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95] 분꽃
분꽃이 떨어진 자리에 까만 씨앗이 앉았다. 움푹한 자리는 씨앗이 떨어지지 않게 감싼다. 한 알씩 집었다. 손에 잘 잡히지 않아 떨어진다. 우리 골목은 달리기 내기를 할 만큼 길다. 돌틈에 분꽃 하나가 아주 컸다. 마을 가꾸기를 한 뒤로 마을에 꽃이 많았다. 밖에서 딴 씨앗은 주머니에 넣고 우리 골목 꽃에서도 씨앗을 빼서 뜨락에 놓고 놀았다. 돌로 몇 알 깼다. 까만 씨앗 속에서 뽀얀 가루가 나왔다. 손등에 묻히니 밀가루가 묻은 듯했다. 볼에 발라 보았다. 버짐처럼 하얗다. 열두세 살에 어머니가 밭에 나가고 없을 적에 어머니 작은 소쿠리에서 화장품을 뒤졌다. 벽에 걸린 거울을 벗겨서 창살문 기둥에 세우고 어머니가 쓰는 분을 발랐다. 어머니 입술물(립스틱)은 얼마나 오래 썼는지 돌려도 올라오지 않는다. 어머니가 손가락에 찍어 바르길래 나도 새끼손가락에 찍어서 입술에 문질렸다.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보더니 ‘가시나가 쥐잡아 먹었나’ 꾸지람을 한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가 나가고 없는 날에는 빨간 입술물을 발랐다. 분은 어머니가 장에 가는 날 바르고 운동회 갈 때 바른다. 어머니가 화장하면 딱 붙어서 지켜보았다. 입술물도 집어 주었다. 골목에 핀 우리 집 분꽃은 어머니가 바르던 입술물처럼 빨간 꽃을 피웠다. 분꽃은 낮에는 내가 입을 모으고 입술물을 바를 때처럼 입을 오그린다. 몰래 발라본 분과 입술물로 하루가 가는 줄 몰랐다. 빨갛고 노란 분꽃을 보면 어머니 몰래 바르고 싶다.
2021.12.28.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