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43] 자리
이레를 해 달 불 물 나무 쇠 흙으로 얘기하는 언니가 있다. 나는 이 언니한테서 늘 배운다. 언니는 배움끈도 높고 무엇보다 살림새가 다르다. 내가 그다지 눈을 돌리지 않았고 앞으로 돌리고 싶은 매무새를 진작 갖추었다. 멋을 부리지는 않으나 우린 밑바탕에 깔린 삶자리가 다르다.
언니하고 그리 멀지 않는 청도에 갔다. 외진 골목으로 올라가니 집이 두 채 있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온통 푸르다. 하늘빛도 곱고 하얀 구름이 가만히 멈춘 들녘에는 벼가 노랗게 물들고 밭에는 사과가 발갛게 익고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복숭아나무는 잎이 가득 푸르다. 저 건너에는 무얼 태우는지 연기가 하늘에 닿는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서 사람들이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신다. 이쪽 채로 들어오니 자리가 꽉 찼다. 두 사람씩 또는 여섯 사람씩 창가에 앉았다. 파스타를 시킨다. 내가 사려고 하는데, 언니가 산다. 차림판을 보고 “이렇게 비싸요?” 했더니, “아직 안 먹어 봤어?” 한다. 언니한테는 애들하고 딱 한 번 사 먹었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과 몇 번 먹기는 했다. 가끔 토마토 스파게티를 사서 집에서 먹기도 했다. 언니가 알려주는 ‘미나리 스파게티’를 시키고 기다렸다. 땀을 흘리는 언니가 모자를 벗는데 웃옷에 솔기가 보인다. “언니, 옷솔기가 다 나왔네요? 뒤집어 입었어요?” 묻고는, 속으로 ‘언니가 참 바쁘게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언니가 화장실에 가서 옷을 바로 입을 동안 음식을 받아 놓고 어디에 앉을지 기다렸다.
마침 부부가 자리를 뜬다. 창가로 옮기고 가방도 옮겼다. 커다란 창이 그림틀이 되고 들녘은 한 폭 그림이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만큼 살가운 그림을 본다. 파스타도 온통 푸르다. 미나리가 향긋했다. 새우 꼬리를 뱉어 놓자 언니는 ‘먹을 수 있으면 꼬리까지 먹으면 몸에 좋다’고 한다. 그 뒤로는 새우를 통째로 먹는다. 꼬리가 꺼끄럽다. 녹차 가루인가 싶더니 바질가루란다. 블루베리 크기로 잘라 놓은 알갱이가 궁금했다. “언니, 이거는 뭐예요?” “올리브잖아, 올리브 안 먹어 봤나?” “네, 처음 먹어 봐요” 처음 먹는다는 말에 언니가 또 ‘그동안 일만 하느라 못 먹어 봤구나’ 한다. 접시를 싹싹 긁었다. 기름이 남았다.
이제 자리를 옮겨 찻집에 갔다. 언니가 “가방은 이것밖에 없나?” 묻는다. “이 가방이 좋아요. 손가방은 둘 있는데, 일 갈 적에는 이게 좋아요” 했다. 오늘은 갑자기 나오느라 옷을 갈아입을 틈이 없었다. 언니는 이름있는 가방을 든다. 옷도 값지다. 요즘은 경매로 비싼 그릇을 싸 모은다고 한다. 이쁜 그릇에 밥을 먹고 ‘나를 헤아려’ 아름답고 보기좋게 살고자 한다고 얘기한다.
언니한테 나는 덜 어울리지 싶다. 나는 언니를 만나며 자리가 올라가는지 모른다. 언니 자리에서 보면 나를 만나 얻는 일보다 주는 일이 많다. 이런 것도 해보고 저런 것도 해보고 이쁜 것도 가지고 맛있는 것도 먹을 짬이 되면서 안 하고, 아니면 몰라서 안 하고, 어울릴 사람이 없어서 못 하는 일을 언니가 다 해준다. 답답하고 딱하게 볼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내 자리가 있을 테지. 멋을 모르고, 이름난 가방을 모르고, 파스타나 올리브를 몰라도, 틀림없이 내 자리가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여행은 꼭 하고 싶다. 꾸미거나 값진 가방을 가지지 못해도 아무렇지 않다. 눈길을 틔우는 이웃마을을 보고 싶다. 마음을 열라고 부추기는 드넓은 바다하고 숲을 보고 싶다.
2022. 09. 27.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