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 숲하루가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에 보고 먹고 만지며 가지고 놀던 풀꽃나무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마을 뒷산은 낮은 등성이가 갈래로 길게 이어졌어요. 골 따라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지요. 그때는 몰랐지만, 돌아보니 우리가 숲을 헤쳐도 숲은 우리를 키웠어요. 나무를 잘라서 불을 때던 때는 숲이 우거지지 않았어요. 어린 우리한테는 놀이터가 되어 주었어요. 논밭 못과 숲에는 철마다 먹을거리가 나오고 모두가 놀이감이에요. 먹을거리가 하도 없어 배가 고파 먹었지만, 우리 몸에 좋다는 것만 먹은 셈이예요. 풀 한 포기가 밥이 되고 반찬이 되고 나무 한 포기가 맺은 열매를 먹고 소나무를 벗겨 먹었어요. 먹고 사는 일이 가장 큰 일이던 때라 배움도 뒷전이었어요. 남새가 우리 등록금이 되어 주고 어머니 아버지 허리를 펴 주었어요. 그때 아이들이 커서 마을을 떠나고 민둥산이던 숲이 이제야 나무가 우거져서 바람이 맑게 깃드는 마을이 되었어요. 빈집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면 마을이 묻힐지도 몰라요. 이 책은 한 마을에서 살림을 해온, 골과 밭과 들과 숲 이름을 살리고, 어머니가 쓰던 구수한 말을 살리고, 풀꽃나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게 삶으로 1 엄마집에 갔다 《티베트의 지혜》 쇼걀 린포체 글 오진탁 옮김 믿음사 1999.2.1. 《티베트의 지혜》을 2010.7.11. 장만하고 이날은 ‘꿈속의 고향(드보르작)’이란 노래를 들었다. 이 책을 처음 편 날 엄마집에 갔다. 경북 의성 시골에 내도록 살아가는 우리 엄마는, 이날 비가 와서 들일을 못 가고 물리치료를 하러 병원에 갔는데, 마침 병원이 쉬는 날이라 헛걸음하고 버스삯만 날렸다고 투덜거렸다. 이날 할아버지가 마늘 묶는 곁에서 재밌게 보던 막내는, 할아버지 손놀림이 재밌다면서 굵은마늘 작은마늘을 고르면서 놀았다. 개구쟁이처럼 잘 노는 막내한테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막내만 하던 어린 날, 할머니 할아버지 몰래 마늘하고 얼음과자를 바꿔 먹으면서 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러고서 두 해 뒤인 2012년에 대구로 집을 옮겼는데, 그때 이 책 하나를 챙겼다. 어느덧 열세 해가 지나서 다시 펼친다. 삶과 죽음과 되살림(환생)을 다루는 줄거리를 돌아본다. 태어나서 터트리는 울음은 어떤 뜻일까. 그런데 어쩐지 뭔가 뒤섞인 듯한 얼거리이다. 삶이라는 너른길과는 달리, 붓다에, 달라이 라마에, 린포체에, 밀라레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푸른책 읽기 41 《한국 고라니》 김백준·이배근·김영준 국립생태원 2016.3.28. 《한국 고라니》(김백준·이배근·김영준, 국립생태원, 2016)를 읽고서 한참 생각에 잠겼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들짐승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나라가 드뭅니다. 범에 여우에 늑대가 자취를 감추었고, 곰도 없다시피 하지만 겨우 몇 마리를 살려서 풀어놓는데, 멧돼지하고 고라니를 아주 숨도 못 쉬도록 짓밟아요. 우리나라는 틀림없이 작습니다. 작되 멧골과 숲과 들과 바다가 넓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나라지기도 고을지기도 이 작은 나라에 깃든 아름다운 들숲바다를 아름빛으로 살리는 길을 여태·아예·그야말로 안 갑니다. 이 작은 나라에 총칼(전쟁무기)은 끔찍하게 많고, 이 작은 나라에서 돌이(남성)는 갓 스무 살에 싸움터에 끌려가서 바보로 뒹굴어야 합니다. 그런데 돌이 가운데 돈·이름·힘이 있으면 싸움터에 안 끌려가고 뒷길로 빠져나옵니다. 또는 종잇조각(대학생 신분)이 있으면 싸움터를 한참 미루거나 빠져나올 길이 있어요. 이 땅에 고라니가 몇 마리가 있는지 알 길이 없다지요. 푸른별(지구)에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용케 살아남은 작은 들짐승인 고라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에서 짓는 글살림”은 숲을 사랑하는 눈빛으로 시골자락에서 아이들하고 살림을 짓는 길에 새롭게 맞아들여 누리는 우리말 이야기입니다. 숲에서 짓는 글살림 39. 햇사랑 우리말로 옮긴 어느 일본만화를 읽는데 “순애보인가?”라는 짤막한 한 마디를 보았습니다. 어른끼리 이야기하는 둘레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낱말인 ‘순애보’이지만 말뜻을 제대로 짚자는 마음으로 낱말책을 뒤적입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낱말책에 없습니다. 더 살피니 이 낱말은 1938년에 어느 분이 쓴 글에 붙은 이름이에요. 글이름이라서 낱말책에 없나 하고 헤아리면서 한문 ‘殉愛譜’를 뜯으니 “바치다(殉) + 사랑(愛) + 적다(譜)”로군요. “바치는 사랑을 적다”라든지 “사랑을 바친 이야기”로 풀이할 만합니다. 총칼수렁(일제강점기) 무렵에 나온 글인 터라 아무래도 글이름을 한문으로 적기 쉬웠을 테고, 중국말씨이거나 일본말씨일 테지요. 그렇다면 요즘은 어떻게 쓰거나 읽거나 말하거나 나눌 적에 어울리거나 즐겁거나 아름다울까요? 절절한 순애보 같았다 → 애틋한 사랑 같았다 / 애틋이 사랑에 바친 듯했다 스타들의 순애보를 보면 → 샛별들 사랑을 보면 / 별님들 사랑타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책숲마실 하루 ― 인천 〈시와 예술〉 날마다 나무를 바라보노라면, 이렇게 춤을 잘 추면서 아름답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인천을 떠나던 2010년 가을에 곁님하고 “우리는 나무로 우리 집을 빙 두를 수 있고, 마당에서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보금자리를 누리자”고 생각했습니다. 곁님은 ‘시골 아닌 멧골’로 가기를 바랐기에, 아직 머무는 시골은 작은 보금자리요, 앞으로는 너른 보금터인 멧숲을 누리려는 꿈을 그려요. 인천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에도, 큰아이를 2008년에 낳고서 같이 골목마실을 하는 사이에도, 큰고장이며 서울에서 자라나는 나무는 늘 ‘춤스승’이었습니다. 작은 골목집에서 지붕을 덮는 나무도, 길거리에서 매캐한 기운을 걸러내는 나무도, 바닷물결 소리를 내면서 춤추기에 누구나 숨쉴 수 있다고 느꼈어요. 칠월 한복판은 한여름이기에 한 해 가운데 햇볕을 가장 신나게 듬뿍 누리는 철입니다. 둘레에서는 이맘때가 가장 덥다고 여기거나 놀이철(휴가시즌)로 치는 듯싶으나, 실컷 햇볕을 머금으면서 몸을 살찌우고, 신나게 땀을 쏟으면서 찌꺼기를 내놓는 나날로 맞아들입니다. 어제 〈시와 예술〉을 들렀으나 아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책숲마실 이제는 ― 고흥 〈더바구니〉 드디어 모든 시끌짓(선거유세차량)이 끝난 어느 날입니다. 곰곰이 보면 그들(정치꾼·공무원)은 늘 시끄럽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을 자랑삼아 떠들지 않는데, 그들은 뭘 했다고 떠들고 뭘 하겠다며 떠듭니다. 굳이 잘난책(베스트셀러)을 안 읽습니다. 잘났다고 떠들썩하게 온갖 곳에 알림글로 채우는 책은 속이 비었거든요. 빈수레는 시끄럽습니다. 빈책(공허한 베스트셀러)은 자꾸자꾸 알림글을 여기저기 목돈을 띄워서 떠듭니다. 삶을 삶답게 새로 읽으려고 할 적에 비로소 책집에 깃들어 스스로 차분히 하루를 되새길 만하지 싶습니다. 쇳덩이(자동차)를 내려놓고서 마을책집으로 천천히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달리지 않는다면, 삶을 삶답게 읽을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쇳덩이를 빨리 달려 부릉부릉 끼이익 세워서 후다닥 사들이는 몸짓이라면 구태여 책을 읽을 까닭이 없어요. 빨리빨리 하고 싶으면 그냥 빨리 죽는 길이 낫습니다. 둘레(사회)에서는 ‘병·병신’을 하염없이 나쁘게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낱말 ‘병·병신’은 하나도 안 나쁩니다. 이 낱말을 나쁘게 여기거나 쳐다보는 눈썰미가 ‘나쁘다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푸른책읽기 40 《사과나무밭 달님》 권정생 창비 1978.12.25.첫/2006.10.2.고침2판 《사과나무밭 달님》(권정생, 창비, 1978/2006)은 이제 해묵은 이야기책 같습니다. 시골 작은집에서 살며 시골 작은이웃을 그리는 마음을 담아낸 글인데, 이 책을 읽는 어린이나 어른 가운데 오늘날 누가 시골 작은집에서 살까요? 서울에서 커다란 잿집(아파트)에 머물기에 권정생 님 글을 못 읽거나 못 헤아려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겠어요? 여름에 부채질을 하다가 나무 곁에 서서 쏴아아 하고 부는 바람으로 풀내음을 맡는 살림살이가 아니면서, 《사과나무밭 달님》에서 들려주는 어떤 바람소리를 들을 만한가요? 겨울에 손끝 발끝 꽁꽁 얼면서 아궁이에 불을 때어 밥을 지어 조그마한 칸에 둘러앉아 한끼를 나누는 살림을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는 채, 삶으로 마주하지 않고 글로만 읽는다면, 무엇을 보거나 느낄까요? 이제는 나라 어느 책숲(도서관)이든 으리으리합니다. 밤에도 불빛이 환한 책숲이며, 잿집이고, 서울이고, 배움터입니다. 한밤에 별빛을 그리면서 밤새가 들려주는 노래를 가만히 듣는 하루가 없는 채, 그저 글로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푸른책 읽기 39 《나무 위의 아이들》 구드룬 파우제방 글 잉게 쉬타이네케 그림 김경연 옮김 비룡소 1999.7.20. 《나무 위의 아이들》(구드룬 파우제방·잉게 쉬타이네케/김경연 옮김, 비룡소, 1999)을 처음 읽을 무렵, 이제 이 나라에는 “나무 타는 아이들”은 감쪽같이 사라졌을 텐데 싶었습니다. 어버이 가운데 아이한테 “나무 심을 마당”을 베풀거나 물려주는 이는 찾아보기 너무 어렵습니다. 배움터 길잡이 가운데 아이들한테 배움책(교과서)이 아닌 나무를 길동무로 삼거나 배움벗으로 삼아 즐겁게 뛰놀도록 틈을 내주는 어른이 있으려나 궁금했습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이 타고 오를 나무를 건사하는 길잡이(교사·교감·교장)는 예전부터 아예 없거나 아주 드뭅니다. 나무타기를 하려면 가지를 함부로 치지 않을 노릇입니다. 타고 오를 나무라면 여러 나무가 자라야겠지요. 나무 곁에는 풀밭이 흐드러지면서 갖은 들꽃이 피고 질 노릇이요, 갖은 풀벌레에 개구리에 뱀에 제비에 참새에 복닥복닥 어우러질 수 있어야 합니다. 푸나무만 우거지는 숲이 아닙니다. 숱한 새가 나란히 깃들어야 숲입니다. 벌나비에 풀벌레가 마음껏 살아가는 곳이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책숲마실 스스로 아름답게 ― 서울 〈뭐든지 책방〉 어제 어쩌다가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라는 데를 아마 열다섯 해 만에 지나가 보는데, 이 앞에 선 ‘지킴이(경비원)’가 사람들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입가리개나 차림새를 꼬치꼬치 따지면서 윽박지릅니다. 어깨띠를 차면 스스로 대단하거나 잘난 줄 알며 ‘마름’질을 일삼는 허수아비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습니다. 입가리개로 코를 옴팡 안 덮는 길손이 하나라도 있으면 〈교보문고〉에 큰일이라도 터질까요? 그런데 ‘교보문고 안쪽에 있는 찻집’에 바글거리는 사람은 아무도 입가리개를 안 하면서 재잘재잘 큰소리로 수다를 떠는데요? 이들더러 왜 ‘입다물고 입가리개 똑바로 써!’ 하고 윽박지르지 않을까요? 우리는 넋나간 나날을 보냅니다. 고작 1미터도 아닌 10센티미터 옆에서는 깔깔깔 떠들면서 입가리개를 안 합니다. ‘어깨띠를 두른 지킴이’는 저쪽은 안 쳐다보면서 이쪽을 지나다니는 사람들한테 이 말 저 말 무섭게 읊습니다. ‘좋은책’을 읽기에 ‘좋은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마음’이란 따로 없습니다. ‘좋은길’조차 없습니다. ‘좋음·나쁨’은 ‘옳음·그름’으로 가르는 굴레이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책숲마실 책과 글이라는 꽃 ― 청주 〈달꽃〉 청주 마을책집 〈달꽃〉은 2023년 3월 30일까지 열고서 조용히 닫았습니다. 네 해에 이르는 책살림은 접습니다. 책집이 떠난 자리에는 다른 가게가 들어설 테고, 다른 이야기가 이어가리라 봅니다. 그러나 그곳에 책집이 있던 자국은 언제까지나 흘러요. 우리말 ‘자’는 ‘길이’가 있는 ‘단단한 것’을 가리킵니다. 앞에 서거나 스스로 나서려고 하는 숨결도 ‘자’를 넣습니다. 집(ㅁ)으로 둘러싸는 받침을 넣은 ‘잠’은, 반듯하게 누워서 꿈으로 나아가는 길을 나타내고, ‘잠기다·잠그다’로 잇는데, ‘잠’이 나비한테도 사람한테도 새몸과 새빛으로 깨어나는 길을 밝히는 말밑이듯, ‘자리’는 모든 곳을 짓거나 이루는 바탕을 나타내요. ‘자위·자욱·자국’으로 뻗으면 삶결이 깨어나거나 묻어난 바탕을 나타냅니다. 책집이 있던 자리는 앞으로 잊힐 만하지만, 책집으로 만나던 자욱이며 자국은 책손 마음에 가만히 남을 테지요. 우리는 자고 깨어나는 하루를 누리면서 언제나 새롭게 달라지면서 거듭나는 마음입니다. 어제하고 오늘은 누구나 다른 숨결이자 삶입니다. ‘나’는 ‘나아가’려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