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1] 연꽃
몇 해 앞서 반야월 연꽃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벼가 한창 익은 가을이었다. 이미 연꽃은 지고 뿌리를 캐는 밭이었다. 열매가 송송 박힌 연이 꽃만큼이나 소담스러웠다. 물이 말라 논바닥을 드러내기에, 연대를 꺾으러 논둑을 밟고 깊이 들어갔다. 진흙이 미끌미끌하다. 철퍽 미끄러졌다. 발이 푹푹 더 빠질 듯해서 그만 나왔다. 그런데 허리에 묶은 웃옷이 사라졌다. 미끄러지면서 잃어버린 옷을 찾으러 다시 가려다 그만두었다.
그때는 너무 늦게 가서 꽃을 못 보았고, 오늘은 이르게 가서 꽃이 아직 피지 않았다. 건너편 담벼락 언저리이면 꽃이 피었을까.
두 잎을 맞물고 돌돌 말아 나오는 잎도 있고 좀더 펼친 잎도 있다. 이렇게 잎이 다 펼치면 꽃이 올라올 테지. 커다란 잎을 깊고 오목하게 펼치기도 하고 납작하게 펼치기도 한다. 잎에 앉은 물방울이 구슬처럼 구른다. 잎이 축 처진 곳까지 가다가 바람에 잎이 흔들리자 어지럽게 구른다. 넓은 잎이 바람에 쓸려 막고, 뒤에 있는 큰 풀도 여러 잎을 구부려 바람을 막아 준다. 햇볕에도 사라지지 않던 물방울이 바람에 쉽게 떨군다.
두 손을 모은 듯 봉우리를 내민 꽃을 만난다. 바람에 잎이 날리자 더 큰 꽃봉우리가 있다. 꽃잎이 조금 열렸다. 별빛을 먹고 일어나 아침이슬을 며칠 받아먹고 한낮에 뜨거운 해가 보듬으면 이내 활짝 필 듯하다. 씨앗하고 꽃이 한꺼번에 피어나고 씨앗 주머니가 노랗게 빛을 품고 나왔다가, 꽃잎이 한두 잎 떨어진 연꽃을 머릿속에 그린다. 참 곱다.
연밭을 보니 어떤 자리는 까맣다. 잎이 우거진 곳이다. 어떤 자리는 개구리밥이 푸르게 뒤덮는다. 잎이 듬성듬성 났다. 다른 논에는 물이 맑다. 논바닥이 훤히 보인다. 이 자리도 연잎이 듬성듬성 났다. 모를 심은 논처럼 물이 찼지만, 물빛이 사뭇 다르다. 어린 모는 사이사이 비워 두어서 물에 잠긴 흙도 해를 먹네. 연밭에는 잎이 넓어서 해가 들지 못하니 흙이 검네.
물이 연잎에 닿아도 자국이 남지 않고 굴러떨어진다. 흙이 빛을 못 보아서 검을 텐데, 빛과 그림자로 보여주며 물들이지 말라고 한다. 연꽃이 활짝 피어나면 이 내음에 물냄새가 사라지고 둘레를 밝히는 꽃이다. 풀꽃이나 나무에서 피는 꽃과 달리 물에서 태어나는 연꽃은 진흙과 빛으로 온누리 숨결을 들려주는 듯하다.
연잎을 조금 떼어 입에 넣었다. 풀냄새가 거의 안 난다. 나무도 아닌 부드러운 줄기가 큰잎을 떠받든다. 연잎을 혀에 얹어 보았으니, 내 몸에도 연잎빛과 연꽃내음이 스밀까. 내 마음에도 연잎 숨결과 연꽃 숨빛이 스며들기를 바란다.
2022. 06.10.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