나무(동물과 식물)까지도 ‘기가 있고 ‘얼이 있다는데, 사람에게 그것이 없으면 어찌 되겠는가?”

 

“지금이야말로 말과 글을 팔고 있는 사람들은 땅을 치며 뉘우쳐야 할 때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아들이 있는 곳으로, 우리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말]을 살리는 일이 [글]을 살리고 사람(의) [삶]을 살리고 마침내 나라와 겨레와 누리를(세상을) 살리는 일임을 어떻게 이보다 더 사무치는 목소리로 부르짖을 수가 있겠습니까!

 

     6. 본디 우리 말 자리

 

  이제 제(저의) 이야기도 막바지에 거의 다다른 듯합니다. 이오덕님(선생)이 “우리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했으니, 돌아가야 할 “우리말이 있는 곳”을 길잡이하면 제 몫은 어지간히 다한 듯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마음대로 마구 뱉어(토해) 내는 사람, 그렇게 뱉어(토해) 내는 말들이 모두 살아 있는 구수한 우리말이 되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참말(정말) 반갑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말에서 비로소 잊었던 텃마을(고향)로, 우리(의) 넋이 깃들인 누리(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어렸을 때 배운 텃(고향의) 말을 참 갸륵(용)하게도 잊어버리지 않고 빼앗기지도 않고 잘도 가지고 있구나 하고 끝없이(한없이) 부러워진다.”

 

여기서 이오덕님(선생)은 “구수한 우리말이 되어 있는” “어렸을 때 배운 옛 텃(고향의) 말”, 곧 “어렸을 때 배운 구수한 옛 텃(고향의)말”을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디 우리 말 자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뜻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말이우리 말인가 아닌가 판가름(판단)이 잘 안 될 때는, 시골에 사는 여름지기(농사꾼), 책을 읽지 않고 일하면서 살아가는 여름지기(농사꾼이)라면 그 말을 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라. 그래서 여름지기(농사꾼의) 입에서 나올 것 같은 말이라면 우리말이 틀림없으니(분명하니) 마음 놓고 쓸 것이고, 여름지기(농사꾼의) 입에서 나오지 않을 말이라면 일본글에서 온 말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

 

“시골에서, 책을 읽지 않고, 일하면서 살아가는” “여름지기(농사꾼의) 입에서 나올 것 같은 말”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디 우리 말 자리라고 했습니다. 또 같은 뜻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이든지 여느(일반) 백성들이 널리 쓰는 말을 따라서 쓰면 틀림없고, 그것이 가장 깨끗하고 똑바른(정확한) 말이다.”

 

“여느(일반) 백성들이 널리 쓰는 말”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디 우리 말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을 조금 바꾸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바르고 깨끗한 우리말이란 옛날부터 우리 겨레가 써온, 아이들도 잘 아는 쉬운 말이다.”

“쉬운 우리말을 내버리고 어려운 남(의 )나라 글자말을 쓰고 싶어 하는 이 슬픈 버릇, 이것이 풀어야 할 으뜸 일이다(근본 문제다).”

 

“옛날부터 우리 겨레가 써온, 아이들도 잘 아는 쉬운 말”, 한 마디로 “텃말(토박이말)”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디 우리말 자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디 우리 말 자리를 이오덕님(선생)은 “어렸을 때 배운 구수한 옛 텃(고향의) 말”, “시골에서, 책을 읽지 않고, 일하면서 살아가는 여름지기(농사꾼의) 입에서 나올 것 같은 말”, “여느(일반) 백성들이 널리 쓰는 말”, “옛날부터 우리 겨레가 써온, 아이들도 잘 아는 쉬운 말” 이렇게 넷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옛 텃(고향) 말”, “여름지기(농사꾼의) 말”, “백성(의) 말”, “쉬운 말” 이렇게 넷은 조금도 다른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같은 것이고, 하나로 묶으면 “옛날부터 우리 겨레가 써온 텃(토박이)말”입니다. 그런 ‘텃(토박)말’이 기나긴 해달(세월)에 걸쳐 업신여겨지고(천대받고) 짓밟혀 죽어나간 나머지 이제는 어린이, 여느(일반) 백성, 여름지기(농사꾼), 텃 마을(고향)에 겨우(간신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힘겹게(간신히) 남아 있는 여기가 바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디 우리말 자리라는 뜻입니다.

 

      7. 마무리하면서 : <이오덕 우리 말 생각(의) 알맹이>는 사랑입니다.

 

  오랜만에 귀한 네 책을 다시 들고 어리석은 제가 읽어낸 <이오덕 우리 말 생각(의) 알맹이>는 이것이 고작입니다. 돌아가신 이오덕님(선생)뿐 아니라 그분을 깊이 사랑하시는 여러분들께 두루 부끄럽습니다. 아무쪼록 훌륭한 분들이 많이 나서서 제 잘못과 모자람을 바로잡고 채워주시기만을 거듭 바랄 따름입니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린 이오덕님(선생의) <우리 말 생각(의) 알맹이>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의)알맹이>(의) 뿌리가 어디에서 나왔으며 그것을 싹트게 하고 가꾸고 키워낸 바탕과 거름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책들을 읽으면서 그것을 나름대로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서슴없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거칠기 그지없지만 그 ‘사랑’을 책에 드러나 있는 대로 세 가지로 나누어 잠깐(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 사랑

첫째는 몸소 땀을 흘리고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오덕님(선생)은 이런 사람들이 그렇게 잘못된 지난 삶(역사의) 흐름에 휩쓸려가는 우리말을 그나마 지키며 보듬고 우리에게까지 넘겨주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말할 것 없이(물론) 책 속에 파묻혀 글만 읽으며 남을 우러러 본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미워함과(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짝을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힘없고 가난하고 업신여김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고 지칠 줄 모르며 꿋꿋하게 살아온 훌륭함을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 텃(토박이)말(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오덕님(선생)은 이런 사람들을 흔히 ‘여름지기(농사꾼)’, ‘여느(일반) 백성’, ‘말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둘(포기할) 수 없다. 이게 어떤 일인데 그만 두(포기하)다니! 그리고 아직도 늦지 않았다. 아직도 글이 아니라 말로 –글 나쁨에 물들지 않은(글의 해독을 입지 않은) 말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틀림없이(분명히) 있다고 나는 믿는다.”

 

“백성이 임자노릇하기(민주주의)가 그렇듯이 우리말을 찾아 쓰는 일도 어디까지나 여느(일반) 백성들이 해야 할 몫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말치고 깨끗한 말은 거의(별로) 없다. 힘(권력)을 잡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한 마디 하면 다투어 그 말을 따라 쓰는 꼬라지(풍토)가 되어서야 말과 백성과 백성 임자노릇을(민주주의를) 살릴 길은 없다.”

 

“어느 나라고 못되게 다스리는 이들은 (못된 정치를 하는 집권자들은) 벼리(법이)고 틀이(제도)고 또 무슨 여럿이 쓸 것(시설물)을 만들면서 그 이름을 아주 그럴듯하게(근사하게) 지어서 백성(국민)들을 속인다. 그러나 아무리 속여도 하늘을 속일 수는 없고, 하늘같은 백성들을 끝까지 속일 수는 아예(절대로) 없다.”

 

“죽어가는 배달말, 그것은 소리 한 번 질러 보지 못하고 산 채 묻힌(생매장당한) 숱한 우리 백성들(의) 목숨이다.”

 

“여름지기(농사꾼의) 입에서 나올 것 같은 말이라면 우리말이 틀림없으니(분명하니) 마음 놓고 쓸 것이고, 여름지기(농사꾼의) 입에서 나오지 않을 말이라면 일본글에서 온 말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

 

일하며 말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짓밟혀도 꿋꿋이 일어서는 사람들, 아무리 꾀를 부려 속이려 해도 끝내는 속일 수 없는 사람들을 굳게 믿으며 끝없이(한없이) 사랑하는 것이 이오덕님(선생의) <우리 말 생각(의) 알맹이>를 지키고 키워온 바탕이며 거름입니다.

 

  2) 아이들 사랑

둘째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오덕님(선생의) 한 뉘(평생) 삶은 오로지 아이들 사랑으로 가득 찼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오덕님(선생의) 삶을 눈으로 지켜본 사람뿐 아니라 그분이 남긴 글을 읽어본 사람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사실)일 것입니다.

 

“날마다 텔레비전을 쳐다보면서 거기서 들려오는 온갖 뒤섞인(잡탕의) 어설픈 글말을 듣고 배우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거듭 말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빈 겨를(공백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 겨를(의 시간)은 가장 값진(귀한) 것으로 꽉 차 있다. 거기에다 또 더러운(추악한) 어른들이 잡동사니를 쑤셔 넣는 짓은 사람됨(인권)을 짓밟는 허물이(범죄 행위가) 된다. 아이들 얼을 부수는 허물을(아이들의 영혼을 폭파하는 이 범죄 행위를) 우리는 조금도(절대로) 너그럽게 봐 줄(용서할) 수 없다. 아이들을 살리는 일만이 우리들 바람(우리들의 희망)이다.”

 

“지난 사람 삶을(사람의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 어느 겨레(민족이)고 어린 아기들을 가장 먼저 돌보았고(보호하였고), 어린이들에게는 또 다른 짐을 지우지 않고 다만 즐겁게 뛰놀고 노래하게 하고, 재미있는 얘기나 들려주었던 것이다. 어린이들은 그저 자고 놀고 먹고 노는 동안에만 우리 어른들이 도무지 해낼 수 없는 어미말 깨침을(모국어 공부를) 아주 저절로(자연스럽게) 하게 된다는 것을, 늦었지만 우리는 이제(지금이)라도 크게 깨달아야 한다.”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마침내 닿는 곳은 다름 아닌 아이들에게서 삶과 사람됨을 배워야 한다는 참을(진리를) 깨닫는 거기인 듯합니다. 그 부드러움, 그 깨끗함, 그 숨김없음, 그 꾸밈없음, 그 열려있음...... 이런 거룩함으로 가득한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면 반드시 거기서 배우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인 듯합니다. 일찍이 예수님이 ‘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시고, 워드워즈가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라고 뿌러지게 말한 것과 같이 이오덕님(선생)도 아이들에게서 배우고,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참말은(사실은) 나도 어린아이들(의) 말과 글에서 우리 말 깨끗함(우리말의 순수함)을 배웠다. 그래서 어른들이 쓰는 글과 말이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이 책을 내게 되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은 가르쳐야 하겠지만, 아이들한테서 도로 배워야 함을(한다는 사실을), 더구나 겨레말 배움(교육)에서 크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아이들 말도 많이 더럽혀져(오염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하는 말보다는 아이들 말이 더 깨끗하다. 갑배움이(중학생) 말보다는 첫배움이(국민학생) 말이 더 깨끗하고, 같은 첫배움이(국민학생이)라도 첫배움해(1학년) 어린이들(의)말이 가장 깨끗하다.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아이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샘(선생님)들은 깨끗한 말, 싱싱하게 살아 있는 말을 함께 배울 수 있기에 그 어느 어른들보다도 흐뭇(행복)하다고 하겠다.”

 

  3) 목숨 사랑

이오덕님(선생의) 사랑은 마침내 모든 살아있는 목숨으로까지 나아갔습니다. 이 또한 그분(의) 삶을 몸소 지켜보고 겪어본 사람뿐 아니라 그분이 남긴 글을 일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분이 모든 살아있는 목숨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일(사실)일 것입니다.

 

① “살아남은 고양이들은 추운 겨울밤을 어디서 어떻게 새울까? 새끼는 어디서 낳아서 어떻게 키울까? 지난날 새끼들에게 쥐를 잡는 갈고닦기를(훈련을) 시키던 어미 고양이가 이제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갈고닦기를(훈련을) 시켜야 하겠는데, 그 쓰레기통은 뚜껑이 닫혀 있고, 열려 있다고 하더라도 잘못 그 속에 들어갔다가 뚜껑이 닫히게 되면 어찌 될까? 그런 때를 맞아(경우를 대비해서) 어미 고양이는 새끼들(의) 목숨을 건지려고(구하기 위해)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쓰레기통은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니 이것은 쥐 잡는 일보다 한층 더 어렵고, 도무지 고양이(의) 머리나 힘으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쌍한 고양이들!”

 

② “해마다 여름배움쉼(방학)이면 갖가지 배곳(각급 학교)에서 벌레잡이를(곤충채집을) 시킨다. 그것은 그저 잡아 죽이는 일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얼마나 많은 벌레(곤충)들이 배움 쉴(방학) 때마다 아이들(의) 손으로 죽어가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그저 잡아 죽이는 재미를 익히고 있는 것일까. 배움 방(교실)마다 다 있는 물고기 단지는(어항은) 고기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곳(살육하는 도살장)이 되어 있는 것을 아니라고 할 갈침이(부인하는 교사)가 있겠는가? 그저 잡고 죽이고 하는 짓만 시켜온 것이다.”

 

③ “가장 끔찍한 것은 지름이 30센티미터나 되겠다 싶게 자란 방울나무(플라타나스)들을 사람(의) 키보다 조금 위쪽쯤에서 모조리 싹둑 잘라서 마치 길가에 커다란 말뚝을 한 줄로 박아 놓은 것같이 해놓은 것이다. 대체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베어 놓았을까? 사람(의) 머리털을 가위로 자르고 나룻 깍듯이(면도하듯이) 쥐똥나무도 그렇게 만들고, 아름드리로 자라날 나무도 그렇게 해놓아야 고을이(도시가) 아름다워진다고 보는 듯하다(모양이다). 이것이 튼튼한(건강한) 사람들(의) 눈이고 마음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런 사람들이 튼튼한 모둠살이(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④ “사람이 큰 고을(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은 누리흐름(자연)을 죽이면서 사는 것이다. -줄임 – 먼저(우선) 쓰레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 쓰레기는 옛날과 같이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도 갖다놓아서는 안 되는, 땅을 더럽히고 목숨을 죽이는 쓰레기로 되어 있다. 큰 고을이(도시)라는 곳은 사람을 밑뿌리부터 허물 있는 이(죄인으)로 만들지만, 큰 고을이(도시)라는 틀 속에 갇혀 있으면 그렇게 해서 누리와(자연과) 목숨을 죽이는 짓을 아주 예사로 여기면서 도리어 그 못살게 굴고 죽이는 짓을(학대, 학살 행위를) 즐기게도 된다.”

 

  보시다시피 저는 ①짐승 사랑, ②벌레 사랑, ③푸나무 사랑, ④누리(자연) 사랑을 차례대로 놓았습니다. 이오덕님(선생의) 사랑이 어디까지 나아가는 것인지를 알아보기 쉽도록 해본 짓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헛된 짓거리가 아니라 이오덕님(선생의) 우리 말 사랑이 얼마나 뿌리 깊은 데로부터 솟아난 것인가를 보여드리고 싶어서 한 노릇입니다. 그분이 우리말 살리기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랑은 먼저 여름지기(농사꾼) 같이 땀 흘려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아끼는 사랑에서 솟아나고, 이런 어른을 아끼는 사랑은 어린 아이들을 아끼는 사랑에서 솟아나고, 또 그것은 짐승을 아끼는 사랑에서, 또 그것은 벌레를 아끼는 사랑에서, 또 그것은 푸나무를 아끼는 사랑에서, 또 그것은 흙과 물 같은 모든 누리를(자연을) 아끼는 사랑에서 솟아난 것임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