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29] 맑음
‘맑음’은 내가 나한테 붙인 첫 이름이다. 영어로 하면 닉네임일 테고, 우리말로 하면 글이름이다. 2020년부터는 내가 나한테 ‘숲하루’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맑음’이라는 글이름을 그대로 써도 되지만, 어쩐지 새롭게 둘레를 다시 바라보면서 새길을 가야겠다고 느껴서, 글이름을 새로 지으려고 했다.
처음 ‘맑음’이란 이름을 나한테 붙일 적에는 문득 마음으로 스치는 낱말을 붙잡으려고 했다. ‘맑음’이란 이름을 쓰면 스스로 맑게 살고 싶다는 꿈대로 가리라 여겼고, 맑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이 스스로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느 이웃님 글을 읽는데, 글이 참 곱더라. 비단결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분이 쓴 글을 다 뒤지며 읽은 적이 있다. 그렇지만 말은 날씨를 닮았더라. 봄이기도 하다가 바다에서 거세게 밀려오는 비바람이 떠올랐다.
어느 이웃님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싹싹하게 글을 쓰고 허튼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짧게 쓴 글을 보면 섬뜩하다. 속을 꿰뚫으려고 하는지, 어쩐지 피바람이 불고 피비린내가 퍼지는 듯했다. 그분 글은 속이 메스꺼웠다.
내가 글을 잘 안다고는 보지 않는다. 집안일을 하고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아이를 셋 낳아 돌본 아주머니로 보고 느꼈을 뿐이다. 어느 글은 사랑스럽게 다가오고 어느 글은 무섭고 어느 글은 끔찍하다고 몸이 먼저 느낀다. 피비린내가 나는 글에는 목숨을 함부로 여긴 그림자가 들씌운 듯했다. 글도 사람 못잖게 앞서 살던 얼이 담기고, 사람도 앞서 살던 넋이 하나가 아닐까.
시골에서 나고자라서 시골일을 하던 우리 아버지는 낯빛이 맑았다고 생각한다. 여태 살아오며 우리 아버지 낯빛 같은 사람을 본 일은 없다. 우리 아버지는 여든이 넘어 곧 목숨줄을 놓을 판인데도 낯빛이 맑았다. 열 해 앞서인가. 아버지처럼 맑은 낯빛인 스님을 본 적이 있다. 맑은 사람 앞에 서면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일더라. 어둡던 마음이 밝게 피더라. 죽고 싶던 마음이 살고 싶더라.
맑음과 사나움과 잘잘못을 놓고서 생각이 어지럽다. 낱말도 사람처럼 살아서 움직이지 않을까. 글에 담긴 어마어마한 보이지 않는 삶이 떨어지지 않고 그 사람 입으로, 때론 그 사람 손 끝으로 글을 거쳐 살아나고 사그라지는 삶을 보는 듯하다. 어제 읽은 글 한 자락은 하루가 지나도 메스껍다. 그분은 이렇게 뱉어내야 가볍겠지만, 그 글을 읽은 사람이 무거운 짐을 든 셈일 수 있다.
나는 글을 가볍게 쓰고 싶다. 가볍게 춤추듯 즐기며 노래하듯 글을 사뿐사뿐 날개를 살포시 펼치고 싶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 마음이 훨훨 날아오르도록 슬쩍 옆에서 북돋우는 글을 쓰고 싶다. 맑게, 숲빛인 하루를 담아, 작게 써 본다.
2022. 08. 24.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