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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보기]제주도에서 5 가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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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홀로보기

 -제주도에서 5 가파도

 

배를 타고 가파도에 갔다. 마라도 다음으로 남쪽 끝에 있는 섬이 가파도이다. 나는 숲을 가면 고도계를 보는 버릇이 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틈틈이 보는데 가파도 모습이 가오리를 닮았다. 납작한 가오리처럼 낮은 언덕이 없는 반반한 섬 같다. 들녘과 바다와 섬이 거의 하나를 이룬다. 내가 좋아하는 뒤뜰 동산 같다. 얼마 만인가.

 

길을 못 찾을까 마음이 쓰여 길잡이를 따라다니려고 했는데 길잡이는 가파도 이름돌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멀뚱히 있다가 혼자서 사람들이 올라가는 쪽으로 갔다. 섬이 통째로 어느 집 앞마당 같고 한 사람이 꾸며 놓은 듯 아기자기하다. 낮은 돌담에 길섶에 저절로 난 풀꽃나무가 싱그럽다.

 

한쪽 밭에서는 보리가 누렇게 익고 가을에나 봄직한 살살이꽃이 무릎 높이까지 자라 알록달록하게 피었다. 너도나도 예쁘다며 사진으로 담는다. 나도 찍어 보지만 사진에 비치는 내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돌림앓이를 앓고 온 뒤라 기운이 없고 산을 좋아하는 터라, 이 반반한 길이 오히려 벅차다. 사람들이 꽃밭에서 사진 찍고 얘기할 적에 나는 마을길을 따라서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갔다. 길가에 핀 풀꽃이 밭가에 핀 살살이꽃보다 더 예쁘게 보인다. 길에서 스스로 자란 풀꽃을 보니 가슴이 뛴다.

 

내 가슴을 이렇게 뛰게 해 준 사람이 누가 있던가. 이 풀꽃이 무엇이길래 사람처럼 내 마음이 설렐까. 사람은 몸에 밴 버릇을 버리지 못하듯이 이 모습에 미칠 듯이 빠져드는 나를 스스로 깜짝 놀란다. 이 풀꽃과 만나면 불꽃이 튄다. 내가 풀꽃에게 마음을 쏟으며 아름다움을 속삭이고 풀꽃은 어여삐 봐주는 나를 반기려는 듯 바람에 춤까지 춘다. 사람 손길이 타지 않는 이 아름다운 풀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풀꽃이 산들바람을 타고 손짓하는 소리를 맞이하듯 끌어들인다.

 

사람들이 꽃밭에 사로잡힌 동안 나는 마음껏 길가에서 풀꽃과 바다와 바람에 한껏 사로잡힌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두 사람이 있어 어쩐지 더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혼자서 보기가 아깝다. 길가에서 바람에 누운 풀꽃 곁에 쪼그리고 앉아 사진을 찍는데, 풀꽃이 나를 당기는 듯하다. 그대로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는다. 사람 발길이 없어 한참 앉았다가 보리밭에 앉는다. 이대로 오늘이 멈추면 좋겠다고 바란다. 내 가슴에서 아름다움이 물결치듯 일어나 훅 사로잡히는 이때에, 내 곁으로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일이 슬펐다. 혼자 왔기에 마음이 더욱 술렁이는가. 앓이 끝에 기운이 딸렸을까. 이 야릇한 풀꽃에 끌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가슴이 북받친다.

 

파란 바다와 누런 보리와 봄빛 풀꽃에 알록달록한 코스모스가 어우러진 빛잔치가 일어난다. 이제는 바닷가 언덕계단을 내려가야 하는데 그냥 이곳에 더 있고 싶다. 누구라도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전거를 타거나 걸으면 이 빛살이 나를 얼마나 부러워할까. 혼자니깐 내가 빛살에 슬쩍 빛살이 되어 준다.

 

나무 한 그루도 없고 햇볕을 가려줄 그늘도 없다. 조금 더 걷자. 바닷길로 걷는데 아무도 안 보인다. 지도를 보니 조금 더 가면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이 나온다. 조용히 더 걷는다. 이쁘라며 심어 놓은 꽃밭에서만 노닐기보다는 바다를 보면서 들풀을 보며 더 보람있다고 느낀다. 밀수레를 끌고 온 할머니 한 분이 풀밭에 들어가 쑥을 뜯어 길바닥으로 던진다. 가는 길을 여쭙는다. 모이기로 한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느긋이 풀꽃하고 놀 때가 아니다. 단체관광으로 왔으니 마음이 바빴다. 이제는 달린다.

 

초등학교 옆을 지난다. 학교를 예쁘게 꾸며 놓았다. 해마다 한 아이씩 마친다는데, 섬이 한 아이를 키우느라 온힘을 쏟는구나 싶다. 담벼락에 적힌 글씨를 읽으며 달린다. 전봇대가 없는 마을이다. 논물을 가둘 수도 없는 이곳은 샘이 솟기에 물을 쓸 수 있다고 한다. 하멜이 가파도 숨은바위에 부서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 등대를 세웠다고도 한다. 물질하고 나온 해녀가 태왁에 기대어 멈춘 숨을 빨아들이는 숨비소리, 그 싱그러운 휘파람도 들으면서 달린다.

 

여럿이 모여 다니는 여행길에 혼자인 나는 작은 빛살(풍경)하고 논다. 아니, 빛살이 혼자 온 나와 놀아 준다. 풀꽃하고 놀면서도 즐겁다. 빛살이 벗이 되다니. 그림자를 잊고 빛살과 노는 재미에 혼자 임을 잊었는지 모른다. 어릴 때 이야기는 저절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제는 오늘을 이야기로 가꾸자. 혼자 왔기에 빛살과 이야기를 엮는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림같은 이 빛살을 두고두고 꺼낼 듯하다. 어느덧 나루터에 닿는다. 미처 걸어서 돌아보지 못한 가파도 맞은쪽을 아쉽게 바라본다.

 

2022. 05. 19.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