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45] 돌담집
소꿉동무하고 멧골을 오른다. 그제 못 간다고 했지만, 밥이나 먹자고 한다. 곁님이 문중에 ‘시사’ 지내러 가서 없으니 일꾼 밥만 바꾸어 준다. 쪽파를 한 단 까서 여섯 그릇에 담는 동안 일꾼이 이른 밥을 먹고 나온다. 곧 나서면 12시 반에는 닿겠다.
마을 앞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노랗게 물들었다. 길가에도 주차장에도 차가 가득찼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이렇게 많나’ 걷다 보니 마을에 잔치가 있는 듯하다. 길가에 수국꽃을 꾸며놓았다. 누가 짝을 맺는구나. 동무들이 내려오려면 좀더 있어야 하니, 마을 건너편 비스듬한 산길로 갔다. 살짝 오르막인데 오늘은 걷기 힘들다. 마을을 돌고 싶은데 참고 돌담집 뒤쪽에 통나무에 앉아 기다린다.
그늘이 추워서 해받이에 앉았다가 다시 그늘에 앉았다. 멀리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동무들이 내려왔다. 돌림앓이로 못 만났으니 두 해 만에 얼굴을 본다. 주먹으로 마주치며 아는 척하고 손을 잡는다. 무척 반갑다. 나는 술도 잘 못 먹고 말도 재밌게 하지 못하는데 낀다. 시인이라고 떠받든다. 옆에 앉은 무환이가 책값을 꺼낸다. “모두 주소 정화한테 보내라.” 시원하게 말했다. 시집을 갖고 오라는데 호찬이가 따라나선다. 주차장까지 걷는다.
마침 시집이 맞게 남았다. 느티나무 밑 돌걸상에 엎드려 쓴다. 호찬이는 쪼그리고 앉아 겉봉투에 이름을 쓴다. 글씨가 참 이쁘다. 내 글씨보다 돋보인다. 한 권씩 나눠줬다. 용주가 사진을 찍자 하고, 희수(명희)가 사진을 찍자고 한다. 시집을 들고 찍는데 꼭 뭔가 된 듯하다.
찻값은 내가 내야지 생각했는데, 못 내게 한다. 남자들이 오만원 씩 내어 밥값으로 쓰고 찻값으로 쓰고도 남았단다. 동창회 모임 할 적에도 남자보다 우리는 돈을 적게 낸다. 뒤늦게 와서 밥이나 차라도 사야 마땅한데, 틈을 안 준다. 두 이레 뒤에 동창회를 연다. “정화 꼭 와야 한대이, 니 축하하는 현수막 거는데 주인공 안 오면 안 되잖아, 꼭 온내이.” 수필을 써서 처음 이름이 오를 적에도 소꿉동무들이 케이크를 차려주었는데, 시인이 되고 시집 냈다고 또 챙긴다.
축하를 받고 싶은 다른 사람들은 안 해주고 언제나 한결같이 잘되라고 소꿉친구들이 기뻐해준다. 여느 때는 소꿉동무를 잊다가 해가 끝나는 끝자락에 이르면 도드라진다. 내가 멧골을 오르지 못하니 멧골을 오르는 동무들이 부러웠다. 예전에 다닐 적에는 몰랐는데. 내가 다닐 적에도 오늘 나처럼 부러워한 사람도 있을 테지. 자리는 자꾸 바뀐다.
내 시집을 보던 용주가 시집을 보더니 “이런 세계를 몰랐는데, 동무 덕분에 알아가네.” 한다. “뒤편에 글 읽으면 한층 앎이 높아질 거야.” 슬쩍 한 마디 보탠다. 곧 다른 시집을 읽고 다른 시인을 알면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닌 줄 알지도 모르지만, 소꿉동무한테 잘 보였으니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한다.
2022. 10. 29.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