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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삶 12]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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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 삶 12] 능소화

 

라면을 먹을까 하고 물을 채우는데, 곁님이 일꾼하고 밖에서 먹고 오란다. 그동안 밥때를 넘기고 집에 가서 먹는데 모처럼 밖에서 먹는다. 가랑비가 그치고 담벼락 따라 걷는 마음이 산뜻하고 가볍다. 김밥집 바람갈이(환풍기)가 시끄럽게 돌아가고 바람에 나무가 흔들린다. 벌써 능소화가 피었네. 바닥에는 꽃이 떨어졌네. 이 길로 차를 몰고 다녀서 못 보았구나.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에도 꽃을 피우다니. 꽃은 참 놀랍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꽃을 피우고 볕이 따가워도 웃으며 춤춘다. 가지 끝에 피어난 꽃은 바람이 살짝 건드려도 통통 튄다. 숨막힐 듯한데도 어쩌면 고이 옷을 입고 흐트러지는 빛도 없을까. 하나가 필 적보다 다섯여섯 송사리로 피어나니 더 곱다. 이렇게 곱고 예쁜 꽃이라면 하늘을 섬기는 마음을 품겠지.

 

요즘 나는 붉은 꽃이며 열매에 눈이 간다. 내 몸을 버티어 주는 가슴을 닮은 꽃을, 온몸을 돌고돌며 숨을 살리는 핏빛을 닮은 열매를 자주 들여다본다. 꽃도 과일도 물을 입히는, 씨앗이 빚어내는 빛으로 숨결을 빚는다. 내 몸에서 터지려는 붉은 기운을 가라 앉히기도 하고 먹거나 닿으면 싱그럽게 붉은 기운을 주는 둘이 함께 빛에 숨었다.

 

능소화 꽃빛이 꼭 핏빛 같다. 장미나 동백처럼 새빨갛지는 않으나 부드러운 핏빛 같다. 이 빛깔을 몸으로 품은 어머니가 아이를 낳지.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능소화를 먹으면 몸에 좋다는 줄 뒤늦게 알았다. 꽃잎을 달이고 뿌리도 달여서 먹으면 몸에 좋다더라. 그런데 꼭 입으로 먹어야 할까. 굳이 먹지 않고 바라보기만 해도 좋으리라. 능소화는 이를 다 알고서 내 앞에서도 활짝 웃는지 모른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 사붓사붓 걸어오는 발소리에 꽃잎이 살짝 떤다고 느낀다. 바람이 놀다 가고 햇빛이 놀다 가면 어둠이 와서 쓰다듬고 별빛이 내려와 놀고 밤빛도 내려오고 우리가 안 보는 틈에 능소화가 사랑을 듬뿍 받는다. 이 사랑스러운 능소화 곁에 얼굴을 맞대고 서 본다. 바쁘게 가지 말자. 좀 쉬다가 가자. 꽃 볼 틈도 없이 바쁘면 이 삶이란 뭔가. 숨을 돌린다.

 

김밥을 먹을까, 다른 뭘 먹을까. 한 그릇 받은 밥이 많아 차곡차곡 덜어내 보니 한 사람 먹을 만큼 모인다. 따로 담는다. 함께 밥을 먹는 이는 능소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단다. 꽃도 처음 보고 꽃이름도 처음 들었는지 두 판이나 묻는다. 일터로 돌아가며 생각한다. 이튿날은 일을 좀 일찍 끝내고 꽃을 또 보러 와야겠다. 벌써 새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담벼락 따라가면 꽃도 있겠지..

 

2022.06.14.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