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4] 맨발걷기
일터 앞을 지나는데 꽃잔디가 피었다. 곱다. 일터 뒷마당으로 간다. 꽃밭이다. 김밥집 뒤쪽에는 앵두꽃이 피었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라는 알림판이 있다. 이 오솔길은 마치 고양이 길 같다. 하양 분홍 진분홍 꽃잔디가 나무 밑을 덮어 물결친다. 꽃내음이 이렇게 짙던가. 냄새를 훅 들이마시고서 일터에 간다. 일을 끝내면 숲에 가자.
그제 못 본 수수꽃다리꽃이 피었다. 배꽃은 목련빛처럼 뽀얗게 피었다. 개나리꽃 반 새싹 반 틈에 온갖 꽃이 있다. 산벚나무꽃도 피었다. 비렁길을 오르니 그제보다 잎싹이 더 파릇파릇하다. 신을 벗는다. 양발도 벗어 신에 넣는다. 두 손에 신을 한 짝씩 들고 맨발로 걷는다. 숲길 어귀에는 귀롱나무가 있다. 푸릇한 잎과 꽃을 만지고 냄새를 맡는다. 멧길을 천천히 오르기로 한다. 신은 긴걸상 밑에 둔다.
마른 흙은 보드랍다. 촉촉한 흙은 시원하고 쫀득하여 발바닥에 착착 감긴다. 소나무 숲길에는 마른 솔잎이 쌓였다. 맨발로 걸으며 밟으니 부드럽다. 솔잎이 이렇게 부드러웠나. 짚신을 신으면 이럴까. 맨땅을 밟다가 솔잎을 밟으니 폭신폭신하다. 잔돌이 있어 살금살금 걷는다. 천천히 걸으며 풀꽃을 본다. 어느 풀꽃은 둥그스름하다. 처음 본다. 찔레나무에 새싹이 오른다. 새싹을 하나 잡고 “맛 좀 볼게.” 하고서 톡 따서 씹는다. 이 여린 싹에서 찔레 줄기 맛이 짙게 퍼진다. 조금 쌉싸름하네. 다시 비렁길을 살살 밟고 내려간다. 무덤이 있던 오솔길 쪽으로 풀꽃을 보러 가니 무덤이 사라지고 나무를 줄지어 심었다.
자리에 앉아 쉰다. 벚꽃하고 새싹하고 그 너머 하늘빛이 곱다. 문득 생각하니 꽃도 새싹도 하늘을 맨발로 걷는구나. 새도 맨발로 걷는다. 살랑이는 바람도 맨발로 걷는다. 오늘은 모처럼 나도 맨발로 걷는다.
다시 걷는다. 소나무숲이다. 소나무 밑에는 풀이 잘 안 자라는데, 이 자리쯤 망개나무가 있었는데 어느새 다 잘리고 없다. 잘라서 쌓아 놓은 나무가 많구나. 계단을 두고 옆길로 내리막을 걷는다. 아저씨가 길을 비켜준다. “발 다칠 텐데 맨발로 걸어요?” “아직 걸을만 해요.” 아저씨가 뒤돌아서 나를 보는 듯하다. 나무뿌리에 걸리지 않게 더 살살 내려온다.
신이 그대로 있을까. 누가 버린 줄 알고 갖고 가지 않았겠지.
내 신은 얌전히 있다. 부드러운 흙이 있는 자리에 가서 발바닥을 비비다가 촉촉하고 단단한 흙바닥을 비비다가 누런 흙에 발을 비빈다. 뒤꿈치가 거칠어서 여름에도 양말을 신어서 가리는데 흙을 밟으니 부끄럽지도 않다. 양말을 뒤집어서 발바닥을 쓱싹 닦고 다시 뒤집어서 발에 꿴다. 이제 신을 신는다. 신이 이렇게 무거웠나. 새삼스럽다. 맨발로 흙을 밟거나 솔가리를 밟을 적하고, 발에 신을 꿴 채 밟을 적하고 확 다르다. 신이 묵직하다.
숲을 빠져나와 자주 가는 아파트 샛길로 들어간다. 명자꽃 동백꽃 수수꽃다리 벚꽃이 모였다. 바람이 불자 벚꽃잎이 하늘을 난다. 눈발 같다.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 손에 가득 담아 보고, 명자꽃도 손에 놓아 보고, 수수꽃다리도 손에 올려 본다. 겹벚꽃이 도톰하게 피었다. 눈이 한 움큼씩 가지에 붙은 듯하다.
꽃에 묻힌 하루이다. 활짝 피었다가 떨어지는 꽃은 향긋한 냄새를 남기고 어디로 가는가. 꽃하고 봄이 느긋이 머물면 좋겠다. 이튿날도 모레도 글피도 꽃을 다시 만나고 싶다. 맨발로 흙을 밟고 싶다. 올해는 봄이 일찍 온 듯싶다. 꽃이 일찍 핀 듯싶다. 일터에서는 해를 못 보니 아직 썰렁한데, 밖은 여름에 들어선 듯하다.
2023. 03. 29.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