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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삶 82] 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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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2] 싹

 

고구마에 싹이 났다. 손으로 눌러 보니 하나는 물렁물렁하다. 무렁한 고구마는 버리고 길쭉한 고구마를 씻는다. 유리병에 달린 끈을 풀고서 물을 듬뿍 담아 고구마를 꽂는다. 주둥이가 좁아도 고구마 끝이 물에 닿는다. 싹이 나니 뿌리도 나겠지. 수염도 고구마처럼 보랏빛일까. 물을 따라 뿌리가 살금살금 내려와 유리병을 꽉 채울 테지. 싹은 고구마가 썩어 갈 무렵 나려나, 싹이 나서 썩어 가려나.

 

시골에서 갖고 온 고구마는 곰보이다. 하나같이 굼벵이가 파먹었다. 이웃에 좀 팔아 보려고 갖고 왔지만, 꼴이 안 좋아서 곁님이 먹는다. 곁님은 오늘 즐거워 보인다. 일하는 자리에 와서 “니 고구마 먹고 갈래? 구울까?” 하고 묻는다.

 

곁님은 고구마를 구우러 간다. 나는 가게 일을 본다. 달끝이라 이래저래 셈값을 맞출 일이 많다. 일을 보며 자꾸 턱을 긁는다. 어쩐지 턱이 간질간질한데, 볼록하게 살이 돋고 턱 살결이 두꺼운 듯하다. 내 손이 거칠어서 그런가 했으나, 우리 고모처럼 얼굴이 두꺼워지는 듯했다. 나잇살이려나.

 

“자, 이제 군고구마 먹을 수 있나?”

“응. 먹으면서 해도 돼.”

“뜨실 때 어서 먹어라. 뜨거우니 목장갑 끼고 먹어.”

“종이컵에 담아 먹으면 돼.”

“아예 이거 끼고 먹어라.”

 

어쩐지 오늘 따라 살갑다. 끝끝내 까만 코팅장갑 두 짝을 준다. 씩 웃고는 고구마 껍질을 벗겼다. 컵에 거꾸로 넣고 다시 껍질을 벗기고는 장갑을 얼른 벗었다. 막 구워서 뜨겁다, 조금씩 먹다가 내려놓고 또 일을 본다.

 

“덜 익었나?”

“아니, 잘 익었는데? 고맙다.”

 

식혀서 먹는 줄 모르고 덜 익은 줄 아는구나. 먹기도 바쁠 텐데 말을 자꾸 건다. 모르긴 해도 어제 안동 딸이 살던 집에 가서 남은 짐을 치우느라 허리가 새콤하다고 해서 그런지 모른다. 두 팔을 뻗어 물걸레로 닦고 두 발에 마른 수건을 밟고 네 발로 다녔다. 큰 옷장 하나를 혼자서 엘리베이터에 싣는다고 놀라더니 안쓰러웠지 싶다. 오늘도 좀 쉬지 못하고 가게에 나와서 이 일에 저 일을 하고, 또 달끝이라서 여러 가지를 챙기니 안돼 보였나 보다. 그러나 곁님은 내가 해주지 않아도 잘 챙겨 먹으니깐, 마침 끼니가 되었기에 덩달아 나를 챙겨 주었을 수 있다.

 

같이 일해도 이 사람은 무얼 자주 먹는다. 마주칠 적마다 입을 오물거린다. 누가 애써 챙겨 주지 않아도 잘 먹는다. 먹을 기운이 많은 사람처럼 스스로 잘 챙겨 먹는다. 귀찮아서 안 먹는 나와는 다르다. 몸을 생각하는 만큼 먹는다고 할까. ‘아빠 곁에 있으면 굶지는 않아’ 하던 딸처럼 곁님이랑 있으면 먹을 일이 자꾸 생긴다.

 

이제 시골서 가져온 고구마도 몇 안 남았다. 싹이 날 틈도 없이 굼벵이가 파먹듯 야금야금 그 많던 고구마를 다 먹는다. 구워먹는 고구마처럼 먹은 만큼 마음으로도 말씨로도 구수한 맛이 싹틀 수 있기를 빌어 본다.

 

2023. 03. 01.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