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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삶 14] 하늘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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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4] 하늘바라기

 

여름숲이다. 싱그럽다. 맑다. 나무도 푸르고 온통 풀빛이다. 흙을 움켜쥐어 본다. 풀이 뒤덮은 이 땅이 바로 별이라고 새롭게 느낀다.

 

어린 날 모깃불 피워 놓은 마당에 누워 놀던 캄캄한 하늘은 놀이터였다.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면 한 사람 숨결이 멎는다고 들어서 슬퍼하다가도 별자리 찾기 놀이는 자장노래가 아닌, 우리 눈을 더 초롱초롱 밝히는 가락이었다. 밤에는 별바라기를 하고, 낮에는 잔디밭에 누워 구름밭을 보았다. 칠월이 되니 구름 틈새로 보이는 하늘빛이 환하다.

 

숲에 드니 소리가 한껏 몰려온다. 매미도 질세라 목이 터지도록 한 가락 길게 읊는다. 이 울음이 떨림으로 오기까지 오직 사랑을 믿고 깨어났을 테지.

 

바람이 조용하다. 앉아서 쉬어도 조금 덥다. 앉고 싶어 멈춘 내게 곁님이 놀이를 하잖다. 아까시 줄기를 따서 건넨다. 곁님이 잡은 잎은 열셋, 내가 잡은 잎은 열일 곱인 줄 뒤늦게 알았다. 가위바위보를 하는데 곁님이 자꾸 이긴다. 주먹 다음에 가위를 내는지 보 다음에 주먹을 내는지 머리를 굴린다. 져도 한꺼번에 잎을 날린다. 나도 이 사람이 주먹 다음에 가위를 내는 줄 알았고 보 다음에 주먹을 내는 줄 알고 머리를 썼다. 잎이 더 많았지만 내가 이겼다. 나는 생각 없이 손을 내밀다 이겼고, 이 사람은 꾀를 부리다 졌다. 이제 쉬었으니 오른다.

 

소나무숲을 빠져나오니 꽃밭이다. 달걀꽃이 하얗게 길을 낸다. 깊이 들어갈수록 나무가 없고 풀이 우거졌다. 노란 달맞이꽃에, 하얗고 붉은 접시꽃에, 싸리나무 닮은 큰낭아초 감태나무에 맺힌 둥근 꽃망울에, 매꽃 으아리꽃 멧딸기 토끼풀 칡은 나무를 감고 풀을 감고 꽃을 감고 땅을 뻗으며 끝은 하늘을 보며 서로서로 섞여 자란다. 멧자락이 탁 트인다. 풀밭을 걷다가 생각한다. ‘제주도 오름길 부럽지 않구나.’ 풀밭을 헤집고 참나무 곁으로 풀이 적은 자리에 돗자리를 깔았다. 등짐을 베고 눕는다.

 

돌멩이 하나가 등을 찌른다. 이 돌도 모래를 품고 흙을 품었을 테지. 불길도 품고 비바람도 품었을 테지. 하늘에 두둥실 뜬 구름 못잖게, 돌멩이가 품은 부드러운 마음을 헤아리다가도, 자꾸 등이 쑤셔서 자리를 들고 돌을 빼낸다. 다시 등짐을 베고 눕는다. 구름이 멈춘 듯하다. 송이구름 같기도 하고 틈새구름 같기도 하고 양털구름 같기도 하다. 구름과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고 맑다. 이 구름이 오늘은 햇볕을 가려 주는구나 싶더니, 참나무 잎사귀 사이로 햇살이 든다. 자리를 조금 옆으로 옮기고 다시 눕는다.

 

곁님은 구름을 보다가 눈을 붙이는가. 조용하다. 구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또 보아도 흩어지지 않는다. 바람이 없어 그렇구나. 얼마나 지났을까. 구름이 안 바뀌는 듯하더니 천천히 바뀐다. 구름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느리게 바뀌는 사이 하루가 멈춘 듯했다. 저 구름을 생각했다가 구름 틈으로 보이는 깊은 하늘에 빨려들었다. 문득 곁님한테 말했다.

 

“여보, 우리 둘 가운데 누가 오래 살겠어요?”

“뭐, 니가 오래 살지.”

“뻣뻣하고 억지 센 그대를 데리고 가서 어떻게 부려먹겠어요. 더 나긋하게 맹글어서 데리고 가겠지. 말 잘 듣는 나를 먼저 데리고 갈 걸”

 

이 말을 하고 나니 마음이 야릇했다. 저 넓고 넓은 하늘 밑으로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기나 할까. 그 무엇으로 태어나도 서로가 알아보지 못하겠지. 산 밑으로 보이는 높은 집에서 창문조차 보이지 않는 작은 집안에서 듣기 싫은 말만 내뱉기만 했을까.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은 또 얼마나 해봤을까. 처음 만났을 적부터 사랑이라는 말은 할 줄을 몰랐다. 어쩌면 사랑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했는지 모른다. 나무라는 말씨에 대드는 말씨가 사랑인 줄 잘못 아는 굴레에 갇혔는지 모른다. 저 넓고 넓은 하늘에 내가 펼쳐 놓을 사랑이며 삶이 양털구름 한 조각도 안 되는구나.

 

“이다음 어느 별에 갈까요?”

“...”

“아마 그대는 일 많이 하니 일꾼을 다스리는 별에 갈 거야. 난 고요별로 갈 거야. 술 많이 먹는 사람이 가는 별이 있고 저마다 가는 별이 있어.”

 

숲에 오면 내 말을 듣는 이 사람, 나무에 기대 앉아 무엇이라도 쓰고 싶다. 그래 보라고 한다. 짐에 넣어둔 수첩을 꺼내 준다. 멍하니 보고는 한마디 들려주는 생각을 끊지 않았다. 걷다가 이야기하다가 문득 수첩에 적어도 가만히 기다려 준다. 여느 때와 다르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조금씩 뒷받침을 해준다고 느꼈다. 말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곧 펴낼 노래책(시집)에 넣을 내 사진을 본 어느 날에는, 내 사진을 액자에 담아 피아노에 올려두란다.

 

하늘을 보면 하늘로 빨려든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이름, 눈을 뜨면 떠오르는 이름. 어떤 사람이 나를 떠올려 줄까. 내가 떠올릴 사람은 있기나 할까. 구름처럼 떠다닐 외로운 넋을 떠올린다. 그러니 이 하루 헛되게 보내지 말자. 함께 가는 우리 끈이 다 할 때까지 못 다한 사랑을 하고 주지 못한 사랑을 다 주어야지. 돗자리 옆에 아등바등 작은 개미를 보며 작디작은 솔방울을 안고 가는 메뚜기를 보면서 목을 축이는 이슬방울을 보면서 달그락거린 마음을 찔끔 나오는 눈물로 헹군다. 그래도 어디 작은 별이 하나 있다면 이 사람을 선뜻 데려갈까.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아야겠다. 몸을 두고 갈 적에는 저 하늘만큼 사랑과 노래와 글로 채우고 싶다.

 

2022. 07. 03.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