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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빠 5] 함박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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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엄마아빠 5] 함박꽃

 

시골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마늘논 자리에 함박꽃이 피었다. 이랑마다 까만 비닐을 씌웠다. 함박꽃 가운데 몇 송이만 빼고 한가지 빛을 띤다. 붉노란 꽃잎이 큰 잎을 발라당 뒤로 펼치고 노란 속을 드러낸다. 이 꽃은 속이 훤히 보여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꽃은 피어야지만 그래도 메아리일 적에 꽃잎을 열고 나올지 궁금해서 꽃피기를 기다린다. 그때와 달리 이제는 이 꽃이 이쁘기만 하다. 마을에 이렇게 큰 꽃밭이 있다니 ‘꽃이다, 와’ 거푸 놀란다.

 

꽃밭에 들어갔다. 한 걸음씩 다가서서 꽃내음을 맡는다. 냄새는 나지 않네. 넓적한 잎을 살포시 비벼 보고 다시 냄새를 맡는다. 꽃내음이 바람 따라 어디로 갔는지 어린 날 맡던 옅은 냄새가 콧구멍으로 몰려든다. 바람이 제법 분다. 둘레에도 꽃이 있나 휙 둘러본다. 어린 날 아랫마을을 지나 배곳 가던 옛길에 물이 흐르는 언덕에 심어 놓은 함박꽃을 늘 눈여겨봤다. 그곳 꽃은 감빛 꽃과 달리 속이 꽉 찬 엷붉은 빛을 띠고 곱다. 눈치 살피고 몇 송이 꺾어 학교에 들고 간 일이 있었다. 당번이라 선생님 책상에 꽂았지 싶다.

 

밭에서 키우는 꽃은 꺾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듬성듬성 막 피어나는 꽃은 활짝 피우지도 못하고 꺾이면 얼마나 시름에 빠질까. 겨울 동안 차가운 땅속에서 웅크리고 밖으로 나오기를 바라던 마음을 꺾어 버린 듯했다. 그 밭둑을 지나오는 날은 열다섯 살 어린아이, 바닷가로 나들이(수학여행)를 가는 날 아침에도 작약밭에 기웃하던 얼굴이 꽃처럼 흔들리며 떠오른다.

 

이제 어른이 되어 다시 보는 작약, 못난이꽃이라고 꺾지 않았던 자주빛 꽃밭에서 서성인다. 이랑에 들어가 바람에 한들거리는 작약꽃을 본다. 큰 꽃잎이 이렇게 방긋방긋 웃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동안 얼마나 붉은 줄기를 올리며 꽃봉오리를 맺었을까.

 

작약은 꽃망울이 맺을 때 갈림길에 선다. 꽃이 피면 뿌리가 덜 자란다는 까닭일까. 작대기에 칼날을 달고 마늘쫑 싹둑 자르듯 꽃망울 목을 쳐버린다. 그런데 이렇게 함박꽃을 피우지 않는가. 꽃이 활짝 피어야 뿌리도 꿈틀거리고 흙을 더 깊이 넓게 뿌리를 내리는 꽃마음을 읽었을까. 이랑에 한두 잎 떨어진 꽃잎이 더 쌓일 때면 다음해를 내다보는 꽃잎이 붉은 눈물을 떨구고 기꺼이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이슬 같다.

 

이렇게 네 해를 거듭나면 작약 뿌리를 캔다. 몇 벌씩 꽃이 피고 베이는 봄을 보냈을까. 봄에는 꽃이 목숨을 따고 또 한 철이 넘어가면 말라 쓰러지기도 하고, 그래도 꼿꼿이 마른 줄기로 버티면 또 잘린다. 뿌리만 남아 봄햇살에 뿌리가 간질간질하면 붉은 새싹이 또 내민다. 어제 잃은 목아지를 잊고 다시 환하게 웃듯 피어나는 작약꽃이 씨앗을 맺는 힘을 뿌리가 크도록 기꺼이 꽃은 목숨을 내놓았다.

 

다섯 해를 넘기면 뿌리는 차츰 썩어 간다. 땅속에서 삶도 꽃과 다르지 않고 작약도 땅이 기름지면 뿌리가 굵고 안 좋은 땅에서는 뿌리도 닮아 안 좋고 꽃 피운 자리마다 뿌리도 다른 길을 맞는다. 네 해 동안 꽃을 피울 틈과 뽑히는 때가 와도 꽃피우는 그때만은 온몸을 열 줄 아는 작약꽃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여태 미운 꽃으로 보았는지 어린 마음으로는 알지 못했다.

 

내 하루는 어떠할까. 나도 꽃인지 모른다. 풀과 꽃이 한몸이 되어 분홍꽃 붉은꽃을 환하게 피우며 웃는 모습처럼 어느 뜰에 핀 꽃이 무엇이고 또 무엇인지 따져서 무엇할까.

 

몇 해를 담금질을 한 끝에 뼈저리게 아파도 부푼 마음이 뿌리에 스민다. 햇살을 견디고 달빛을 부르고 별빛이 소곤대는 이야기를 들으며 맑은 바람과 노래를 골라 누리는 사이에 뿌리는 한껏 쓴맛에 모든 길을 녹여낸다. 우리 삶이 씁쓸할 때 제 마음처럼 어루만지는가. 하나같이 사람을 다스리는 빛이 되겠지. 이튿날 숨이 멎더라도 이렇게 꽃은 함박웃음 피우며 이 하루를 넉넉히 사는 길을 배운다. 온누리 모든 풀꽃이 이렇게 새삼스레 다른 뜻을 담고 확 피었다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2022. 06. 20.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