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작은삶 102] 궁둥걸상

URL복사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02] 궁둥걸상

 

새벽 네 시이다. 캄캄하던 밤하늘이 조금씩 밝는다. 숲은 아직 까맣고 하늘이 파랗다. 달리면서 해돋이를 보려나 기다리는 사이 풍산 읍내를 지난다. 구름이 하늘을 뒤덮는다. 들녘으로 들어오니 한뼘 자란 모가 푸릇푸릇하게 땅을 환하게 밝히고 흐린 구름은 파릇파릇 밝아온다. 한 시간 반 달리는 동안 날이 새는 가장 어두운 얼굴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시골집에 닿으니 햇살이 구름을 겨우 벌리고 눈썹만큼 나왔다. 일하기 좋은 아침이다.

 

앵두가 빨갛게 익었다. 자잘한 장미꽃이 나무처럼 우거졌다. 아, 매실나무를 타고 뻗어 나무가 말랐다. 한 그루 장미나무처럼 덩굴졌다. 장독대 옆 감나무 밑 꽃잎이 셋 달린 보랏빛꽃이 피었다. 담 같은 대나무 줄기가 마당으로 뻗었다. 뽑느라 애를 먹으며 꽃밭을 꾸려 놓았다. 애써 가꾼 꽃밭이 사라지는 줄 알았더니 지난해 누가 심은 꽃이 올해 다시 살아났다. 이제 뒷밭에 간다. 토마토가 열리고 노란 꽃이 피고 진다. 멧딸기 한 그루도 찔레 덩굴 같다. 바알갛게 영글어 가는 멧딸기로 가지가 축축 늘어졌다. 멧딸기꽃이 매화 닮았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언덕 터이다. 지붕을 보며 숨 크게 쉬고 밭에 간다. 깨밭 너머 아버님이 벌써 감자를 캔다.

 

이랑에 올라타 쪼그리고 앉아 감자를 캔다. 흙빛을 보니 두 이랑은 어제쯤 캔 듯하다. 짙은 흙빛 한 고랑하고 반 고랑째 캔 감자는 고랑에 모았다. 이 모습 이 흙빛을 보는 그림은 언제나 좋다. 저 그림에 내가 들어가서 함께 캐면 끙끙 앓을 테지. 한 고랑을 맡는다. 비닐을 젖히고 호미로 감자를 살살 캔다. 두 뿌리쯤 캐다가 일어선다. 이렇게 쪼그리고 앉으면 또 무릎이 아파 힘들지 모르나. 궁둥걸상을 찾아서 올라오니 조금 앞서 밥을 하던 어머님이 산에서 내려온다. “어머니 어디 갔다 오셔요?” “기저귀 널고 오는 길이다” 걸음이 느리신데 언제 여기 왔지. 문득 헛깨비를 본 듯해서 속으로는 깜짝 놀랐다.

 

궁둥걸상 끈을 두 다리에 끼우고 앉는다. 푹신푹신하다. 두 다리를 고랑에 놓고 쑤그리고 캔다. 호미질 몇 하고 나니 오른쪽 손바닥 뼈가 아프다. 가게서 손을 많이 쓰니 마디마디가 아픈데 호미질에 도진다. 왼손을 얹어 두 손으로 호미 귀퉁이로 흙을 파고 감자를 꺼낸다. 씨앗이 하나도 안 썩고 뿌리가 나서 가는줄기에 굵게 감자가 달렸다. 어떤 감자는 두 알이 맺혀 큼직하고, 어떤 알은 열씩이나 주렁주렁하다. 어떤 감자는 노른자 만한 알을 품으니, 감자도 사람살이 같다. 혼자 사는 집, 신혼부부가 사는집, 큰집안이 사는 집을 보는 듯하다.

 

한 이랑을 캐고 뒤를 돌아본다. 이랑에 궁둥걸상 자국이 동그랗게 났다. 일부로 찍어 놓은 듯하다. 캔 자리에 바로 무얼 심는다고 한다. 아마 걷은 비닐도 그대로 쓸 테니 살살 걷고, 감자가 없는 이랑에 흙도 호미로 고르니 이랑을 다듬어 놓은 듯하다. 그런데 한 이랑을 캐고 나니 허리가 안 펴진다. 엎드리고 캘 적에는 모르겠더니 궁둥걸상에 앉아 다리를 뻗고 캐도 허리와 다리가 당긴다. 아직 두 고랑 남았는데 팔이 후둘 떨린다. 나이드신 아버님은 세 고랑 반을 캤으니 얼마나 아플까. 끙끙 앓을 적에 어머님이 “시골일 하면 힘들지. 힘들다고 하면 안 와야지.” 예전 같으면 ‘그렇제’ 하고 너그러울 말씀이 어쩐지 말이 뾰족하다.

 

몸이 더 힘들다. 굵기대로 상자에 담는데 어머니는 남은 두 이랑을 마저 캐자고 한다. 나는 이제 한 포기도 캘 힘이 없는데 이 일을 어쩌나. 눈치 보는데 아버님이 놔두라고 한다. 며칠 두면 감자가 더 클지 모른다. 어머님은 아버님이 하는 말을 못 들었는지 감자를 캐기 좋게 싹을 자른다. 아버님이 “고만 놔둬” 크게 말하자 멈춘다. 이미 내 몸을 다 썼을 적에 하는 일은 몇 곱으로 힘들다. 지난번 파를 다듬고 토란을 다듬는다고 쪼그리고 앉아서 하다가 힘살이 늘어져 몇 달을 애먹었다. 궁둥걸상이 아니면 멀쩡해 보이는데 일하기 싫어하는 줄 알겠지. 흙을 좋아해도 일하면 힘들다. 궁둥걸상이 큰일을 했다.

 

2023.06.18.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