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24] 문 닫기
가게에 일 나가기 싫은 날이 가끔 있다. 한두 가지를 손질하려고 가자니, 씻고 차려입기가 귀찮다. 모자를 눌러 쓰고 간다. 어제 받아들인 조선 단배추 세 단과 조선 열무 넉 단을 담아 계산대에 주고 오늘은 물건만 싼다.
파프리카가 올랐네. 값만 붙여 자리에 올린다. 잘라 놓은 양배추가 아무래도 적어 보여 반쪽 잘라 놓은 양배추를 또 잘랐다. 바나나는 비닐을 빼서 다 꺼낸 뒤 칼로 반을 자르고 그릇에 담아 싸면, 곁에서 저울에 올려 값종이를 뽑아서 나란히 갖다 놓는다. 토마토는 다섯씩 싸면 좋겠는데, 서로 부딪히면 무를 듯해서 넷을 어긋 담는다. 참다래도 넷씩 담는다. 당근을 둘씩 싸고 옆에서 저울에 올려 값종이를 뽑아서 붙이고, 마늘을 한 자루 뜯어 일곱 그릇에 똑같이 저울에 달아서 담았다. 이래저래 싸기만 했더니 빨리 끝난다. 열두 시가 안 된다. 혼자 집에 가자니 어쩐지 눈치가 보인다.
과자가 빈 자리는 새 통을 뜯어 채우고 당긴다. ㄹ과자는 뒤쪽이 텅텅 비었다. ㄹ과자 회사에서 밀어넣기를 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많이 넣지 못하게 한다. 사탕도 푹 줄었다. 겹겹 쌓인 사탕을 반 내려 빈자리에 채운다. 간장이 아직 안 들어왔네. 빈자리를 찍어 보낸다.
ㅂ에서 물건이 잔뜩 들어왔다. 길마다 상자를 놓았고, 빈 상자까지 있어 다니기 나쁘다.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상자를 올려두었다. “아지아, 빨리 여기부터 좀 치워래이. 아이스크림도 팔아야제” “네, 사모님” “언니야, 빈 상자 접어서 치우면서 해요. 손님이 지나가게.” 내 말이 끝나자 저쪽에서 “아따 사모님 또 그러네” “글체, 내가 여기 있으면 말이 구겨져” “사모님은 고상할 듯한데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이니더” 한다. 이렇게 거칠고 큰 소리로 말 할 적에는 내가 글을 쓴다는 일을 숨기고 싶다. 일하는 사람하고 따로 노는 듯 보여 부끄럽다.
뒷일은 맡겨 놓고 나온다. 옆집 고기칸을 지나면서 창을 보니 아저씨가 고기를 손질한다. “동영상 보고 부모님 생각나서 혼났어요. 잘 봤어요” 한다. “도장을 안 갖고 와서 찍지 못하는데, 시집 드릴까요?” “작가 이름만 써도 좋다”고 한다. 한 자락을 꺼내어 고기 저울 옆에서 아저씨 이름을 위쪽에 적고 내 이름은 밑에 적는다. 자루에 넣어 드린다. 고기칸 아저씨가 곧장 꺼내어 보시려 하기에 “나중에 보세요” 하고서 돌아나오려는데, 아저씨는 고기를 언제 꺼내 놓았는지 소고기 국거리를 한 줌 준다. “책 한 권 드리고 고기 이만큼 얻어 가면 어떡해요” 아저씨는 그저 끄떡끄떡하고 손짓하며 잘 가라고 얘기한다. 고기를 자주 얻어 먹어서 부끄럽다.
오늘은 밥때에 밥을 먹는다. 국거리를 조금 꺼내 살짝 볶는다. 그사이 전화가 두 통이나 왔다. “전화 했네” “어제 깨 못 찐 거 오늘 찌러 가야겠네” “왜” “안동은 해가 쨍쨍 났다고 아부지가 오라고 하네. 벌써 조금 낫으로 벴다고 하네. 니가 이따 바꾸면 돈통 채우고 빠진 물건 좀 채우고 가 보내고 문 좀 닫아라” “몇 시쯤 가면 될까” “오전 반한테 돈통 빼고 정산하고 가라고 했으니 그 뒤에 가라. 참, 오늘 채현는 아파서 못 오고 정희가 온대이” 시골에 가야 하니 떼를 써도 안 갈 수 없으니 집에서 가게를 보다가 가야겠다.
비가 와서 그런지 얼마 못 팔았네. 오늘은 술이나 라면을 채워야 하는데, 팔린 숫자를 보니 아직 채울 부피도 아니네. 이젠 가게에 우리 둘이 없어도 무덤덤하다. 이제는 우리 둘 가운데 하나가 가게에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조금씩 버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을 믿는다. 안동으로 건너가서 밤에 불을 켜 놓고 깨를 찌는데, 나를 데리고 가고 싶다던 곁님이 시를 쓰거나 글감을 주려고 애를 쓰는구나 하고 문득 느낀다. 책 한 권 나왔다고 나를 다 드러내고, 내 시집이 책방에 깔린 뒤로 알게 모르게 돕는 듯하다. 글 한 줄로 조금씩 자라고, 그 사람도 조금씩 마음을 쓰는 듯하다. 어쩐지 멍석 깔아 놓은 듯해서 멋하지만.
2022.08.16.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