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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4]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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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14] 비

 

  집을 나설 적부터 비 오는 날이 좋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숲길이 질퍽하다. 길이 푹 꺼진 자리에는 웅덩이가 하나둘셋 나온다. 나뭇잎이 빗물에 쓸려 몰린 틈으로 물이 졸졸 흐른다. 그런데 어린 날에는 비 오는 날이 싫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오면 엄마가 마중을 오지만, 마을에서 놀다가 소낙비를 맞고 소 먹이러 따라다니다가 소낙비를 맞고 들에 밭에 일하다가 비를 맞는다. 옷이 흠뻑 다 젖어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집에 들어온다. 입술이 시퍼렇고 온몸에 닭살이 돋는다. 비 오는 날 아침에는 작은오빠하고 동생하고 셋이 서로 우산을 차지한다. 우산대가 벌겋게 녹슬고 살이 부러졌다. 대나무 비닐우산은 바람 불면 뒤로 까뒤집어진다. 빗줄기가 세차 우산을 써도 옷이 다 젖고 책도 젖는다. 그렇지만 비를 바라보는 일이 재밌다. 지붕 골을 따라 흐르는 물이 물받이로 모여 세차게 떨어진다. 커다란 고무통에 빗물을 받고 물받이 이음새마다 물을 받아 소죽도 끓이고 몸을 씻는다. 비를 맞고 온 날에는 빗물에 몸을 씻는다. 빗물에 비누를 바르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칼이 부드럽고 빨래를 하면 때가 잘 빠진다. 소낙비가 올 적에는 천둥 번개가 많이 친다. 자르르 쏟아지면 마당에 고운 흙이 톡톡 올라오는 비를 창살문 앞에 우르르 몰려 멍하니 비를 구경한다. 빗소리 생각만 해도 어린 날 내 마음에 남은 빗줄기가 들린다. 우산이 없어 비를 싫어하고 소낙비를 하도 맞아 비를 싫어했는데, 어른이 된 나는 되레 비를 무척 좋아한다. 비를 쫄딱 맞던 어린 내가 새삼스레 비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자랐을까. 어릴 적에는 우산다툼 탓에 싫어하던 비가 이제는 우산다툼 할 일이 없으니 좋을까. 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생각한다. 아직 뭔가 자랄 빛이 있는지 모른다.

 

2021. 05. 23.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