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7] 곁일 모처럼 아들 목소리를 듣는다. “엄마, 집이가?” “그래. 집에 오는가?” “아니, 어제는 바빴어. 손전화 알림도 못 봤어. 공연 했어.” “버스킹인가 뭔가 하는, 길거리노래 했나?” “어. 잘 쓸게. 근데 돈 더 보내줘서 많은데. 그럼 넘 쓰는 거 아니가?” “남으면 모아두고, 모자라면 보태 써. 근데 요즘 니 얼굴 안 비데? 엄마는 니 얼굴만 떠도 좋던데. 노래 올리면 가만 보기만 할게. 거기 올려라” “시간 빼앗겨서 잘 안 들어가” “그래, 잘 생각했다. 반찬 좀 보낼까?” “아니, 보내지 마라. 가까운 데에서 시킨다.” 열흘 앞서, 아들이 돈이 없대서 이십만 원을 보냈다. 달마다 방삯 삼 십만 원 내는 날 한 달 쓸 돈을 보낸다. 사십만 원을 보내니 머리비누 사고 얼굴에 바르는 것도 사고 반찬도 사고 배움삯 내면 모자랄 때가 많을 텐데, 돈을 더 달라는 소리는 좀처럼 하지 않았다. 곁일을 해서 쓰려 하는데 못하게 했다. 돈이 없으면 곁일을 할까 싶어 더 보냈다. 학교 다니는 동안은 스스로 갈 길을 찾는데 배워야 하는데, 곁일을 하느라 틈이 없을까 싶어서 더 보냈다. 우리 가게에 아들 또래쯤 되는 학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6] 봄나물 집에서 문을 꼭 닫아 놓으니 방이 답답하다는 한 마디를 한다. 짝꿍이 불쑥 하는 말을 듣고 난 뒤로 마음이 갑갑하다. 새달에는 쉬어야지. 내 뜻대로 밀고 나가야지. 모임 나들이가 잦아서 하나를 끊고 둘도 끊어야지. 알맹이가 없는 자리를 멀리하고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도 밀어낸다. 이렇게 마음을 세우기가 힘들다. 차라리 심심할 만큼 혼자가 되자고 다짐해도 헛헛하다. 문득 달리고 싶다. 짝 눈치도 살피지 말자. 도서관에 갈까 수목원으로 갈까. 한 시간 아니 두 시간 달리자. 그래, 며칠 글이 안 올라와서 푸른누리에 잘 지내시느냐 여쭈었지. 어디 아프신가, 봄이 오면 푸른누리에 꽃이 피고 새싹이 올라오면 보기 좋다는 말을 지난겨울에 들었지. 상주로 달린다. 그런데 가는 길만 두 시간이네. 창을 내리니 두엄 냄새가 난다. 짙고 옅은 푸른잎이 봉글봉글 피고 벚꽃이 군데군데 하얗게 피어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가는 길이 꽃길이다. 대구는 벚꽃이 지고 잎이 나는데 여긴 벚꽃이 한창이다. 어린 벚꽃이 좀더 자라 가지가 서로 맞닿으면 꽃굴 같은 길이 더 멋질 듯하다. 골짜기 끝이다. 여긴 바람이 좀 차다. 마당이 온통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5] 벌레 맨손으로 꽃나물을 뜯으려는데 벌레가 한 마리 웅크리고 나를 본다. 깜짝 놀란다. 솜털이 노란지 하얀지 노란 벌레인지 하얀 벌레인지 가만히 본다. 어린 날에 쏘인 풀새미(쐐기벌레) 같다. 쏘이면 살갗이 벙글벙글 일어나고 가렵다. 마른 풀가지로 옮겼다. 벌레가 먹은 나물을 둘까 하다가 뜯었다. 벌레 먹은 나물을 삶으니 끝이 조금 노랗다. 구멍도 나고 자국이 남는다. 벌레는 나뭇잎을 갉아 먹고 풀을 갉아 먹어서 좋지 않다고 여겼다. 우리가 밥을 먹듯이 벌레도 풀잎을 먹을 뿐인데 자꾸 나쁜벌레로 가른다. 나비가 되기까지 매미가 되기까지 모든 벌레가 제 몸을 거듭 벗고서 나왔을 텐데, 가랑잎이나 풀잎에 숨은 몸을 생각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예쁘게 나는 모습만 떠올리면서 꺼려 버릇한다. 벌레가 자라기에 우리한테 나쁠 수 있고 이바지할 수 있지만, 어쩐지 벌레라는 이름에 갇혀서 안 좋게 바라본다. 참 그렇다. 둘레에서 뭐라 하기 앞서, 나부터 벌레를 안 좋게 본다. 그래서인지 사람끼리 서로 깔보거나 얕볼 적에 벌레라고 하기도 한다. 그제 누리글집(인스타)에 아는 분이 글을 남겼다. 이웃삼기를 한 뒤 벌레들이 자꾸 온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11 ― 냇둑 햇살이 비스듬히 뿌옇다 햇볕이 제법 포근하지만 아직 쌀쌀하다 냇둑에 할머니 한 분 앉아 책을 읽는다 무엇을 읽는지 궁금해 할머니한테 살금살금 다가가 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물소리에 섞인 노랫소리가 들린다 할머니가 냇둑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셨구나 다시 발소리를 살살 죽여 가면서 뒤돌아선다 2023. 01. 26.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4] 맨발걷기 일터 앞을 지나는데 꽃잔디가 피었다. 곱다. 일터 뒷마당으로 간다. 꽃밭이다. 김밥집 뒤쪽에는 앵두꽃이 피었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라는 알림판이 있다. 이 오솔길은 마치 고양이 길 같다. 하양 분홍 진분홍 꽃잔디가 나무 밑을 덮어 물결친다. 꽃내음이 이렇게 짙던가. 냄새를 훅 들이마시고서 일터에 간다. 일을 끝내면 숲에 가자. 그제 못 본 수수꽃다리꽃이 피었다. 배꽃은 목련빛처럼 뽀얗게 피었다. 개나리꽃 반 새싹 반 틈에 온갖 꽃이 있다. 산벚나무꽃도 피었다. 비렁길을 오르니 그제보다 잎싹이 더 파릇파릇하다. 신을 벗는다. 양발도 벗어 신에 넣는다. 두 손에 신을 한 짝씩 들고 맨발로 걷는다. 숲길 어귀에는 귀롱나무가 있다. 푸릇한 잎과 꽃을 만지고 냄새를 맡는다. 멧길을 천천히 오르기로 한다. 신은 긴걸상 밑에 둔다. 마른 흙은 보드랍다. 촉촉한 흙은 시원하고 쫀득하여 발바닥에 착착 감긴다. 소나무 숲길에는 마른 솔잎이 쌓였다. 맨발로 걸으며 밟으니 부드럽다. 솔잎이 이렇게 부드러웠나. 짚신을 신으면 이럴까. 맨땅을 밟다가 솔잎을 밟으니 폭신폭신하다. 잔돌이 있어 살금살금 걷는다. 천천히 걸으며 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빈곳 허리 굽힌다 빈손이다 촤르륵 연다 아침햇살 지피던 그곳인가 수건 석 장 쌓였다 책상 곁에 둔 빨래바구니 째려본다 옷장 열린 틈으로 이 옷 안 입는다고 옷걸이 흔드는 소리 다시 닫는다 귓전에 들리는 아들 목소리 멋내기에 쑥스러워 슬그머니 닫던 모두 그대로 멈춘 빈곳 아이 그림자만 찾는다 열 몇 해 같이 살았나 너와 나 옛하루 살던 그곳 닫는다 2023.03.28. 숲하루 #열린시학2023봄호 #김정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하루 구름이 기웃거린다 하늘빛이 내려온다 길바닥은 신나게 굴러가고 나는 땅을 소리로 등바닥으로 들으며 빈곳만 지킨다 나무보다 높은 겹겹 집더미인 잿빛 너머로 날아가는 새는 무엇을 찾고 먹고 사는가 네거리에서 올려다보다가 오늘도 앉지 못한 채 어두운 바닥에 들어서서 뒹군다 어느새 가을잎은 지고 별빛 없는 밤하늘에 하루가 누워서 간다 2023.03.28. 숲하루 #열린시학2023봄호 #김정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3] 내가 본 울릉도 나루터에 출렁이는 바닷물이 맑다. 바위에 붙은 물미역도 맑게 출렁인다. 나루터에 감도는 바다냄새는 비릿하지 않다. 바닷물도 샘물도 맑고 부드럽다. 울릉섬은 온통 바위가 높고 뾰족하다. 어두운 곳에서 밝게 빛나는 바위가 얼룩덜룩 구멍이 난 작은 돌하고 뒤섞여 보인다. 멀리서 보면 흙처럼 보여 바위가 굴러 떨어질 듯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손으로 만져 보니 단단하다. 바람이 바위를 후벼도 튼튼히 버티어 왔구나 싶다. 그러나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 바닷가를 걷다가는 바다에 빠질는지 모른다. 드러난 흙이 드물다. 둘레로 너른바다에 솟은 섬이니 흙을 알뜰히 여길 만하겠다. 마을은 여러 집이 옹기종기 붙었다. 길가에는 나무가 적고 나무 밑둥을 덮음직한 흙도 보기가 쉽지 않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상추를 키우는 큰 꽃그릇을 본다. 파릇파릇 돋아난 상추잎이 반갑다. 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물도 파릇파릇하다. 풀 한 포기가 바위에 붙어서 섬을 살리고, 바위는 다시 풀이 자라는 터전으로 서로 돕는 듯하다. 오르막 골골이 집이 있다. 판판한 땅을 보기는 쉽지 않다. 이 섬에 논은 어디 있을까. 마을에서 밭을 보기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2] 싹 고구마에 싹이 났다. 손으로 눌러 보니 하나는 물렁물렁하다. 무렁한 고구마는 버리고 길쭉한 고구마를 씻는다. 유리병에 달린 끈을 풀고서 물을 듬뿍 담아 고구마를 꽂는다. 주둥이가 좁아도 고구마 끝이 물에 닿는다. 싹이 나니 뿌리도 나겠지. 수염도 고구마처럼 보랏빛일까. 물을 따라 뿌리가 살금살금 내려와 유리병을 꽉 채울 테지. 싹은 고구마가 썩어 갈 무렵 나려나, 싹이 나서 썩어 가려나. 시골에서 갖고 온 고구마는 곰보이다. 하나같이 굼벵이가 파먹었다. 이웃에 좀 팔아 보려고 갖고 왔지만, 꼴이 안 좋아서 곁님이 먹는다. 곁님은 오늘 즐거워 보인다. 일하는 자리에 와서 “니 고구마 먹고 갈래? 구울까?” 하고 묻는다. 곁님은 고구마를 구우러 간다. 나는 가게 일을 본다. 달끝이라 이래저래 셈값을 맞출 일이 많다. 일을 보며 자꾸 턱을 긁는다. 어쩐지 턱이 간질간질한데, 볼록하게 살이 돋고 턱 살결이 두꺼운 듯하다. 내 손이 거칠어서 그런가 했으나, 우리 고모처럼 얼굴이 두꺼워지는 듯했다. 나잇살이려나. “자, 이제 군고구마 먹을 수 있나?” “응. 먹으면서 해도 돼.” “뜨실 때 어서 먹어라. 뜨거우니 목장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찬몸 까치는 우듬지에 짓고 지킨다 겨울에 우듬지는 가랑잎 하나 없어 까치집은 한 방울 비도 비껴갈 수 없다 꼭대기에 홀로 앉아 새끼들 쳐다보던 까치는 이제 떠났다 하늘 열리고 비를 맞는 잔가지 보금자리 조금 춥다 2023.03.09.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