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7] 오누이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올 적마다 그림자처럼 그 사람한테 어떤 말이 붙어 온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가씨 학생 어린아이를 따라오는 말, 목소리와 몸짓과 옷차림새에 따라 늙은 말 젊은 말 맑은 말이 가게에 들어온다. 오늘 따라 이 사람들 나이에 어울리는 물건을 찾아 구석구석 다니고 뒤따라온 말이 우리 물건에 숨결을 넣고 시렁을 흔들어 깨우는 듯했다. 사람과 물건과 말이 함께 숨을 쉬는 듯하다.
가게에 있는 큰 냉장고는 문이 없다. 여름에 찬바람을 돌리지 않지 않아도 차다. 소름이 돋고 추워서 팔짱을 끼고 손바닥으로 살을 비비는데, 어느새 두 아이가 내 앞에서 얌전하게 두 손을 배꼽에 얹고 절을 한다. 누나는 잠옷 치마를 입었다. 풀밭에 기린이 있고 커다란 풍선이 하늘을 날고 파란 구름이 담긴 가방을 들었다. 살결이 뽀얗고 하얀 웃옷과 방긋 웃는 얼굴이 깃든 복숭아빛 치마가 곱다. 동생 손을 꼬옥 잡았다. 두 아이한테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초콜릿을 골라 가방에 담고 아이스크림을 둘 고르고 과자도 고른다. 누나가 내게 쫓아와서 ‘안성탕면이 어디에 있어요?’ 묻는다. ‘맨 끝 골목 끝에 있어. 한자로 적혀서 얼른 못 찾았나?’ 하고 뒤따라갔다. 알록달록 쌓인 라면이 많아 얼른 눈에 띄지 않았을 테지. 낱 봉지를 먼저 손짓하고 모퉁이에 쌓아 놓은 묶음도 손짓으로 알려주었다. 한참 생각하더니 묶음을 든다. 이제 가방에 담은 과자를 내 앞에 와서 쏟아붓는다. 나는 하나하나 찍고 아이는 가방에 차곡차곡 담는다. 묶음 라면은 들어가지 않네. ‘이건 동생이 들고, 가방은 누나가 들고 가거라’ 했다. 누나가 오른쪽 팔에 가방을 걸고 뒤를 힐끗 보면서 한 계단 두 계단을 내려가고 동생이 한 걸음 뒤따라 내려오자 동생이 라면묶음을 든다. 왼손에 들고 가슴에 안고 가방이 걸린 오른손으로 손바닥을 하늘이 보이게 펼친다. 동생이 왼손을 올려 누나 손을 잡는다. 말은 하지 않아도 누나가 이끌고 동생이 걸음을 맞추고 나란히 손잡고 또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은 하늘빛 맑은 말과 해가 뿜는 따뜻한 말이 길에서 까르르 웃으며 사붓사붓 뒤따르는 듯하다.
우리 아이들이 다 크고 나니 어린아이들 보기조차 힘들다. 배움터에 안 가는 날이라서 그런가. 심부름도 하고 장보기도 배우는 두 아이 모습이 티끌 하나 묻지 않아 보였다. 내게도 저런 날이 있었나. 아버지 물심부름을 해야 하는데 캄캄한 밖이 무서워 동생하고 같이 갔다가 들어올 적에는 서로 먼저 들어오려고 옷을 당기고 물러나고 또 당기고 한 대 때리고 앞다투었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도 이 아이만 할 적에는 서로 업어 주고 허리를 구부리고 키를 맞추고 손잡고 잘 데리고 다녔다. 열 살까지는 아이들이 하는 말이며 몸짓이 가장 맑았다.
자라나면서 사랑을 더 차지하려고 시샘을 하고 일러바치고 제 앞가림을 한다.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면서 알아버린 일이 늘어났다. 그렇지만 두 아이처럼 맑은 모습은 몇 날 더 있기도 있다. 처음 바깥(사회)으로 나아갈 때, 짝을 만났을 때, 첫 아가를 낳았을 때가 아홉 살 누이와 일곱 살 동생인 이 아이들처럼 손잡고 사랑하는 사람 손을 잡는 모습 같다. 두 아이가 걸어가는 모습이 예쁘고 우리 딸이 짝을 만나 눈을 마주하며 웃는 모습도 마치 이 두 아이와 겹치고, 서로 많이 알아버리기 앞서 가장 마음결이 곱다고 생각한다. 이 예쁜 모습에 구름마저 파랗고 구름에 숨은 무지개가 스스로 나와서 두 아이 두 사람 뒤에 빛을 뿜는 듯 맑게 마음빛이 흐른다.
사랑이란 씨앗이 이처럼 고운 얼굴이 아닐까. 마음을 주고 마음을 받고 싶은 셈도 하지 않고, 발라당 까지거나 두려운 사랑도 아닌 하늘빛을 생각한다. 오누이처럼 손잡아 줄 사람이 다섯 아니 세 사람, 아니 한 사람만이라도 둘레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동무도 되고 시답잖은 이야기도 들어 주고 뭘 바라지 않고 홀리지도 않는 누이처럼 지켜주고 함께 자라나는 삶으로 나란히 걸어가는 오누이를 그린다. 눈뜨면 사라지는 이슬 같은 이야기여도.
2022. 08. 01.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