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99] 사과 사과가 먹고 싶어서 산수유씨를 빼러 다녔다. 순이네 집은 산수유를 까면 새참으로 인도인지 국광인지 푸릇한 사과를 준다. 국광은 껍질이 푸르고 단단한데 달았다. 노랗게 익은 사과는 허벅허벅하고 부드럽다. 나는 부사나 홍옥보다 새참으로 나온 사과가 맛있었다. 낮에는 순이네 사과창고 벽에 등을 기대 나란히 서서 햇볕을 쬤다. 사과창고 문을 닫아도 향긋한 냄새가 밖으로 새어나왔다. 문을 활짝 열 적에는 쇠그물에 달라붙어 안을 들여다보면서 군침을 흘렸다. 창고는 캄캄하고 바닥이 깊었다. 나무상자를 겹겹이 쌓아 두고 바닥에 물도 고였다. 나는 산수유 까기 싫은데도 사과 먹으려고 참고 깠다. 아버지는 내가 사과 먹고 싶어서 산수유를 까는 줄 알았다. 몇 해 뒤에 우리 집에도 사과나무를 심었다. 아버지는 사과만 보면 딸 생각이 난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과나무를 심어 처음 열린 사과를 따서 우리를 주었다. 구미 사돈네가 생기기 앞서까지는 내가 사과를 마수걸이했다. 여름에 나오는 아오리나 홍옥을 먹고 나면 가을에 부사가 나왔다. 흉이 난 부사를 먼저 먹으면서 골마루에 두고 겨울이 끝나고 봄 여름까지도 먹었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98] 울콩과 양대콩 아버지가 콩을 뿌리째 뽑아서 마당에 두면 할아버지가 마당에 널었다. 메주콩이나 콩나물콩이 바싹 마르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는 할아버지는 엉덩이를 질질 끌면서 작대기로 두들긴다. 앉아서 도리깨질을 했다. 힘에 부치면 도리깨를 받아 나도 내리쳤다. 콩줄기를 걷어내고 모으는 일까지 할아버지가 했다. 그러나 울콩이나 양대콩은 손으로 꼬투리를 벌리면서 깠다. 모두 모아 봐야 부피가 얼마 되지 않았다. 봄에는 울콩을 감자밭 고랑에 심었다. 콩꼬투리가 여물면 알록달록 곱다. 껍질이 두껍고 콩알도 굵다. 콩꼬투리를 까면 빨간 콩도 있고 얼룩무늬 콩도 있다. 어머니는 울콩을 감자콩이라고 했다. 감자가 자라지 못해 마른자리에 울콩을 고랑 사이사이에 심고 감자하고 같이 캔다고 붙였는지도 모른다. 봄에 심은 또 다른 콩은 덤불로 자라 넝쿨 줄기가 잘 뻗도록 올려주면 가을에 여물어 땄다. 콩꼬투리가 얇고 콩도 울콩보다 자잘하다. 콩을 까서 들여다보면 어금니하고 닮았다고 어금니콩이라 했다. 콩을 광주리에 담아 놓고 어머니하고 깠다. 깍지를 벌려 콩알을 헤아리기도 하고 알이 영근 꼬투리를 골라 까면 여물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97] 비새(빈대·소벌레) 우리 집에는 소가 있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똥파리가 마굿간에 앉은 소 등짝에 잔뜩 모인다. 소는 마구간에서 여물을 먹고 물을 마시고 잠도 자는데, 잠자리에 오줌을 싸고 똥을 눴다. 소똥 냄새를 맡고 거름을 모아 둔 자리에 찌꺼기가 섞고 해서 그런가. 어디서 쇠파리가 날아왔다. 가려운지 꼬리로 이리저리 흔들면서 쇠파리를 쫓아낸다. 그렇지만 소는 손이 없으니 딱 붙는 벌레를 꼬리로 떼지 못한다. 벌레를 얼핏 보면 보리쌀처럼 동글납작하고 살짝 푸른빛이 났다. 소털이 짧고 매끈해서 사마귀 같아 보이는 벌레는 쉽게 눈에 띈다. 아버지는 그 비새라는 벌레가 소피를 빨아 먹는다고 했다. 피를 빨아 먹으면 안 되니깐 아버지도 벌레를 떼고 나도 벌레를 뗐다. 알을 만지면 촉촉했다. 쇠똥이 털에 묻었으면 작대기로 뗐다. 벌레가 징그러워 재빨리 뗐다. 땅바닥에 떨어진 벌레를 발로 밟아 터트렸다. 검붉은 피가 터졌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소털에 자잘한 벌레가 붙었는가 싶더니 피를 빨아 먹고 자라 굵었다. 소는 손이 없으니 제 몸에 난 작은 벌레 하나 어쩌지 못해 고개를 돌려 두 뿔로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96] 환삼덩굴 환삼덩굴이 개나리 틈으로 올라와 가지를 친친 감았다. 개나리 울타리인지 풀밭인지 헷갈릴 만큼 덮었다. 잎은 손바닥을 펼쳐 놓은 듯하고 매끈한데 줄기는 솜털 가시가 송송 박혔다. 어린 날에 이 덩굴에 발목이 걸리고 맨다리가 긁혀 발갛게 자국났다. 가는 줄기가 질겨서 긁힌 자국이 손톱에 긁힌 듯 날카롭고 따가웠다. 마땅히 바를 약이 없어 그래도 버티었다. 찬물에 데이면 더 따갑고 며칠 지나면 검붉게 딱지가 앉는다. 딱지가 떨어지려고 일어나면 그 밑에 새살은 바알간 빛이 돌았다. 환삼덩굴은 밭둑 논둑 산에 풀밭처럼 퍼졌다. 덤불은 잔디나 고구마처럼 뿌리가 서로 이은 띠풀로 땅을 물고 퍼져나가 문어발처럼 딱 붙었다. 어머니는 대기미 밭둑에 덤불이 번져 길까지 확 퍼진 포기 갈래가 스물이 넘어도 뿌리 하나를 찾아 낫으로 똑 잘렸다. 그런 다음 풀을 둘둘 말아 힘주어 뒤로 젖히면 땅을 쥐던 환삼덩굴이 한덩어리로 뒤집힌다. 뒤집힌 자리는 풀이 홀라당 벗겨져 맨땅이 훤하게 드러났다. 환삼덩굴은 어머니 아버지한테는 골칫거리이다. 풀이 너무 잘 자라 걷고 나면 풀이 뒤덮고 또 덩굴 뿌리를 찾아 걷어야 했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95] 분꽃 분꽃이 떨어진 자리에 까만 씨앗이 앉았다. 움푹한 자리는 씨앗이 떨어지지 않게 감싼다. 한 알씩 집었다. 손에 잘 잡히지 않아 떨어진다. 우리 골목은 달리기 내기를 할 만큼 길다. 돌틈에 분꽃 하나가 아주 컸다. 마을 가꾸기를 한 뒤로 마을에 꽃이 많았다. 밖에서 딴 씨앗은 주머니에 넣고 우리 골목 꽃에서도 씨앗을 빼서 뜨락에 놓고 놀았다. 돌로 몇 알 깼다. 까만 씨앗 속에서 뽀얀 가루가 나왔다. 손등에 묻히니 밀가루가 묻은 듯했다. 볼에 발라 보았다. 버짐처럼 하얗다. 열두세 살에 어머니가 밭에 나가고 없을 적에 어머니 작은 소쿠리에서 화장품을 뒤졌다. 벽에 걸린 거울을 벗겨서 창살문 기둥에 세우고 어머니가 쓰는 분을 발랐다. 어머니 입술물(립스틱)은 얼마나 오래 썼는지 돌려도 올라오지 않는다. 어머니가 손가락에 찍어 바르길래 나도 새끼손가락에 찍어서 입술에 문질렸다.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보더니 ‘가시나가 쥐잡아 먹었나’ 꾸지람을 한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가 나가고 없는 날에는 빨간 입술물을 발랐다. 분은 어머니가 장에 가는 날 바르고 운동회 갈 때 바른다. 어머니가 화장하면 딱 붙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94] 닭벼슬꽃(맨드라미꽃) 순이네 담벼락과 앞집 담벼락이 끝나는 골목 안쪽에 우리 집이다. 골목이 길어 대문 밖에 앞집 담벼락이 우리 집 살피꽃밭이다. 마을 가꾸기를 한 뒤로 집집이 꽃을 심는데, 앞집 지붕으로 우리 골목 꽃밭은 그늘이 일찍 든다. 그나마 볕이 드는 자리에 맨드라미꽃이 피었다. 우리는 달구벼슬꽃이라 했다. 꽃이 우리에 키우던 닭볏하고 닮았다. 꼬불꼬불한 주름이며 붉은빛은 손으로 만지면 뽀송뽀송하고 매끄럽다. 짧은 털옷을 만지는 느낌이다. 꽃이 마르면 까만 씨앗이 촘촘하게 박히고 떨어진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닭이 씨앗을 쪼아 먹었다. 우리 먹을 밥도 모자랄 적에는 닭한테 먹일 모이가 없어서 키우지 못하다가 살림이 조금 나아져서 닭을 다시 들였다. 아침마다 닭집 문을 열어 주려고 가면 닭장 높이 홰를 타고 있다. 누구든 아침에 눈을 뜨면 닭장 문부터 열어주었다. 닭을 내쫓으면 마당 구석구석 흩어지고 거름을 파서 먹고 마당에 떨어진 알곡을 쪼아 먹는다. 보리를 바심하고 나면 마당에 떨어진 알곡이 많다. 풀어 놓은 닭은 마당에 흩어진 보리를 다 주워 먹고 대문을 나와 풀도 뜯어 먹고 마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93] 버즘나무 어린 날 학교 가는 길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논을 가로지른 길이다. 학교에는 버즘나무가 운동장을 둘러쌌다. 나무 사이에 매달아 놓은 그네를 타고 널놀이(시소)를 탔다. 운동회가 열리면 나무 밑에 마을마다 자리를 깔고 앉았고, 아이들이 청군 백군으로 앉았다. 나뭇잎이 커서 햇빛을 가려 주고 찬바람이 불면 손바닥 크기 나뭇잎이 떨어져 바람에 굴러다녔다. 버즘나무를 가만히 보면 껍질이 벗겨졌다. 어린 날 내 얼굴에 피던 마른버짐 같다. 어릴 적에 입가와 두 볼에 하얗게 동그라미로 피었다. 터실터실한 살갗이 가려워 긁는다. 얼굴이 말라 당겨도 촉촉하게 해줄 꽃가루(화장품)도 없고 연고도 없었다. 밥을 잘 먹지 못해서 얼굴에 허옇게 자주 피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고등어가 너무 먹고 싶어서 비육병에 걸렸다. 참으려고 해도 고기가 먹고 싶어 보다 못한 어머니가 읍내에 가서 고등어 한 손을 사 왔다. 아버지 혼자서 먹지 못하니 같이 먹었다. 얼굴에 버짐이 나도 약을 먹지 않고 저절로 삭도록 내버려 두었다. 버짐이 피다가 어느 날 말끔하다. 내 버짐이 언제 사라졌는지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는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92] 버드나무 우리 마을에는 냇가 논둑에 버드나무가 있었다. 학교서 오는 길에 버드나무를 꺾어 피리를 삼았다. 연필 깎는 칼로 자른 다음 손가락 굵기 나뭇가지 끝을 끊는다. 가지를 물을 짜듯 뒤틀고 얇은 가지 쪽을 잡아당기면 나무가 빠지고 속이 빈 껍질이 쏙 빠진다. 입에 물릴 자리에 동그란 껍질 끝을 접어서 0.5cm로 겉껍질을 훑으면 속껍질이 나온다. 입술을 입안으로 말고 입에 넣어 불면 굵직한 소리가 났다. 방귀 소리 같고 짧게 끊긴다. 소리를 내려고 오므리고 불면 입술이 얼얼했다. 피리는 가늘어도 안 되고 딱 연필 굵기 부드러운 작대기라야 조금만 비틀면 껍질이 빠졌다. 겨울 동안 잎을 떨구고 있던 버드나무는 봄눈을 틔우려고 봄볕이 따뜻한 사월에 물을 올린다. 겨울 동안 참았던 목마름을 적시느라 물이 무섭게 오를까. 물과 껍질이 따로 논다. 물을 너무 먹어서 속나무가 술술 빠졌다. 우리는 버드나무로 사월 한 철만 피리를 불었다. 여름이 되면 껍질이 안 틀어졌다. 학교 연못가에도 한 그루 있어 피리를 삼아 불었다. 자랐던 나무라서 맛이 쓰다. 집에서 불다가 놔두면 껍질이 말라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91] 도꼬마리 가을이면 밭둑마다 덤불마다 무덤가에도 도꼬마리가 자랐다. 밭일을 마치고 오는 아버지 가랑이에 붙고 내 바지에도 붙었다. 도꼬마리는 땅콩 한 알 크기에 사방으로 가시가 돋아 밤송이와 고슴도치 같다. 도꼬마리에 닿아 얼굴을 할퀴기도 하고 바지에 붙은 걸 떼다가 손가락이 찔리기도 한다. 도꼬마리가 누렇게 익으면 가시가 단단했다. 우리 아버지는 가을이 되면 바지에 도꼬마리와 도깨비바늘을 잔뜩 붙였다. 흙 묻은 바지를 벗어 하나하나 떼었다. 나도 바지에 붙은 도꼬마리를 뗐다. 도꼬마리는 왜 그냥 씨앗을 떨어뜨리지 않고 살짝만 스쳐도 엉겨붙을까. 갈고리 가시로 따가워서 긁는다. 다리와 팔에 할퀸 자국이 생긴다. 온몸이 갈고리 가시이면 벌레와 들짐승한테서 먹히지는 않겠다. 발이 없으니 짐승 털에 붙고 사람 몸에 달라붙어 둥지를 찾으러 숲을 떠날테지. 도꼬마리를 붙어 떼지 않고 벗어 놓으면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듣는다. 옷에 붙으면 떼는 일은 우리 몫이 되어 짜증이 났다. 그때 덤불을 지나던 아버지도 없고 우리도 없는데 도꼬마리는 어떻게 멀리 갈까. 숲속 동무들이 돕지 싶다. 멀리 가지 않아도 씨앗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90] 배롱나무 자주 가던 뒷골에 배롱꽃이 발갛게 피었다. 봄이면 개나리가 피고 여름이면 배롱꽃이 피고 겨울이면 눈꽃이 피는데 나무가 우거져 가지와 가지가 맞닿았다. 꽃도 나무도 참 곱다. 어린 날에는 배롱나무를 본 적이 없다. 나무가 매끄럽고 꽃잎이 꼬불꼬불 종이를 구겨 놓은 듯하다. 배롱꽃을 보면 어릴 적에 접던 종이꽃이 떠오른다. 봄과 가을에 학교 잔치가 열리면 언제나 마을잔치였다. 마을 언니들과 꽃을 만들었다. 얇은 종이를 몇 겹을 모아 부채꼴로 접어서 반으로 꺾어 실로 묶었다. 그런 다음 이 종이를 한 장씩 펼치면 꽃이 되었다. 배롱꽃빛이었다. 손가락에 묶고 고깔 모자에 실로 꿰매어 쓰고 춤을 췄다. 우리가 만든 종이꽃은 작약꽃만큼 컸지만, 종이가 하늘거려 배롱꽃을 닮았다. 여름에 배롱나무 굴을 지나면 붉게 배롱꽃이 피듯이 핏대를 높여 춤추던 종이꽃을 보는 듯하다. 꽃과 나무가 고와서 뜰을 건사하면 한 그루 가꾸고 싶은 나무이고, 배롱나무에 핀 꽃을 볼 적마다 운동장이 떠나갈 듯 부르던 우리 목소리가 피어난 듯했다. 2021.12. 06.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