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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삶 92] 커피포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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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92] 커피포트 있어요?

 

쓰레기터에 비닐을 따로 담는 자리가 없다. 규격 봉투에 담아 버려야 한다니 다시 꺼내 담았다. 가구와 가전만 남기고 짐을 다 들어냈다. 음식쓰레기를 버리려는데 열쇠를 안 갖고 왔다. 비밀번호도 몰라 우리 딸이 갖고 오는 동안 경비 아저씨는 우리가 내놓은 짐을 치우면서 “커피포트는 없어요?” 하고 묻는다.

 

“버렸는데요?” 저쪽 한자리에 있는지 아저씨와 찾았다. 집에 둔 듯했다. “그럼 전자렌지 같은 거는 없나요?” “있어요. 집에 있는데 내일 짐차가 와서 싣고 가는데 갖고 가세요. 말짱한데 안 닦아서 지저분해요.” 지저분해도 좋다고 아저씨가 집까지 따라왔다. 컴퓨터와 같이 버리려고 그 방에 둔 커피포트를 건네주고 전자렌지도 꺼냈다. 내놓은 그릇을 아까는 어디에 따로 비닐에 담아서 버리라고 하더니, 어쩐지 상자에 담아 버리라고 한다. 나는 그냥 버려도 되는지 되물었다.

 

그릇을 찾다 보니 비누가 잔뜩 있다. “아저씨, 비누 쓰실래요?” “우리야 주면 좋죠.” 깨끗한 행주도 쓰신대서 따로 담았다. 얼음가방도 쓰신대서 거저 주었다. 내가 갖고 오려고 따로 챙겨 놓은 전기레인지도 드렸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데, 그렇다고 내가 갖고 가면 쌓아 놓을 짐이다. 우리 딸이 새집에 새살림을 갖고 가기를 바라듯이 나도 오래도록 우리 집을 떠난 그릇이며 부엌을 차지하는 물건을 다시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커피포트는 우리 집에 쓰는 것과 똑 같다. 전자렌지도 아들이 쓸지 모르는데, 요즘은 집에 다 있다고 하니 따로 챙길 마음이 없다.

 

예전에 우리 부부가 이곳에 살 적에는 누가 이사하면서 버리는 탁자도 주워서 썼다. 깨끗하고 말짱한 탁자도 거저 주니, 아저씨는 너무 쓸 만한 것을 다 준다고 여기는 듯했다.

 

모두 쓸 만한데 버리기엔 아깝다고 생각했다. 따로 거두어 가는 곳을 찾아 버린다. 비싼 피아노도 오만 원 받고 처음 샀던 가게로 돌려주었다. 아마 지난날 우리였다면 피아노도 주워다 쓸지 모른다.

 

이제 말짱한 짐은 침대뿐이다. 넓은 집을 사서 새살림을 들일 적에 곁님이 선물로 준 화장대는 버려야 할 듯하다. 닦지 않아 손자국에 먼지가 잔뜩 쌓였지만 나는 몇 해 쓰지 못했다. 우리 딸 차지가 되었고 이 집을 살 사람이 쓰려면 침대와 에어콘도 물려받아 쓸 만하다.

 

10층에 살 적에도, 대구에 와서 맨션에 살 적에도, 주워다 놓은 물건들은 끝내 다 버리기만 했다. 모아 둘 적에 오히려 마루만 어설펐다. 언젠가 쓰려는 마음에, 버리기가 아까워서 갖고 오긴 해도 우리도 마땅히 쓰임이 없었다. 그때 우리와 다르게 경비 아저씨한테는 꼭 쓸 만한 물건이다. 애가 쓰던 짐이라도 쓸 만한 게 무척 많다. 이렇게 버려진 물건이 얼마나 많을까.

 

사람 곁에 머물다가 버려진 물건이란, 참 야릇하다. 쓸 적에는 빛이 반짝하는 듯하다가 버려지고 버린다니깐 퀭한 몰골로 보이는 까닭은 뭘까. 경비 아저씨가 간이침대도 되고 의자도 되는 걸 얻었다고 내가 들고 가는 쓰레기를 들어준다. 겨우 목숨을 건진 듯한 우리가 쓴 물건이 딸을 거쳐 다른 사람한테 건너간다.

 

2023. 02. 18.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