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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삶 70]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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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70] 말

 

말을 보다가 ‘아, 칼 안 쓰는 날을 여쭈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하고 생각한다.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며 손가락으로 손등을 힘껏 누르며 혼잣말을 한다. 의성 엄마가 파릇파릇한 말을 깨끗이 씻어서 썬다. 무를 먼저 썰어 살짝 바알갛게 물들 만큼만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리다가 말하고 섞는다. 엄마가 손으로 섞는데 침을 꼴딱 삼켰다. 손으로 한 입 집어 먹었다. 어린 날 먹던 맛이 난다. 말은 된장으로 무쳐야 제맛이지. 바로 먹고 싶은데 꾹 참는다. 그릇에 담아 달라고 했다. 단술도 조금 얻어 하회에 갔다.

 

시아버지도 잘 드시고 시어머니도 잘 드신다. 아버님은 “참 오랜만에 먹어 보네.”’ 한다. 이가 안 좋아서 몇 가닥씩 집어서 드신다. 나는 밥에 듬뿍 올렸다. 무치고 남은 된장을 얻어왔는데, 함께 비빈다. 된장이 많이 짜네. 그래도 말에 더 섞는다. 들고 오는 사이 무가 숨죽으니 물이 고였다. 말잎이 푹 죽어도 맛있다. 한 그릇을 비우고 한 숟가락 더 비벼 먹었다.

 

가음못을 지날 적에 보니 그 큰못이 얼었더라. 말은 깨끗한 물에만 산다던데, 얼음을 깨고 말을 쳤겠지.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말을 건져서 파니 시어른들도 잘 드시네. 하회서는 못을 보지 못했는데, 어디서 말을 건졌을까. 모레가 있는 큰내는 아닐 테고, 반듯반듯한 논두렁을 휘감고 흐르는 큰도랑일까. 아니면 이웃마을 못에서 건졌을까. 우리 아버님도 그렇고 곁님도 그렇고 서른 해나 마흔 해 만에 말을 드셨을는지 모른다.

 

고기보다 말에 젓가락이 더 간다. 어린 날 시골에서는 겨울이면 흔하게 먹던 풀인데, 이제는 고기보다 먹기 힘들다. 작은오빠도 고기는 안 먹고 말하고 비벼먹었다고 하더니, 우리 엄마가 손을 써 주어서 흔하지 않은 말을 우리 시아버지하고 함께 먹는다. 엄마 집에서 갖고 온 단술도 잘 드신다. 엄나무를 넣고 또 뭘 넣고 달였다고 하던데, 시아버지가 참 잘 드신다. 우리 엄마 보람으로 낮밥 한끼 잘 드렸다.

 

설 때 우리 집 아이들을 무척 기다리신 듯하던데, 이런저런 말로 둘러대다가 가만히 있었다. 낮밥을 드신 뒤로 목소리가 상냥하다. 무게를 잡은 듯한 낯빛도 살갑다. 시아버지는 일어나서 부엌 옆칸에서 유과를 한 상자 들고 온다. 또 하나 있다고 우리더러 먹으라고 한다. 앉았다가 또 들어가시더니, 오란다 한 상자 꺼내고, 몸에 좋다는 약이 입에 안 맞는지 또 주시네. 커피도 많다면서 한 통 주시네.

 

뒤꼍 텃밭에서 흙을 한 움큼 담았다. 비닐집 앞에는 어머니가 쓰신 기저귀를 펼쳐서 햇볕에 말린다. 뒤꼍에서 내려와 아버님이 주신 여러 가지를 싣는다. 올 적보다 곱으로 푸짐하다. 어머니 몸이 한결 가벼워 보인다. 문밖으로 나와 서신다.

 

“어머니 볕이 참 따뜻하네요. 여기 앉아서 햇볕을 듬뿍 쬐다가 들어가셔요”

 

어머니는 지팡이를 놓고 나무 발판에 앉는다. 햇빛에 눈이 부셔서 그런지 모르지만, 두 분 눈빛이 차분하다. 물끄러미 본다. 가는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자꾸 밟힌다. 이제는 누가 오면 반갑고, 가면 아쉽고, 안 가면 안 온다고 하고, 가면 왜 가느냐 묻고. 예전에는 남은 걸 드시다가 이젠 달고 맛있어야 잘 드신다. 몸이 안 좋아도 뒷밭이 있고 마당이 있어 하늘도 보고 바람도 쐬고 우리 빈자리에 하늘땅이 겨울로 채운다.

 

2023. 01. 29.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