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97] 큰딸이 차려준 아침밥 오월이 되니 쉬는 날이 길다. 작은딸이 차표를 못 끊었다. 아들은 시험이 남아 안 온다. 둘이 지내다가 큰딸 하나만 왔을 뿐인데 어린이가 있는 집처럼 다르다. 아빠는 딸을 챙기고 딸은 아빠한테 이것저것 시킨다. 일 마치고 오는 아빠한테 태우러 오라고 하질 않나, 잘 안 해 먹는 반찬을 해 달라 하고 피자도 먹는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침밥을 맡겠단다. 아빠가 밖에서 먹어 보지 못한 스파게티를 한단다. 얻어만 먹을까 하다가 어떻게 하는지 볼까 싶어 거들기로 한다.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켜 놓는다. 불판 둘을 씻어 놓고 딸을 깨웠다. 딸은 식빵을 둘 구워서 접시에 담는다. 나는 딸이 시키는 대로 양상치를 씻고 토마토를 썰고 마늘 한 줌을 납작하게 썰고 쪽파를 총총 썰고 고추를 다져서 그릇에 담는다. 물이 끓는 사이 딸이 올리브기름을 붓고 내가 썰어 준 마늘을 넣고 끓이면서 스파게티 국수도 삶는다. 삶은 국수를 마늘 볶는 그릇에 돌돌 말아 넣고 골고루 섞으며 익힌다. 큰 접시를 꺼내주니 마늘 넣고 볶은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건져서 동그랗게 담는다. 여기에 다진 고추를 올리고 올리브기름을 곁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96] 논깃새 밭깃새 이튿날 비가 온다는 얘기를 듣고 엄마가 참외싹하고 옥수수싹을 열 포기씩 샀다. 엄마는 마을회관 앞에서 내가 오도록 기다리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진갓골에 먼저 갔다. 나는 집으로 갔다가 바로 뒤따라가는데 엄마 꽁지가 안 보인다. 여든 살 할매치고는 빠르다. 숲길로 들어간다. 내가 어릴 적에는 도랑으로 못가로 다니던 숲길인데, 이제는 풀길로 덮인다. 솔밭으로 빙 돌아서 걸어간다. 이쪽은 예전에 아버지가 경운기를 몰던 길이다. 천천히 풀밭길을 걷는 동안 아버지 옛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계시고 오빠하고 함께 작은집으로 살던 예전에는, 여기 논에 마늘을 심었다. 여름이면 마늘을 캐고 볏모를 심고 가을에 다시 마늘을 심느라 바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했다. 그때는 논이 작게 네 뙈기였다. 이 네 뙈기 논을 두 뙈기로 뭉치고 다시 한 뙈기로 이었다. 엄마는 한창 일철이라 바쁜 그 무렵, 누구 하나 밭을 갈아 줄 사람이 없으니 으레 호미 하나를 들고 김을 맸단다. 엄마 혼자 이 땅을 다스리기에는 이제 벅차다. 가만히 있자니 풀밭이 되고 밭을 붙일 사람은 없고 예순 해 동안 흙을 일구다가 뻔히 묵정밭이 되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93] 언덕집 사람 엄마가 읍내에 다녀오고서 힘이 없다. 밭에 가기로 했지만, 한꺼번에 움직이면 힘들다며 방으로 들어간다. 엄마가 쉴 동안 아버지 무덤에 간다. 가는 길에 마을 골목을 기웃한다. 집 뒤 언덕으로 뒷집도 비고 이 옆집도 비고, 한 칸 건너 빈집은 흙담이 휘청 굽고 창살문이 떨어졌다. 곧 와장창 쓰러질 듯하다. 마당은 풀더미가 되었다. 옆집도 빈집이고 앞에 있는 두 집도 빈집이다. 엄마가 어울릴 만한 분이 이 골목에 있을까. 마을회관에 가야 어울릴 이웃을 만나겠구나. 목골로 이어지는 내를 따라 위아래로 갈라진다. 언덕 쪽과 판판한 쪽은 빈집이 드물다. 큰집 골목으로 들어갔다. 집 뒤로 다니던 자락길이 있나 싶어 기웃하니 나무 밑에 남새가 자란다. 우물이 있던 자리는 창고가 바뀌고 들일을 나가셨는지 개만 컹컹 짓는다. 아버지 무덤으로 오르는 다리를 건너다 언덕집 광대네 위로 불두화가 피었다. 바위틈에 금낭화가 피었다. 이 바위도 저 바위도, 틈마다 금낭화가 피었다. 마을에 금낭화가 참 많구나. 언덕집이 궁금해서 기웃하면서 광대네 집을 지나는데 아주머니가 부른다. 내가 모르는 얼굴이다. 큰오빠 이름을 댔다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92] 커피포트 있어요? 쓰레기터에 비닐을 따로 담는 자리가 없다. 규격 봉투에 담아 버려야 한다니 다시 꺼내 담았다. 가구와 가전만 남기고 짐을 다 들어냈다. 음식쓰레기를 버리려는데 열쇠를 안 갖고 왔다. 비밀번호도 몰라 우리 딸이 갖고 오는 동안 경비 아저씨는 우리가 내놓은 짐을 치우면서 “커피포트는 없어요?” 하고 묻는다. “버렸는데요?” 저쪽 한자리에 있는지 아저씨와 찾았다. 집에 둔 듯했다. “그럼 전자렌지 같은 거는 없나요?” “있어요. 집에 있는데 내일 짐차가 와서 싣고 가는데 갖고 가세요. 말짱한데 안 닦아서 지저분해요.” 지저분해도 좋다고 아저씨가 집까지 따라왔다. 컴퓨터와 같이 버리려고 그 방에 둔 커피포트를 건네주고 전자렌지도 꺼냈다. 내놓은 그릇을 아까는 어디에 따로 비닐에 담아서 버리라고 하더니, 어쩐지 상자에 담아 버리라고 한다. 나는 그냥 버려도 되는지 되물었다. 그릇을 찾다 보니 비누가 잔뜩 있다. “아저씨, 비누 쓰실래요?” “우리야 주면 좋죠.” 깨끗한 행주도 쓰신대서 따로 담았다. 얼음가방도 쓰신대서 거저 주었다. 내가 갖고 오려고 따로 챙겨 놓은 전기레인지도 드렸다. 하나도 버릴 것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91] 돌려주기 알림소리에 깼다. 밖에서 물소리가 난다. “어제 몇 시에 왔어요?” “집에 오니 두 시쯤 되었더라.” “많이 안 늦었네. 가서 문 열려고요?” “내가 문 열어야지. 니도 어제 힘들었잖아.” “그럼 나 몇 시에 나갈까?” “나오기는 뭐. 어제 일찍 간다고 애들이 뭘 좀 싸주더라. 명이나물도 한 상자 주데.” 보따리를 풀었다. 방울토마토랑 메밀부침이랑 문어가 담겼다. “와 문어 엄청나게 크네. 근데 나 팔이 아파 못 썰어요.” 하고 부침을 데운다. 어제 짝이 멀리 가서 저녁에 내가 가게에 나갔다. 책을 읽으려고 하지만 가만히 앉을 짬이 없다. 바닥에 놓인 상자를 자르고 비워서 자리를 넓힌다. 삐뚤삐뚤 놓이고 넘어진 물건을 세우다 날짜를 보았다. 깜짝 놀랐다. 팔림날(유통기한)이 지났다. 하나씩 들고 본다. 글씨가 너무 작아 날짜가 안 보인다. 사진을 찍어 크게 보고 찾다가 학생을 불러 같이 본다. 아래도 옆도 뒤쪽도 앞쪽도 빼고 나니 쑥 준다. ㅇ과 ㄷ는 담당은 키가 크다. 높고 깊은 자리 물건을 잘 봐달라고 올 적마다 말해도 잔뜩 나온다. ㅇ은 밑에 일꾼이 자주 바뀌고 새로 온 사람도 묵은 걸 빼지 않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90] 명이나물 길바닥 틈으로 질경이가 뿌리를 내렸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 앞이라 뽑으려다 멈춘다. 한때는 틈마다 난 풀을 뽑았다. 이제는 비좁은 틈에 살아난 풀이 멋스럽다. 만날 적마다 내 눈을 빤히 쳐다보고 “나 뽑지 마요.”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 걱정 말아, 뽑지 않을게.” 마음으로 말한다. 풀이 설 땅이 사람길이 되니 함께 누리기로 한다. 내가 본 질경이잎하고 명이나물이 닮았다. 질경이풀은 이름처럼 힘줄이 돋아 질겨 보이고 명이나물잎은 좁고 길다. 지난달 울릉도 명이나물지를 한 통 사왔다. 한끼 먹다가 다음날시골집에 갈 적에 부지깽이지하고 갖고 갔다. 지를 담아도 나물이 질겨서 남을 줄 알았는데 맛있다면서 다 드신다. 마침 어제 짝이 모임에서 한 상자 받았다. 명이나물지는 먹어 보았으나 날나물을 처음 보았다. 처음으로 명이나물지를 담는다. 양파를 하나 썰고 무말랭이 한 줌에 파뿌리를 깨끗하게 씻고 제사 쓰고 둔 황태포를 잘라서 주머니에 담았다. 물 여덟 컵을 붓고 끓이고 불을 끄고 주머니를 꺼냈다. 끓인 물에 진간장 네 컵 국간장 한 컵 설탕 한 컵 매실청 두 컵을 넣고 팔팔 끓였다. 불을 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김정화) 자연에세이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 대구에서 살아도 풀꽃은 곁에서 경북 의성이란 멧골짜기 어린 나날은 자랑할 일이 없었지만, 감출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작은 시골순이 삶과 살림과 사랑을 글로 옮겨도 될는지 몰랐다. 아니, 우리나라는 예부터 어디나 시골이었는데, 흔한 시골아이 어릴 적 삶을 글로 옮기면, 다 아는 이야기이리라 여겼다. 그렇지만 어릴 적 하루를 하나씩 글로 옮기고 보니, 시골 어버이 마음도 오늘 대구에서 살아가는 내 마음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풀꽃나무는 멧골에도 도시에도 똑같이 있는 줄 새롭게 배웠다. 2023.04.12. 숲하루 #고산도서관에 보낸 작가말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김정화 시집 『꽃의 실험』 꽃이었고 꽃으로 보는 나 마음으로만 눌러두었던 이야기를 노래로 터뜨려 본다. 마음에 가두듯 꽁꽁 숨긴 생각을 노래로 옮겨 본다. 아직 걸어가지 않은 길이니 두렵지만, 이제부터 걸으려고 하는 길이니 두근거린다. 막상 해보면 아무것이 아니던데, 씩씩하게 해보기까지는 내내 종종걸음이다. 2023. 04. 12. 숲하루 #고산도서관에 보낸 작가말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9] 멀리 온 시골 시골 들녘을 달린다. 벼를 키울 흙을 갈아 놨네. 골목에 들어서니 시어머니가 쪼그리고 원추리를 뜯는다. 어머니는 나를 쳐다보아도 바로 못 알아본다. 어깨를 감싸고 마당으로 간다. 어머니 키가 내 가슴까지 온다. 작은 몸이 더 작다. 바로 뒤뜰로 갔다. 벌통이 하나뿐이네. 한 사람이 다니던 발자국이 오솔길이 되었다. 풀이 제법 푸르게 올라왔다. 민들레 잔디 제비꽃으로 밭이다. 배롱나무 가지치기를 한다고 따라왔다. 나는 작은 칼을 들고 나물을 한다. 달래를 다섯 뿌리를 뽑았다. 밭뚝 따라 쑥이 있을까 돌아본다. 밭둑에 올라온 정구지는 다니기 힘든 시어머니 몫으로 둔다. 어깨를 넘는 마른 풀밭에 쑥이 있다. 쑥을 뜯다가 대파를 몇 뽑는다. 쑥을 욕심내지 않기로 하고 짝이 있는 나무밭으로 오른다. 무덤 흙이 파이고 바닥에 빨같통을 묻었다. 멧돼지가 냄새를 맡고 못 오게 하는 약이구나. 나무밭둑에 두릅나무가 있다. 마른 나무처럼 선 나무 끝 새싹을 꺾는다. 여느때 같으면 새싹이 잔뜩 나왔을 텐데 나무가 죽어 가는가. 옷이 가시에 자꾸 걸린다. 나무 사이로 다니며 두릅을 딴다. 두릅이 싹을 내면 우리가 따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8] 다녀왔습니다. 여럿이 나들이 가면 들뜰 텐데 차분하다. 멀미약을 안 먹어야 머리가 맑은 줄 알면서 먹는다. 뭔가 모르겠지만 요사이 멍하고 굼뜬다. 웃음도 무디고 느낌도 무디다. 나루터를 보고 등대를 보아도 그저 그렇고 바람이 머리칼을 마구 날려도 무덤덤하다.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도 혀를 꼬며 귀엽게 말을 하고 까르르 웃고 나비처럼 팔랑팔랑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사진을 찍는다면 팔을 착 뻗고 소리치고 몸짓이 저절로 나오기도 한다. 내 안에 있는 다른 내가 느긋하게 구는 듯하다. 오르막 숲길이다. 판판한 들녘이 펼쳐지고 나무가 우거졌는데 이 꼭대기에 가야 고래불바닷가를 본다니 오르면서도 잘못 오르는 길이 아닐까 갸우뚱하면서 계단을 오른다. 이제 신바람이 살짝 나는데 몸은 아직 무겁다. 종아리에 돌덩이를 하나 달아 놓은 듯 당긴다. 재잘거리는 사람보다 앞서 걷는다. 숨을 고르며 뒤돌아본다. 여든아홉 살 샘님이 무릎에 손을 짚고 한 걸음 두 걸음 힘겹게 오른다. 일흔다섯 살 샘님은 구두를 신었다. 돌 자국이 찍히면 굽이 흉할 텐데 발가락도 눌릴 텐데 걱정스럽다. 꼭대기에 세운 네모난 쉼터가 크다. 나무결이 꽤 묵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