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 삶 12] 능소화 라면을 먹을까 하고 물을 채우는데, 곁님이 일꾼하고 밖에서 먹고 오란다. 그동안 밥때를 넘기고 집에 가서 먹는데 모처럼 밖에서 먹는다. 가랑비가 그치고 담벼락 따라 걷는 마음이 산뜻하고 가볍다. 김밥집 바람갈이(환풍기)가 시끄럽게 돌아가고 바람에 나무가 흔들린다. 벌써 능소화가 피었네. 바닥에는 꽃이 떨어졌네. 이 길로 차를 몰고 다녀서 못 보았구나.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에도 꽃을 피우다니. 꽃은 참 놀랍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꽃을 피우고 볕이 따가워도 웃으며 춤춘다. 가지 끝에 피어난 꽃은 바람이 살짝 건드려도 통통 튄다. 숨막힐 듯한데도 어쩌면 고이 옷을 입고 흐트러지는 빛도 없을까. 하나가 필 적보다 다섯여섯 송사리로 피어나니 더 곱다. 이렇게 곱고 예쁜 꽃이라면 하늘을 섬기는 마음을 품겠지. 요즘 나는 붉은 꽃이며 열매에 눈이 간다. 내 몸을 버티어 주는 가슴을 닮은 꽃을, 온몸을 돌고돌며 숨을 살리는 핏빛을 닮은 열매를 자주 들여다본다. 꽃도 과일도 물을 입히는, 씨앗이 빚어내는 빛으로 숨결을 빚는다. 내 몸에서 터지려는 붉은 기운을 가라 앉히기도 하고 먹거나 닿으면 싱그럽게 붉은 기운을 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1] 연꽃 몇 해 앞서 반야월 연꽃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벼가 한창 익은 가을이었다. 이미 연꽃은 지고 뿌리를 캐는 밭이었다. 열매가 송송 박힌 연이 꽃만큼이나 소담스러웠다. 물이 말라 논바닥을 드러내기에, 연대를 꺾으러 논둑을 밟고 깊이 들어갔다. 진흙이 미끌미끌하다. 철퍽 미끄러졌다. 발이 푹푹 더 빠질 듯해서 그만 나왔다. 그런데 허리에 묶은 웃옷이 사라졌다. 미끄러지면서 잃어버린 옷을 찾으러 다시 가려다 그만두었다. 그때는 너무 늦게 가서 꽃을 못 보았고, 오늘은 이르게 가서 꽃이 아직 피지 않았다. 건너편 담벼락 언저리이면 꽃이 피었을까. 두 잎을 맞물고 돌돌 말아 나오는 잎도 있고 좀더 펼친 잎도 있다. 이렇게 잎이 다 펼치면 꽃이 올라올 테지. 커다란 잎을 깊고 오목하게 펼치기도 하고 납작하게 펼치기도 한다. 잎에 앉은 물방울이 구슬처럼 구른다. 잎이 축 처진 곳까지 가다가 바람에 잎이 흔들리자 어지럽게 구른다. 넓은 잎이 바람에 쓸려 막고, 뒤에 있는 큰 풀도 여러 잎을 구부려 바람을 막아 준다. 햇볕에도 사라지지 않던 물방울이 바람에 쉽게 떨군다. 두 손을 모은 듯 봉우리를 내민 꽃을 만난다. 바람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0] 소나기 소나기가 쏟아진다면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감기 들지 않을 만큼 소낙비 실컷 맞고 싶다. 그렇지만 소나기처럼 쏟아내는 말은 실컷 들어서 이제는 그만 비껴가고 싶다. 시골로 가는 길에 소낙비가 내렸다. 곁님 입에서도 소낙비가 쏟아졌다. 둘 다 바빴다. 내가 먼저 집에 왔다. 문 앞에는 출판계약서가 왔다. 발간신청일이 며칠 남지 않아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다. 몇 가지 적고 두 종이를 붙여서 가운데 도장을 찍고 스캔을 떴다. 서류에 이것저것을 적었다. 다시 훑어보니 몇 가지 빠졌다. 글을 발표한 날짜를 적어야 하는데, 가나다로 되어서 찾기가 번거롭다. 시골집으로 나설 때까지 다 해낼까, 걱정하며 서둘렀다. 차를 타고 가면서, “나 집 와서 얼마나 바빴는지 알아요? 날짜 찾아가며 그 많은 건수를 시간 안에 마치려고 혼”났다고 하니깐 “지금 살림살이가 어떤 줄 알고 큰돈 들여 책 내는 사람이 어디 있나”고 짜증 낸다. 이렇게 나를 조마조마하게 말할 때면 할 말이 없고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데 오 분 안 되어서 “내가 보이싱 피싱 당하듯이 대구에도 당한 사람 많다고 하네. 삼억 넘게 당한 사람도 있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9] 두부비지 곁님은 두부비지를 차리면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 먹으면 구수한데 왜 안 먹느냐고 물으면 ‘그건 못 먹고 살 때나 먹었지, 난 안 먹어’ 하면서 숟가락을 들지도 않았다. 이렇게 구수한 비지를 맛보면 안 먹는다는 말이 나올까. 약을 살살 올려도 먹을 생각을 않던 사람이 어쩐 일인지 비지찌개를 먹었다고 한다. 바나나가 점박이가 찍혀 곧 안 먹으면 물러 버릴 듯했다. 뒤에 빼두고 아줌마들이 오면 하나씩 주려고 했다. 마침 반찬가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국수를 산다. “반찬이 그리 많아도 먹을 게 없어 국수를 삶아 먹네요.”, “우리도 이렇게 나물이 나와도 하질 못해 없어서 못 먹네요.” 하는 푸념 같은 이야기가 오간다. “이거 먹어 봐요. 먹어 보니 먹기 딱 좋아요. 나눠 드실래요?” “그럼요. 좋지요.” “몇 명이에요?” “다섯이요.” 한 송이는 떼 놓고 그릇에 담으려고 하니 훅 빼앗듯 갖고 간다. 바나나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아주 좋아했다. 반찬가게에는 곁님이 자주 간다. 내가 나물을 다듬고 싸느라 밥을 하지 못한다. 반찬거리가 있어도 몸이 힘들어 빈병을 모아 오는 할머니나 박스 할아버지를 준다. 반찬가게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 심부름 부엌종이가 똑 떨어졌다. 뒤쪽에 있나 싶어 가니 없다. 지하실에 있는데 가지러 가지 못한다. 아침 일꾼이 없어 자리를 비우지 못한다. 이따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자니 그래서, 신문을 손바닥 크기로 잘랐다. 그릇에 올리고 버섯을 담는데. 마침 상자 할아버지가 왔다. 얼음 담는 가방을 하나 달라는데 지하실에 있다. 가지러 가지 못한다. “할배가 찾아 보실래요?” “어디 있는데?” “이쪽 계단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사무실 자리 쪽에 있어요” “열쇠는 어딧노?” “뒤쪽 못에 걸어 두었어요. 자물쇠는 문밖 상자에 올려두세요” 내려간 지 한참 지나서야 할아버지가 올라왔다. 찾은 가방이 둘 있어 하나 갖고 왔다. “가방이 뭐 이렇노?” 한다. “어디 함 봐요” 나도 처음 본다. 배낭처럼 생겼다. 지퍼를 닫고 등에 멜 수도 있고 손잡이를 들어도 되는 가방이네. 어디 놀러 간다는데 맥주라도 넣는가. 무거울 텐데 어깨에 메고 다니면 될 듯하다. “할배요, 부엌종이는요?” “또 내려갔다 올게. 근데 어떻게 생긴 거고?” “동그랗고 분홍 비닐에 싸였어요.” 지하실에 내려간 지 또 한참 지났다. 둘만 갖고 오라고 했는데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글님 ] [작은삶 7] 떨어지다(탈락) 쪽글이 왔다. 기다리던 ‘ㅎ’이라는 알림을 보니 콩닥콩닥 뛴다. 바로 쪽글을 열어 보려다 망설었다. 붙었을까 떨어졌을까, 붙었을 테야 하는 부푼 마음이 일고서야 열었다. ‘선정 미선정’ 한 마디만 보이면 좋겠는데 글월이 길다. 쭉 읽어 보니 ‘결과 사유에서 해당사유 확인가능’ 하다는 말에 떨어졌구나. 바람 빠지듯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또 이름난 사람들이 되었겠지. 글을 쓴 지 세 해이다. 이제 ㅎ에서 내주는 예술인 증명도 받고 예술인 카드도 받을 수 있다. 예술인 카드가 있으면 재난지원금도 백만 원 타는데, 나는 아직 못 탔다. 곁님이 하는 일이 벌이로 잡혀서 그런가. 이 돈을 믿고 책값에 보태고 싶었는데 섭섭하다. 이제 또 삶글(수필) 석 자락을 올리면 이 글을 실을 자리를 주고 발표지원금을 이백만 원 준다는데 ㄱ으로 들어가니 ‘미선정’이다. 올봄에도 ㅇ에 글꾸러미를 보내 보았다. 지난달에 어찌 되었는지 알려주었다. 책으로 틀까지 잡아서 보냈는데 또 떨어졌다. 여기에 붙었다는 사람들 이름을 쭉 훑어보니 여러 곳에서 이런저런 큰 상을 받은 이름난 시인들이 잔뜩 있다. 도서관에서 두 달 동안 글쓰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 받은대로 갓 시집에 왔을 적에 큰시누네 딸이 열 살이었다. 조카인 셈인데, 나는 외숙모가 된다. 나를 가장 반겨준 사람이 조카 소정이가 아닌가 싶다. 편지를 꼬박 보내왔다. 외숙모를 참 좋아하는 아이처럼 느꼈다. 동생이 또 열 살이 되자 둘이 같이 편지를 보냈다. 집을 몇 군데 옮겨다니고, 우리 집 아이를 셋이나 낳아 키우면서 소꿉만 해도 많지만, 두 아이가 보낸 편지는 서른 해도 넘었지만, 버리지 못했다. 어린 날 마음은 고스란히 제 아이한테나 둘레 사람한테 마음결이 냇물처럼 핏줄을 타고 끝없이 흐르고 돈다. 시어머니 생신날을 횟집에서 한다. 큰시누네 식구만 열이 왔다. 삼대가 온 셈이다. 밥을 다 먹고 세 아이 소꿉잔치가 있었다. 할머니한테 편지를 읽어 준다. 그리고 오누이가 장구를 치고 가야금을 튕긴다. 서로 바꾸어 또 한 판 들려주고 가장 어린 여섯 살 난 아이는 춤을 춘다. 앞에는 소정이가 앉았고 눈짓을 하면서 치고 튕기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억지로 시키지도 않고 안 하겠다고 떼도 쓰지도 않는다. 아이들이 저 어릴 적에 하듯이 자랐다. 아이들이 읽고 건네준 편지를 펼쳤다. 열세 살 아이가 쓴 편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5] 손질 집을 나서는데 눈물이 나려고 한다. 아직 가게에서 일할 사람을 못 찾았다. 가게에 들어서면 몇 가지 걸레부터 들고 가방을 둔다. 하루 쉰 날은 나물 손질이 많다. 잘라 놓은 양배추가 하나뿐이다. 통으로 둔 양배추 잎이 누렇다. 마르고 뜬 잎을 떼어내고 한 통을 넷으로 쪼갠다. 손님이 왔다. 칼을 내려놓고 뛰어갔다. 자른 양배추를 둘둘 감는다. 손님이 왔다. 또 뛰어가서 값을 치러 준다. 이제 긴 접시에 담아 놓은 쪽을 손본다. 늘 오른쪽부터 다듬지만, 다듬어서 가장 티가 나는 나물, 다시 말하면 가장 시들한 나물부터 손질한다. 양배추 다음은 언제나 실파를 손질한다. 누렇게 뜬 끝을 떼고 줄기가 누렇게 뜨는 잎을 떼어낸다. 손님이 왔다. 또 뛰어갔다. 다듬은 실파를 끝을 가지런히 해서 튀어나온 뿌리를 자르고 다시 그릇에 담는다. 이제 쑥갓을 꺼냈다. 두 개는 묵어서 누렇게 뜨고 시들었다. 뒤로 빼놓는다. 집에 갖고 갈 참이다. 나머지는 비닐을 뜯어내고 시들한 잎을 떼고 물을 뿌린다. 다른 쑥갓을 손질하고 물을 뿌린다. 다 다듬는 사이 물을 머금은 쑥갓은 잎이 살아난다. 나물 가운데 쑥갓은 손길이 닿는 만큼 티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4 ] 다툼 우리 가게에서 나물을 손질하는데 누가 “사장님 되세요?” 묻는다. 우리 가게에 자주 오는 손님인데 둘 다 모자를 쓰고 입을 가려서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왜 그러세요?” 하고 물었다. “어제, 저녁 여섯 시 조금 넘어서, 여기에서 카드를 썼는데 화면을 좀 보여줄 수 있나요?” 하신다. “네, 그러지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여덟 살 딸이 독서실에서 동무와 싸웠단다. 싸운 아이 마음을 풀어 주려고 마실거리를 사주었는데, 아이 엄마는 안 먹으려고 하는 아이한테 억지로 사주었다는 말을 하더란다. 조금 속도 상하고 그 아이가 억지로 받았는지 아니면 스스로 가지고 왔는지 보고 싶단다. “아이를 봐서라도 그 아이 엄마한테 보여줄 일은 아닌 듯해요. 언젠가는 참마음을 알 거예요” 하고 얘기했지만, 아이 엄마는 속으로 울컥하는 마음을 씻지 못하는 듯하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 엄마가 왜 싸우고 얻어먹느냐고 다그치면 아이는 꾸중 안 들으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여덟에서 열 살까지는 엄마 뒷받침으로 아이들이 위아래로 선다. 엄마들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는 시험성적에 따라서 말발이 서거나 없다. 요즘은 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3] 나무 안아 보기 또 앞산에 가자고 한다. 나는 가보지 않은 숲으로 가고 싶은데 선뜻 간다는 말이 안 나온다. 밤이 깊었으니 갈지 안 갈지는 일어나서 어쩌기로 했다. 곁님은 멧골로 가고 나는 몽돌이 있는 바닷가로 떠날까. 살짝 생각하다가 따라나선다. 앞산은 몇 걸음 갔지만 골골이 다니지 않았으니 가자, 숲에 가면 답답한 마음이 풀어질지도, 아니야 숲 그대로 보자. 그렇지만 나무를 꼭 안아 봐야지, 혼자 흥얼거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비옷을 챙겨 왔으나 우산을 쓴다. 가방이 젖지 않게 덮개를 씌우고 모자를 쓴다. 비가 가늘어 흙길에 먼지만 가라앉았다. 길이 넓고 땅이 질퍽하지도 마르지도 않아 걷기가 좋다. 한 발 두 발 딛자 가랑이에 흙이 달라붙는다. 발목 토시를 찼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처럼 토시와 모자가 축축하다. 잎이 우거진 나무 밑으로 지나면서 나는 우산을 접는다. 비옷을 입으면 덥고 우산을 쓰고 걷기에는 팔이 아프다. 이쯤 내리는 비는 맞아도 좋으리. 쉼터 하나 지나고 몸이 선뜻하니 커피를 마신다. 오르기도 앞서 꾸물꾸물하며 오른다. 커피 한 잔 마시기까지는 몸풀기인데 나는 이렇게 슬슬 놀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