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5] 하얀옷
네거리에서 문득 아는 언니가 생각났다.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목소리에 힘이 없다. 입맛이 없어 이것저것 넣어 김밥을 말았단다. “주말 보냈고?” 묻길래, 그제 용암산에 올라, 누워서 하늘바라기하고 시를 썼다고 했다. “둘이 마음 잘 맞아가고 시인 길도 잘 가고 있다” 한다. 다 언니한테 좋은 기운 받아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렇제, 착하게 살아서 좋은 사람이 오는 거다”
언니 말에 부끄럽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 아닐지도 모르는데도 언니는 착하게 보았을까.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없는 내게 언니는 언제나 따뜻하게 손을 잡아준다. 곧 노래책(시집)이 나오는데 사람들 앞에 내놓아도 될지, 내놓고 손가락질이나 먹지 않을지 걱정하면 힘을 보태준다. 문득 혼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으면 언니한테 전화한다. 이럴 적마다 길을 가르쳐 주고 내가 잘못 생각하는 일은 나무란다. 언니 같고 엄마 같고 스승 같다.
씩씩하던 목소리가 어찌 힘이 없길래, 점심때 만나자고 했다. 서문시장에 옷을 찾으러 갈 일이 있다고 거기서 국수 먹자고 했다. 계단 밑에서 국수를 파는데 마침 쉬는날이다. 되돌아 나오는데 다른 집에서 국수를 먹고 가라고 손짓한다. 한 집 지나자 또 손짓해서 앉는다. 서문시장은 언니와 몇 걸음 했지만, 어디가 어디인지 아직도 모른다. 언니가 넋을 똑바로 안 차린다고 한소리 하는데도 아무렇지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길바보인 줄 알고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그냥 언니 믿고 애써 길을 알려고 덤비지 않았다.
시장바닥 사람을 구경하면서 옆 건물에 있는 ‘백작’이라는 옷가게에 갔다. 이름처럼 하얀 옷이 걸렸다. 하나같이 천이 보드랍고 자꾸만 눈길이 간다. 언니는 엉덩이를 덮는 긴 블라우스를 미리 맡겨 놔서 내 옷을 골라준다. 어찌 언니가 골라 준 옷이 다 마음에 든다. 하얀빛이 이렇게 깨끗할 수가. 나도 이 하얀옷을 입고 싶었다.
목깃이 정갈한 것도 고르고 민소매도 둘 고른다. 걸쳐 입을 앞이 트이고 허리 끈을 묶는 옷도 고르고 허리에 걸치는 부드러운 겉옷도 집는다. 이 치마에 어울릴 꽃으로 수놓은 신도 골랐다. 언니와 옷집지기는 허리에 끈을 묶는 길도 알려준다. 가슴이 패인 치마는 어깨금을 조금 줄이면 딱 맞을 듯하다. 줄여서 입게 옷핀을 꽂아 달라고 했다. 옷 하나 고르고 값을 깎고 또 고르고 깎은 옷값이 육십만 원이 넘는다. 만오천 원을 빼준다.
이제 돈을 너무 많이 쓴 듯해 걱정스럽다. 두 언니는 집에서 놀 적에 백화점에 가서 사면 옷 하나에 이 값보다 비싸다고 한다. 그동안 애써 일했는데 나한테 이만큼은 해도 된다고 거든다. 그래, 곁님도 내가 사진을 찍을 적에 옷이 없어 열 해도 더 묵은 옷을 입은 줄 아니, 이쁜 옷을 사면 속으로는 좋아할지도 모른다. 책을 사고 배움 삯을 주니 옷에는 그다지 눈길이 가지 않았다. 이쁜 옷을 산들 내가 하는 일이 어설퍼서 입을 틈도 없다. 곁님한테 꾸중을 들을 판인데도 좋아할지 모른다는 생각만 했다. 이 옷을 입고 다니면서 하고 싶은 일이 떠올랐다.
스물 살에 이 사람을 만나 사랑다운 사랑을 하지도 못했다. 군인이었다가 학생이었다가 직장을 다녔지만, 멋있게 만나서 돌아다닌 일이 없다. 은행잎이 노랗게 떨어지던 늦가을에 동무들과 하회마을 부용대 곁에서 배를 탔고, 개나리꽃이 피던 봄날에 민속촌 거리를 같이 다닌 일만 생각난다. 대학생처럼 보내지도 못하고 일찍 집안을 꾸리다 보니 이때 못한 사랑을 하고 싶다. 옷을 이쁘게 입고 다시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 그제처럼 멧골 풀밭에 누워 하늘바라기 하듯이 그러고 싶다.
아마 밖에서 만나면 이 사람이 깜짝 놀라려나. 작은딸이 시집을 가는지 내가 가는지 헷갈리지는 않을는지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다가오는 일요일에 산에 가지 말고 바닷가나 어디 좋은 곳으로 놀러가자고 졸라야겠다.
2022. 07. 05.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