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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77] 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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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77] 머루

 

앞집 우물가에 포도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자주빛으로 익어 갈 무렵이면 포도가 먹고 싶어 군침이 돈다. 앞집에는 마을사람이 드나들지 않았지만 나는 앞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무자위에 물 한 바가지 붓고 길어서 물을 받은 뒤 보는 사람 없을 적에 머리맡에 닿는 포도를 몰래 몇 알 따먹는다. 포도나무가 머리맡에 없었다면 따먹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내 손이 닿는 수돗가에 있으니 물 뜨러 가면 먹고 싶다. 앞집 할아버지는 웃지도 않고 눈을 부라려 무섭지만 나는 할아버지 없을 적에 갔다. 큰집에도 우물가에 포도나무가 우거졌다. 나는 포도가 너무 먹고 싶어 샘 둘레를 돌다가 잘 익은 작은 송이를 몰래 따서 뒷산 뒷길로 먹으면서 집으로 넘어왔다. 하루는 어머니 따라 외가 친척 집에 갔다. 가음 장터에서 버스에 내려서 한참을 걸었다. 땡볕에 땀을 흘리며 닿은 집은 마루가 붙어 시원했다. 마루에 둘러앉아서 청포도를 실컷 먹었다. 새콤하지 않고 달콤한 청포도를 처음 맛보았다. 우리 집은 우물도 없고 포도나무도 없지만, 머루를 실컷 먹었다. 금서 칡덤불 사이로 머루가 주렁주렁 있었다. 포도보다 알이 작고 엉성하게 맺혀도 맛은 포도보다 달콤했다. 아버지는 소꼴을 하면서 곧잘 따서 지게에 담아 왔다. 어머니는 머루를 얼금체 쇠그릇에 담아 씻어 준다. 한 송이씩 들고 마당을 돌면서 따먹고 씨앗과 껍질을 휙 불었다. 금서는 칡이 많아 풀이 우거져 들어가기 힘들기에 밭둑이나 논둑 가까이 덤불에서 땄다. 이제 머루는 풀이 우거져 숲속 짐승이 따 먹을지 모른다. 한두 포기 집에 심었으면 바란 적이 있는데, 작은오빠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오빠가 키우던 포도나무 두 그루를 시골 담벼락에 옮겨 심었다. 앙상한 포도나무와 담벼락이 참 어울린다. 몇 송이 안 되는 포도를 한 알 따 먹으려다 어머니 드시라고 손을 내렸다.

 

2021. 10. 23.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