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엄마아빠 1 ] 아버지
탑리에서 소주 한 병을 샀다. 아버지와 어머니 가운데 누구를 먼저 뵈어야 하는지 둘은 생각이 다르다. 곁님은 '산 사람을 먼저 만나자' 하고 나는 '아버지 먼저 보자' 했다. 시삼촌이 집에 오면 ‘할머니 무덤에 먼저 들르는 일이 못마땅하더라’ 하는데, 나는 이 마음을 알 듯하다. 내가 아버지를 먼저 보고 오자고 한 까닭은 집에 들어가면 까딱하다가는 가지 못한다. 바람이 산뜻할 적에 가볍게 다녀오면 하루를 아껴쓴다.
목골 경이네 곁에 차를 멈추고 멧자락으로 오른다. 아침 참새가 밭에 심어 놓은 씨앗을 빼먹는다. 족제비싸리나무, 찔레덩굴, 아까시나무에서 짹짹 포르르 날아다닌다. 닭우리에 닭도 ‘꼬끼오 꼬꼬’ 노래를 부른다. 길바닥에는 돌나물이 빽빽하게 자라고 노란 애기똥풀이 바람에 한들거린다. 나즈막한 오르막길을 가는데 풀어진 다리가 당긴다. 잘 다듬은 길이 끊어지고 흙자갈길이다. 길 가운데는 족제비싸리꽃이 무릎 높이로 자라고 쑥이 허리춤에 온다. 싸리꽃이 막 피어오르는 숲길인데 이제 이 길로 다니지 않으면 풀꽃나무가 길을 차지할 듯하다.
천천히 걷는데 낯설다. 저 끝에서 꺾는다. 곁님은 새로 난 길로 가고 나는 아버지가 올라간 길로 갔다. 이 길은 이미 풀이 길을 뒤덮는다. 이다음에 오면 길이 사라질 듯하다. 등성이에 올라오니 길을 판판하게 닦아 놓았다. 흙이 없는 비탈을 깎은 이 자리에 누가 또 누울 자리 같다. 새로 닦은 길에서 못 쪽에 할아버지 무덤이 있고 왼쪽 마을을 보며 아버지 무덤이 있다.
곁님이 처음으로 할아버지한테 절을 한다. 소주를 한 잔 따르고 과자를 하나 뜯어 놓고 절을 두 판 하고 바로 옆에 할머니한테도 한다. 언덕을 올라와 아버지 무덤으로 내려갔다. 지난해는 달맞이꽃이 노랗게 피었는데, 무덤을 덮는다고 약을 뿌리고 뽑아서 그런지 달맞이꽃이 사라졌다. 그런데 없던 나무가 한 그루 누가 심었다. 무덤가에 어울리지 않는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아버지한테도 소주 한 잔을 붓고 경주서 사온 황남빵을 놓고 사과 하나를 놓고 절을 두 판 한다. 무덤 잔디는 한쪽은 깎았는데 다른쪽은 잔디보다 큰 풀이 자란다. 나는 풀을 뽑았다. 잔디에 큰 풀도 뽑았다. 쑥이 자라면 잔디가 마른다. 쑥도 뽑았다. 쑥은 뿌리가 잔디처럼 깊이 뻗어서 잔디가 마르겠구나 싶다.
집으로 와서 어머니한테 여쭈니 복숭아나무를 심었단다. 열매가 좋아서 심었다지만 복숭아는 옛말에 집에도 심지 않고 제사상에도 올리지 않는다. 올리면 넋이 못 온다는 말이 있다. 어머니한테 복숭아나무를 베어 버리던지 뽑아내자고 살짝 말했다.
이 복숭아나무 때문일까, 며칠 앞서부터 내 전화기를 만지다 보면 아버지 전화번호가 뜬다. 일본에서 찍은 아버지 얼굴을 담아 놓았는데 종이로 뽑아 놓은 사진이 바랜듯이 얼굴이 닳았다. 손전화에 담긴 사진도 이렇게 빛이 바랠까, 아닌 듯한데. 엄마한테도 보여주고 곁님한테도 보여주었다. 엄마는 아버지 번호를 없애지 않고 묶어 놓았단다. 나도 아버지 번호를 지우면 끝내 아버지를 잊을 듯하다고 여기는데, 이 무슨 뜻일까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세 해 동안은 날마다 아버지가 떠오르다가 지난해부터는 아버지가 안 온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살았을 적에는 글을 몰랐다. 이름만 겨우 읽고 쓰던 아버지가 사무치기라도 한 듯 나한테 노래(시)와 글(수필)을 쓰게 돕는다고 생각했다. 복숭아나무도 그렇고 전화기에 담아 놓은 아버지 얼굴도 그렇고 아버지가 자국을 이제는 지울 때일까. 전화기에 남겨 놓은 웃는 아버지 얼굴도 다 지워야 할까. 이제는 마음으로 아버지 숨결을 그리라는 뜻일까.
2022. 05. 23.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