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8] 다녀왔습니다. 여럿이 나들이 가면 들뜰 텐데 차분하다. 멀미약을 안 먹어야 머리가 맑은 줄 알면서 먹는다. 뭔가 모르겠지만 요사이 멍하고 굼뜬다. 웃음도 무디고 느낌도 무디다. 나루터를 보고 등대를 보아도 그저 그렇고 바람이 머리칼을 마구 날려도 무덤덤하다.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도 혀를 꼬며 귀엽게 말을 하고 까르르 웃고 나비처럼 팔랑팔랑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사진을 찍는다면 팔을 착 뻗고 소리치고 몸짓이 저절로 나오기도 한다. 내 안에 있는 다른 내가 느긋하게 구는 듯하다. 오르막 숲길이다. 판판한 들녘이 펼쳐지고 나무가 우거졌는데 이 꼭대기에 가야 고래불바닷가를 본다니 오르면서도 잘못 오르는 길이 아닐까 갸우뚱하면서 계단을 오른다. 이제 신바람이 살짝 나는데 몸은 아직 무겁다. 종아리에 돌덩이를 하나 달아 놓은 듯 당긴다. 재잘거리는 사람보다 앞서 걷는다. 숨을 고르며 뒤돌아본다. 여든아홉 살 샘님이 무릎에 손을 짚고 한 걸음 두 걸음 힘겹게 오른다. 일흔다섯 살 샘님은 구두를 신었다. 돌 자국이 찍히면 굽이 흉할 텐데 발가락도 눌릴 텐데 걱정스럽다. 꼭대기에 세운 네모난 쉼터가 크다. 나무결이 꽤 묵었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7] 곁일 모처럼 아들 목소리를 듣는다. “엄마, 집이가?” “그래. 집에 오는가?” “아니, 어제는 바빴어. 손전화 알림도 못 봤어. 공연 했어.” “버스킹인가 뭔가 하는, 길거리노래 했나?” “어. 잘 쓸게. 근데 돈 더 보내줘서 많은데. 그럼 넘 쓰는 거 아니가?” “남으면 모아두고, 모자라면 보태 써. 근데 요즘 니 얼굴 안 비데? 엄마는 니 얼굴만 떠도 좋던데. 노래 올리면 가만 보기만 할게. 거기 올려라” “시간 빼앗겨서 잘 안 들어가” “그래, 잘 생각했다. 반찬 좀 보낼까?” “아니, 보내지 마라. 가까운 데에서 시킨다.” 열흘 앞서, 아들이 돈이 없대서 이십만 원을 보냈다. 달마다 방삯 삼 십만 원 내는 날 한 달 쓸 돈을 보낸다. 사십만 원을 보내니 머리비누 사고 얼굴에 바르는 것도 사고 반찬도 사고 배움삯 내면 모자랄 때가 많을 텐데, 돈을 더 달라는 소리는 좀처럼 하지 않았다. 곁일을 해서 쓰려 하는데 못하게 했다. 돈이 없으면 곁일을 할까 싶어 더 보냈다. 학교 다니는 동안은 스스로 갈 길을 찾는데 배워야 하는데, 곁일을 하느라 틈이 없을까 싶어서 더 보냈다. 우리 가게에 아들 또래쯤 되는 학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6] 봄나물 집에서 문을 꼭 닫아 놓으니 방이 답답하다는 한 마디를 한다. 짝꿍이 불쑥 하는 말을 듣고 난 뒤로 마음이 갑갑하다. 새달에는 쉬어야지. 내 뜻대로 밀고 나가야지. 모임 나들이가 잦아서 하나를 끊고 둘도 끊어야지. 알맹이가 없는 자리를 멀리하고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도 밀어낸다. 이렇게 마음을 세우기가 힘들다. 차라리 심심할 만큼 혼자가 되자고 다짐해도 헛헛하다. 문득 달리고 싶다. 짝 눈치도 살피지 말자. 도서관에 갈까 수목원으로 갈까. 한 시간 아니 두 시간 달리자. 그래, 며칠 글이 안 올라와서 푸른누리에 잘 지내시느냐 여쭈었지. 어디 아프신가, 봄이 오면 푸른누리에 꽃이 피고 새싹이 올라오면 보기 좋다는 말을 지난겨울에 들었지. 상주로 달린다. 그런데 가는 길만 두 시간이네. 창을 내리니 두엄 냄새가 난다. 짙고 옅은 푸른잎이 봉글봉글 피고 벚꽃이 군데군데 하얗게 피어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가는 길이 꽃길이다. 대구는 벚꽃이 지고 잎이 나는데 여긴 벚꽃이 한창이다. 어린 벚꽃이 좀더 자라 가지가 서로 맞닿으면 꽃굴 같은 길이 더 멋질 듯하다. 골짜기 끝이다. 여긴 바람이 좀 차다. 마당이 온통…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5] 벌레 맨손으로 꽃나물을 뜯으려는데 벌레가 한 마리 웅크리고 나를 본다. 깜짝 놀란다. 솜털이 노란지 하얀지 노란 벌레인지 하얀 벌레인지 가만히 본다. 어린 날에 쏘인 풀새미(쐐기벌레) 같다. 쏘이면 살갗이 벙글벙글 일어나고 가렵다. 마른 풀가지로 옮겼다. 벌레가 먹은 나물을 둘까 하다가 뜯었다. 벌레 먹은 나물을 삶으니 끝이 조금 노랗다. 구멍도 나고 자국이 남는다. 벌레는 나뭇잎을 갉아 먹고 풀을 갉아 먹어서 좋지 않다고 여겼다. 우리가 밥을 먹듯이 벌레도 풀잎을 먹을 뿐인데 자꾸 나쁜벌레로 가른다. 나비가 되기까지 매미가 되기까지 모든 벌레가 제 몸을 거듭 벗고서 나왔을 텐데, 가랑잎이나 풀잎에 숨은 몸을 생각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예쁘게 나는 모습만 떠올리면서 꺼려 버릇한다. 벌레가 자라기에 우리한테 나쁠 수 있고 이바지할 수 있지만, 어쩐지 벌레라는 이름에 갇혀서 안 좋게 바라본다. 참 그렇다. 둘레에서 뭐라 하기 앞서, 나부터 벌레를 안 좋게 본다. 그래서인지 사람끼리 서로 깔보거나 얕볼 적에 벌레라고 하기도 한다. 그제 누리글집(인스타)에 아는 분이 글을 남겼다. 이웃삼기를 한 뒤 벌레들이 자꾸 온다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9 구체적 오늘날 우리가 쓰는 숱한 말은 ‘아직 얼마 안 된 말씨’이기 일쑤입니다. 2000년을 살아가는 사람들 말씨는 1900년을 살던 사람들 말씨하고 더없이 달라요. 1800년을 살던 사람들 말씨하고 1900년을 살던 사람들 말씨는 조금 다르겠지만 이럭저럭 비슷할 만하고, 1700년이나 1600년이나 1500년을 살던 사람들은 1900년을 살던 사람하고 이럭저럭 생각을 나눌 만하다고 느낍니다. 1500∼1900년을 살아간 사람들은 말씨가 만날 수 있되, 2000년 사람들 말씨하고는 만나기 어려워요. 더 들여다보면, 2000년을 살아가던 사람하고 2010년을 살아가던 사람하고 2020년을 살아간 사람하고도 어쩐지 울타리가 있습니다. 1990년이나 1980년으로 거스르면 더더욱 울타리가 있어요. 더 살피면, 2030년이나 2040년을 살아가는 사람들 말씨는 2020년을 살아간 사람들 말씨하고 제법 다를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삶터가 바뀌는 만큼 말씨가 확 바뀌고, 살림살이가 달라지는 만큼 말씨는 훅훅 달라집니다. 구체적(具體的) : 1. 사물이 직접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푸른책 읽기 38 《도시를 바꾸는 새》 티모시 비틀리 김숲 옮김 원더박스 2022.1.5. 《도시를 바꾸는 새》(티모시 비틀리/김숲 옮김, 원더박스, 2022)처럼 요즈음은 ‘서울에서 새바라기’를 하는 사람이 부쩍 늘고, 이런 줄거리를 다루는 책이 제법 나옵니다. 다만, 부쩍 늘고 책이 제법 나오기는 할 뿐입니다. 아직 모두 얕습니다. 무엇이 얕은가 하면, ‘새가 궁금하면 새한테 바로 물어보면 될 노릇’인데, 우리 스스로 ‘새한테 곧바로 물어볼 마음’이 아닌 ‘조류학자란 이름인 전문가한테 물어보면서 새이름을 외우는 길’에서 맴돌기만 합니다. 길드는 굴레입니다. 2023년 4월에 “풀꽃도 소리를 지른다”는 이야기가 떴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풀꽃소리’가 어떻게 들리는가를 살폈다지요. 이 이야기를 듣거나 읽으면서 무엇을 느낄 만한가요? “그래, 그분(전문가·과학자)들이 말하니까 믿을 만하구나! 여태 몰랐네!” 하고 여기는지요? 아니면 “그래, 그이(전문가·과학자)들은 이제서야 알아내어 말할 뿐, 풀꽃은 먼먼 옛날부터 우리 곁에서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속삭이면서 함께 살아왔지. 예전에는 누구나 풀꽃소리에 풀꽃수다에 풀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푸른책 읽기 37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 숲하루 스토리닷 2022.12.13.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숲하루, 스토리닷, 2022)은 2022년에 태어난 ‘올해책’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만 한 책이 태어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풀꽃책(식물도감)을 들추어야 풀꽃을 알 수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풀꽃을 지켜보고 돌아보고 살펴볼 적에라야 풀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교 농학과’를 다녔기에 풀꽃을 알 수 있지 않습니다. ‘대학교수’쯤 해야 풀꽃을 알 수 있지 않아요. 풀꽃책(식물도감)을 쓰거나 엮은 적잖은 글꾼 가운데 ‘책에 이름을 담은 풀꽃’을 모조리 먹어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스스로 먹어서 스스로 몸이 어떻게 바뀌는가를 느껴 보지 않는다면, 풀꽃이 어떤 보람(효능)이 있는지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먹어 보지 않은 풀꽃이면서 어떻게 풀꽃 보람(효능)을 글로 적을까요? 풀꽃을 알려면 씨앗부터 누리면 됩니다. 씨앗을 손바닥에 얹고서 가만히 기운을 느끼고, 씨앗을 밥으로 삼아 고마이 먹고, 이 씨앗을 땅에 놓아 무럭무럭 자라도록 하고, 봄에는 봄잎을 여름에는 여름잎을 가을에는 가을잎을 나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하루 우리말 노래 우리말 새롭게 가꾸기 25. 키잡이 우리말 ‘키’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길이를 살피는 ‘키 ㄱ’이요, 둘째는 낟알을 까부르는 살림인 ‘키 ㄴ’이고, 셋째는 배가 나아갈 길을 잡는 자루인 ‘키 ㄷ’이다. 세 가지 ‘키’ 가운데 ‘키 ㄷ’은 ‘키잡이’로 말씨가 뻗는다. 이끌거나 가르칠 만한 키잡이라고 할 만하다. 나아갈 곳을 알리거나 밝히는 키잡이요, 길을 잡거나 찾는 실마리인 키잡이라고 하겠다. 키잡이 (키 + 잡다 + -이) : 1. 배가 나아갈 곳을 잡거나 이끄는 살림. 2. 앞으로 가거나 나아갈 곳·길·흐름을 잡거나 이끄는 일이나 말이나 사람. (= 키·키를 잡다. ← 방향, 방향타, 방법, 법法, 방안, 방책方策, 방도, 수단手段, 대안, 플랜B, 대책, 노선, 노정路程, 도정道程, 선택, 목적, 목표, 지도指導, 교육, 교훈, 교화, 교리敎理, 교수敎授), 강사, 교사敎師, 선생, 은사恩師, 교양敎養, 교도敎導, 교정矯正, 교습, 레슨, 훈육, 훈련, 훈수, 훈계, 훈장訓長, 계몽, 계도, 사사師事, 어드바이스, 권고, 권하다, 장려, 충고, 코치, 양성養成, 소양, 양육, 육영,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곁말’은 곁에 두면서 마음과 생각을 살찌우도록 징검다리가 되는 말입니다. 낱말책에는 아직 없습니다. 글을 쓰는 숲노래가 지은 낱말입니다. 곁에 어떤 낱말을 놓으면서 마음이며 생각을 빛낼 적에 즐거울까 하고 생각하면서 ‘곁말’ 이야기를 단출히 적어 봅니다. 숲노래 곁노래 곁말 50 그림잎 우리 아버지는 어린배움터 길잡이(국민학교 교사)로 일하며 글월(편지)을 자주 주고받았어요. 집전화조차 흔하지 않던 지난날에는, 손바닥만큼 작은 종이에 짤막히 알릴 이야기를 적어서 곧잘 띄웠어요. 우체국에서 “작은 종이”를 사서 부치기도 하지만, 두꺼운종이를 알맞게 자르고 그림을 척척 담아 날개꽃(우표)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작은 종이”는 ‘엽서’라고 합니다. 어릴 적에는 어른들이 쓰는 말을 곧이곧대로 외워서 썼는데, 저 스스로 어른이란 자리로 나아가는 동안 자꾸 생각해 보았어요. 가을이면 가랑잎을 주워 알맞게 말리고서 한두 마디나 한 줄쯤 적어서 동무한테 건네었어요. 이러다가 새삼스레 느껴요. “작은 종이”를 “잎에 적는 글”을 가리키듯 ‘잎(葉) + 글(書)’이란 얼개이니, 우리말로는 ‘잎글’이라 할 만하더군요. ‘잎쪽’이나 ‘잎종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곁말’은 곁에 두면서 마음과 생각을 살찌우도록 징검다리가 되는 말입니다. 낱말책에는 아직 없습니다. 글을 쓰는 숲노래가 지은 낱말입니다. 곁에 어떤 낱말을 놓으면서 마음이며 생각을 빛낼 적에 즐거울까 하고 생각하면서 ‘곁말’ 이야기를 단출히 적어 봅니다. 숲노래 말빛 곁말 49 나 저(나)는 겨울 첫머리인 12월 7일에 태어납니다. 어릴 적에 달종이를 보면 이날 ‘大雪’처럼 한자로만 적혔어요. “어머니 내가 태어난 날에 적힌 이 글씨가 뭐예요?” 하고 여쭈면 “‘대설’이란 한자야. ‘큰눈’이란 뜻이고, 눈이 많이 온다는 날이야.” 하고 들려주었습니다. 그무렵 ‘대설 = 대설사’로 여기며 말장난을 하는 또래가 있어요. 한자로만 보면 ‘대설사 = 큰물똥’이니, 어른들은 왜 철눈(절기)을 저런 이름으로 붙였나 싶어 툴툴거렸어요. 누가 12월 7일이 무슨 철눈이냐고 물으면 으레 ‘큰눈’이라고만 말했습니다. 12월 22일에 있는 다른 철눈은 ‘깊밤’이라 했어요. 또래가 짓궂게 치는 말장난에 안 휘둘리고 싶기도 했고, 한자를 모르는 또래도 쉽게 그날을 알기를 바랐어요. 겨울에 태어나 자랐기에 얼핏 차갑다 싶은 겨울이 마냥 춥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