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작은삶 62] 칼 안 쓰는 날

URL복사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2] 칼 안 쓰는 날

 

“야야, 칼 쓸 일 있으면 오늘 다 장만하거라.”

“왜요, 아버님?”

“칼 안 쓰는 날이다.”

“사과하고 배는 어떻게 해요?”

“그건 작은 칼로 도려내고, 큰 칼은 쓰지 마래이.”

 

달걀을 노른자 흰자를 따로 부쳐서 채썰었다. 무와 고기도 미리 손질해서 그릇에 담았으니 두부만 숟가락으로 으깬다. 다진고기에 참기름을 부어 볶다가 두부를 넣고 으깬다. 김 두 장을 비벼서 가루로 뿌렸다. 사과하고 배를 깎는다. 열 시쯤 되면 써도 된다고 했는데, 작은 칼이니 괜찮겠지.

 

시아버지는 절에서 받은 달력을 걸어 두고 본다. 절집 달력에 짐승이 띠이름대로 나오던데, 어떤 짐승을 보고 칼을 쓰지 말라는 걸까. 작은 칼로 깎았지만 크든 작든 칼인데 찜찜하다.

 

시어머니는 명절날이나 제사에 걸리면 미리 사과나 배도 깎아 놓고 그날은 칼을 멀리했단다. 미리 챙기는 일도 안 쓰는 일도 마음이 쓰일 텐데. 아직도 달력을 보고 몸소 따른다. 칼은 쇠고 쇠는 돌에서 나오고 돌은 흙에서 나왔을 터. 이래저래 따지면 걸림돌이 얼마나 많을까.

 

날카로운 칼은 어떤 뜻으로 삼가려나. 칼은 갈고 갈아서 무엇이든 자르고 끊는다. 잘 쓰면 이바지하고, 잘못 다루면 다친다. 살살 다루는 살림이다.

 

어제 이 말을 듣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두부를 칼로 썰지 말자, 하면서 칼을 떠올렸다. 칼을 오히려 쓰게 하는 말 같다. 입에서 나온 거친 말도 칼날이 아닌가. 첫날인데 마음씨가 뚝뚝 떨어지는 말을 했다. 조금만 참을걸. 마음이 시원하지도 않으면서 참아야 할 말을 마구 뱉었다. 마음이 널뛸 적에는 참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칼 쓰지 말라는 칼만 생각하고, 입으로는 칼날을 마구 썼다. 조금만 깊이 생각하고 말할걸.

 

 

2023. 01. 25.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