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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삶 64] 헌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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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4] 헌책으로

 

누리책집에서 내 시집을 뒤져 보았다. 새책 곁에 헌책이 나란히 뜬다. “이건 뭐지? 아, 벌써 헌책으로 나왔네! 이 일을 어째! 아직 시집을 낸 지 한 해조차 안 지났는데?” 갑자기 낯이 뜨겁다.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숨을 돌리고서 생각한다. 아니, 나도 헌책을 곧잘 사는데, 왜 내가 내 시집이 헌책으로 나왔다고 해서 낯이 뜨거워야 할까? 내가 쓴 시집이 헌책으로 나왔다면, 누가 틀림없이 읽었다는 뜻이다. 그분이 샀든 누구한테서 받았든.

 

그렇지만, 지난해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샀다. 여태 다른 사람들 책을 새책으로도 헌책으로도 사면서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새책은 새책대로 헌책은 헌책대로 그저 읽어 왔다. 그런데 나는 왜 새해 첫머리부터 헌책 하나를 놓고서 무슨 큰일이 났다고 여기는가.

 

헌책을 사서 읽어 보면 알 텐데, 기쁘게 사서 곱게 건사했다가 내놓는 헌책이 있고, 재미없거나 값없다고 여겨 버리는 헌책이 있다. 잘 읽어 준 분 손길을 탄 헌책은 이름대로 ‘헌’ 책이어도 깨끗하고, 손빛이 곱게 묻어난다. 사랑을 못 받고 버림받아 ‘낡은’ 책은 갓 나온 뒤에 헌책으로 나왔어도 어쩐지 꾸깃꾸깃하거나 때가 많이 타거나 햇볕에 바래기도 한다.

 

어제 어느 모임에 갔다. 그곳에서 누가 내 손을 잡고 부른다. 신발을 벗고 구석에 앉았다. 지난해에 낸 책을 돌리지 않아 모임사람들이 내가 어떤 책을 냈는지 모르니, 내가 책을 사고 밥자리를 마련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문득 모임자리를 휙 둘러본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인데 책을 살 줄 모르고 나더러 책을 돌리고 밥자리를 마련하라고 얘기하다니, 무슨 일인가?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서 이분들은 무슨 책을 읽는가?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이웃이나 글벗이 낸 책을 먼저 알아서 한 자락씩 사서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면서, 서로 북돋우기도 하고 아쉬운 대목을 가볍게 나무라거나 짚어 주기도 해야 서로 발돋움하지 않을까?

 

책을 내는 사람들끼리 거저로 주고받는 일이 몸에 붙었나 보다. 그런데 나는 거저로 주고받는 책은 거저로 받아도 어쩐지 읽고 싶지 않다. 아니, 거저로 주고받는 책은 글에 삶이 묻어나지 않은 듯하다. 이런 책은 새책집에 꽂혀도 사려는 사람이 아예 없지 않을까?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쓴 책을 모임사람들더러 사라고 짐을 얹기도 싫다. 무엇보다 지난해에 낸 책에는 내 어린 나날을 고스란히 드러낸 터라, 스스로 마음으로 읽고서 마음으로 나누려는 글벗이 아니라면 선뜻 그냥 줄 생각이 없다.

 

여름에 낸 시집은 몇 분한테만 드렸다. 헌책집에 나온 내 시집은 누가 사서 읽었을까? 내 시집을 사읽은 분은 무엇을 느끼고 보았을까? 내 시집을 사읽은 분한테서 느낌과 생각을 듣고 싶다. 궁금하다.

 

헌책으로 나온 내 시집을 내가 살까 망설이다가 멈춘다. 좀 두고보자. 이 헌책을 반가이 맞이할 분이 있을지 모른다. 나를 글이웃으로 만날 마음이 있을 분을 그려 본다.

 

2023. 01. 27.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