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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삶 93] 언덕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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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93] 언덕집 사람

 

엄마가 읍내에 다녀오고서 힘이 없다. 밭에 가기로 했지만, 한꺼번에 움직이면 힘들다며 방으로 들어간다. 엄마가 쉴 동안 아버지 무덤에 간다. 가는 길에 마을 골목을 기웃한다. 집 뒤 언덕으로 뒷집도 비고 이 옆집도 비고, 한 칸 건너 빈집은 흙담이 휘청 굽고 창살문이 떨어졌다. 곧 와장창 쓰러질 듯하다. 마당은 풀더미가 되었다. 옆집도 빈집이고 앞에 있는 두 집도 빈집이다. 엄마가 어울릴 만한 분이 이 골목에 있을까. 마을회관에 가야 어울릴 이웃을 만나겠구나.

 

목골로 이어지는 내를 따라 위아래로 갈라진다. 언덕 쪽과 판판한 쪽은 빈집이 드물다. 큰집 골목으로 들어갔다. 집 뒤로 다니던 자락길이 있나 싶어 기웃하니 나무 밑에 남새가 자란다. 우물이 있던 자리는 창고가 바뀌고 들일을 나가셨는지 개만 컹컹 짓는다.

 

아버지 무덤으로 오르는 다리를 건너다 언덕집 광대네 위로 불두화가 피었다. 바위틈에 금낭화가 피었다. 이 바위도 저 바위도, 틈마다 금낭화가 피었다. 마을에 금낭화가 참 많구나. 언덕집이 궁금해서 기웃하면서 광대네 집을 지나는데 아주머니가 부른다. 내가 모르는 얼굴이다. 큰오빠 이름을 댔다가 작은오빠 이름을 댔다. 내 이름은 모를 수 있다 오빠 이름을 말했더니 “정화가?” 한다. 누구실까 갸웃하면서 부르는 쪽으로 갔다.

 

광대네 엄마는 얼굴이 낯이 익다. 마을사람 몇이 모여 부침을 먹는다. 먹고 가라고 붙들어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자리가 예전 한 대 부엌쯤 되어 보이는데 문을 달아 칸을 냈다. 막 앉는데 광대네 윗집에 사는 정애 엄마가 오신다. 어린날 놀러를 자주 가서 얼굴은 또렷하다. 나를 먼저 보고 오라고 하던 분을 몰라 누구신지 여쭈었다. 영철이 엄마란다. 그 옆에 앉은 분은 은혜 엄마이다. 영철이 이름은 낯설다. 그러다가 움푹 파인 집에 살던 이름이 떠올랐다. 은혜 엄마는 새색시로 시집올 적에 고운 얼굴이 포개진다. 일찍 아저씨를 잃어 곰방대를 피우던 할머니가 은혜를 데리고 다니면서 걱정을 하던 일이 떠올랐다. 어느덧 일흔이 되어 예전 곱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곱다.

 

광대 어머니는 바로 알아보았다. 어린 날 보던 모습 그대로이다. 광대는 이름만 알 뿐 얼굴은 모른다. 어린 날 이 집에 큰일이 일어났다. 광대가 짚을 쌓아 둔 가게에 불을 낸 적이 있다. 그때 불길이 얼마나 타오르던지. 마늘 거는 가게가 물이 흐르는 내쪽에 있어 위채로 크게 번지지는 않은 듯하다. 어릴 적에는 집에 불냈다고 수군대곤 했는데 어른이 되어 곰곰 떠올리면, 광대가 불만 보면 깜짝 놀라고 집을 태웠다는 일로 풀이 죽지 않았나 싶다.

 

우리 엄마는 밭일을 한다고 놀 틈도 없는데 언덕집 사람들은 앞뒤옆이 다닥다닥 붙었고 다리를 건너면 큰집도 있고 이웃집이 또 있어서, 서로 모여서 논다. 엄마는 말버릇처럼 말이 덜 맞는다는 말을 했지만, 오늘 보니 우리 엄마만 집이 뚝 떨어져 외따로였네 싶다. 내가 어린 날에도 우리 집 쪽으로 아이들이 적어 이 언덕집 쪽으로 놀러오곤 했는데 어른들도 이쪽에 몰렸다.

 

영철이네 집이 어딘지 아주머니가 나를 데리고 간다. 내 따라 교회 다음 언덕집이 높은 돌담에 있다. 이 옆을 지나다닐 적마다 누구네 집인지 궁금했는데 광대네 집 위로 밭을 지나 교회 뒤쪽으로 내려가니 영철네 집이었다. 교회 뒷골목으로 숨바꼭질하며 뛰어다니던 일이 떠올랐다. 영철네는 앞집하고 이웃인데 담이 엄청 높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층층이 집이었다. 물이 흐르는 쪽으로 나무를 밟고 언덕으로 질러 내려오던 길을 계단으로 냈다. 예전 그대로인 셈이다. 언덕집은 교회 뒤쪽 길로도 계단으로도 다리로도 갈 수 있네.

 

계단을 내려와 다시 다리를 건너 아버지 무덤이 있는 멧길로 오른다. 이 집 저 집 다니며 엄마도 어울리면 좋을 텐데, 그래도 묵정밭이 안 되게 땅을 일구는 엄마가 꿋꿋해서 좋다. 여든이 되어도 엄마는 남들처럼 놀지 않으니깐.

 

2023. 05. 05.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