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22. 체스 잃어버린 체스를 찾았다. 아들이 여덟 살 적에 설날에 절하고 심부름해서 돈을 모았다. 모은 돈으로 체스를 샀는데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동안 잊었다. 아들이 열 살 무렵 책상을 옮기다 찾았다. 손바닥 크기에 납작한 체스 상자가 오락기(닌텐도) 칩을 숨겨둔 곁에서 나왔다. 아들은 이름을 겨우 알아내고 두 누나를 꾀어서 체스를 했다. 조금 놀다가 큰누나가 방에 들어갔다. 차츰 밤이 깊어 가자 작은누나도 방에 들어간다. 먼저 들어간 큰누나한테 가서 놀자고 한다. 큰누나가 공부 끝내고 놀아 준다고 해 놓고 못 논다. 아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집에서도 왕따다. 으앙 으앙 으앙….” 그리고는 울면서 방에 들어간다. 우는 아이를 달래 보려고 뒤따라갔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는데 안쪽에서 문을 잠그고 또 운다. 이러쿵저러쿵 지치도록 혼잣말을 한다.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 연다. 잔뜩 골이 났다. 아들 방문 앞에 앉았다. 아들은 방에 나는 밖에서 문을 보고 말했다. 둘이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했다. 여느 날 같으면 끝까지 울음으로 버티지만, 뚝 그쳤다. 그리고 차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21. 라디오 책상맡에 앉아 책을 읽는데 문득 아들이 부른다. “엄마, 엄마는 귀에 꽂고 듣는데, 노래는 어디서 나와?” “라디오.” “그래? 엄마, 방에서도 들을 수 있나?” “그럼 들을 수 있어, 테이프 쪽 단추를 라디오 쪽으로 밀어. 다음은 볼록한 단추를 돌려서 빨간 줄을 88.1에 맞추고 또렷하게 소리가 들리면 손을 떼. 그러면 나와.” “어, 참말이네!” “빨간 줄을 다른 자리에 옮겨도 나오지만 뭘 하면서 듣기에는 시끄러워. 그냥 한 자리에 두고 들어 보렴. 소리는 낮추고.” “알았어. 엄마.” “곧 있으면 옛노래가 나올 거야. 가리지 말고 들어 보아.” “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너무 재밌어!” “책하고 노래만 있으면 하나도 안 심심해. 이제 좋은 동무 둘 생겼네.” 날마다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가 그날에야 귀에 들어왔을까. 노느라 들리지 않았지 싶다. 아들이 집에서 영어 듣기를 했다. 아들은 새것을 받아서 쓰고, 딸아이가 쓰던 오랜 것은 내가 물려받아 라디오로 삼는다. 딸한테서 물려받은 것은 작아서 자리를 덜 차지하니 책상에 올려 두었다. 아들은 영어를 듣는 카세트에서 라디오도 나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20. 빵 아이들이 기다리던 빵굼틀(제빵기)이 왔다. 두 아이하고 함께 종이상자를 뜯는다. 두 딸이 상자를 밑으로 당기고 나는 위로 잡아당겼다. 하얀 바탕에 네모낳고 묵직한 틀이 나왔다. 상자 바닥에서 책을 꺼냈다. 어떻게 쓰는가 알려주는 얇은 책하고 빵굽기를 담은 책이다. 우유 식빵 쪽을 펼친다. 책에 적힌 대로 해본다. 우유를 넣고 달걀을 하나 깨고 밀가루를 붓고 이스트하고 버터하고 소금을 넣고 단추를 누른다. 뚜껑은 속이 비친다. 가만히 보니까 네모난 속통이 돌아간다. 밀가루가 물하고 섞이고 차츰 덩어리로 바뀌면서 저절로 뭉친다. 뭉친 반죽이 벽을 탕탕 치면서 빙글 돌아간다. 빵이 다 되려면 세 시간쯤 걸린다. 두 딸은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다가 아빠가 불러서 어딜 나갔다 왔다. 그때까지 반죽은 돌아갔다. 돌다가 쉬고 하는데 부풀어오르지 않았다. 두 아이가 들어오자마자 빵이 다 되었는지 자꾸 물었다. 아직 남은 시간이 적혔는데 나는 기다리지 못했다. 뭔가 단추를 잘못 눌렸나 해서 멈췄다. 다시 처음부터 단추를 꾹 눌렸다. 반죽이 탕탕 이쪽 벽에 붙었다가 저쪽 벽에 붙었다 치기만 하고 탕탕 소리만 냈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9. 범옷 우리 집에 같은 띠는 용띠 둘, 원숭이띠 둘이다. 돼지띠는 하나이다. 아빠하고 아들은 용띠이고 엄마하고 큰딸은 원숭이띠, 작은딸을 할머니하고 같은 돼지띠이다. 용띠끼리는 서른여섯 살 차이가 나고 원숭이띠끼리는 스물넷, 돼지띠끼리는 예순 터울이다. 곁님은 두 딸 배내꿈을 꾸고 나는 아들 배내꿈을 꿨다. 아들이 열 살 무렵, 뜻대로 안 되어 골을 내는데, 스스로한테 풀어 몸을 다친다. 학교에서 꾸지람을 들으면 낮에 나오는 밥을 굶는다. 밥 굶는다고 집에서처럼 누가 달래 주지도 않는데 배가 고파도 안 먹는다. 밖에서 동무한테 한 대 얻어맞아 아프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리든지, 누가 때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으면 되는데, 아들은 운다. 잘 울어서 동무하고 어울리지 못할까 싶어 늘 한숨이 나왔다. 시월이 되었다. 풀죽지 말라고 아들을 북돋는다. 이튿날이 열 돌이다. 토요일에 동무를 집으로 부르고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나는 잠옷 하나를 마련했다. 태어난 날 아침에 아들을 기쁘게 달래면서 학교에 보내고 싶었다. 늦잠 자는 아들을 깨우면서 빛꾸러미(선물)를 건넸다. “자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8. 언니 한 해 끝자락 작은딸이 왔다. 푹신한 걸상 팔걸이에 잠옷을 얹었다. 짙은 파랑에 작고 하얀 점이 촘촘히 찍히고 단추 달린 옷이다. “엄마가 안동 간 날 문 앞에 있던 그 잠옷이가?” “응. 빨려고 내놓았지.” “아직 안 입은 옷 같던데?” “새로 샀으니 빨아서 입으려고 했지.” “그날 손빨래를 할 때 말하지. 엄마는 물리는 줄 알았어. 이쁘네!” “언니는 더 이뻐. 분홍빛이야!” “언니 잠옷 사줬나?” “아니, 이달에 둘이 돈 안 넣고 그 돈으로 똑같은 잠옷 샀지.” 새해라고 내게 돈 자루를 준다. 두 딸이 일 다니고 돈을 쪼개서 모은다. 그러께는 둘이 모은 돈으로 언니하고 이웃나라 태국을 다녀오고, 설날하고 한가위와 오월 어버이날하고 엄마 아빠 생일에 그 돈을 헐어 쓴단다. 두 딸이 준 돈은 기쁘게 받는다. 떠나갈 때는 내가 받은 돈만큼 찻삯으로 돌려준다. 두 딸이 돈을 모아서 같이 가고 같은 옷 입으니 부럽다. 나는 언니도 없고 여동생도 없다. 오빠 둘하고 남동생 둘이고 딸은 혼자다. 클 때 싸우고 놀던 바로 밑 동생하고 바로 위 오빠하고는 이야기가 조금 있지만, 모두 짝을 맺고 나서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7. 눕다 그러께 여름에 헌 자전거를 얻었다. 그날 하루는 아들이 해가 질 무렵에 자전거를 탔다. 집을 나간 지 삼십 분도 안 되어 발을 다쳤다. “엄마, 못에 찔렸어. 피가 많이 나!” “피 안 나게 얼른 양말 벗어서 묶어.” “아파 죽겠는데, 괜찮냐고 묻지도 않네?” “피가 흐르는데 그 말이 뭐가 그리 서운하노, 얼른 손부터 써야지. 어디고?” “아, 여기가 궁전 가까이 같은데, 몰다. 아파 죽겠어.” “엄마가 이제 나가는데, 있는 곳을 알아듣게 말해야 찾아가지. 엄살 그만 부리고 찾기 쉬운 간판이 뭐가 있는지 휙 둘러 보아.” “아. 엄마. 피가 뚝뚝 떨어져!” “가까운 아무 가게라도 들어가서 도움을 받아.” 운동화를 신고 타라고 그만큼 말해도 안 듣고 끌신을 신어 다친다. 피가 뚝뚝 떨어져서 무서운지, 피를 많이 흘려 티나게 하고픈 지, 못에 찔려서 아픈지 다 큰 녀석이 징징댄다. 내 말을 안 들어서 나도 고운말이 안 나왔다. 아들이 있는 곳을 똑바로 말해 주지 않아 차를 몰고 이쪽 길로 갈지 저쪽 길로 갈지 두 길을 두고 머뭇거렸다. 차를 한쪽으로 세우고 아들한테 전화했다. 낯선 아저씨가 받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6. 독서실 새해 아침에 아들이 전화했다. “엄마 새해 복 많이 받아.” “그래, 고맙다 아들.” “오늘도 일 나가나?” “응. 가야 하는데 엄마가 아파서 누웠어.” “아프지 마, 엄마!” 초등학교 때까지 해마다 마지막 날은 한지붕 이야기를 했다. 둥글게 둘러앉아 막내부터 돌아가면서 아쉬운 일과 새해 다짐으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2020년에는 오랜만에 모인다는 생각에 모두가 마음이 부풀었다. 곁님은 애들 데리고 어디로 갈까, 딸은 산으로 가자, 아들은 맛있는 밥 잔뜩 먹고 싶어 하고, 나도 꼭 할 말이 있었다. 어린 날 내가 한 몹쓸짓을 봐달라고 비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그러나 돌림앓이가 우리를 가로막았다. 첫째 아이는 차표를 물리고 아들은 군대에서 10월부터 쉬는 날이 밀리고 11월에도 밀렸다. 집에 온다고 제 통장으로 들어간 재난지원금도 아들이 집에 못 와서 그대로 날리고, 12월 31일에 나와 닷새를 쉬어 간다고 기뻐했다. 틈새두기 탓에 큰딸도 못 오고 아들도 쉬는 날을 몇 차례 빼앗기고 이렇게 전화로 한 해 마음을 보낸다. 우리는 군대 간 아들한테도 못 가고, 아들은 여름 끝에 다녀간 쉼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5. 짐꾼 아들하고 가게에 갔다. 유리문이 활짝 열리자 아들이 저쪽으로 뛰어가서 수레를 끌고 온다. 잿빛 장바구니를 얹은 작은 수레에 봄나들이 가서 먹을 샛밥을 골라 담는다. 어쩐 일인지 좋아하는 과자를 안 사고 부피가 큰 과자 둘 담는다. 모자랄까 해서 아들이 좋아하는 초코송이하고 고래밥을 슬쩍 담아 놓았다. 돈을 내는 동안 아들은 가게에서 거저 주는 네모난 종이상자에 주섬주섬 담는다. 이제 상자를 들려고 보니 아들이 먼저 든다. “엄마, 내가 들고 갈게.” “안 무거워?” “어, 괴안아 나는 남자잖아.” “앞 잘 보고 천천히 가.” 자동차를 반듯하게 세우는 동안 아들이 엘리베이터 단추를 꾹 누르고 기다린다. 계단을 둘씩 건너뛰어 오르자 아들이 짐을 무릎에 올리고 상자를 벽에 기대다가 꼭 누르던 손을 떼더니 깨금발하고 10층 단추를 누른다. 짐을 풀고 쌀을 씻는데 방에 들어갔다 나온 아들이 노란 쪽지를 둘 건넨다. “잠 와. 잠 와. 잠 와. 잠 와. 초특급 잠 와.” “엄마 잠 오면 어떡해? 풀이?” “잠 오면 자야지” 말을 마치자 마룻바닥에 벌러덩 눕는다. 빙 둘러서 말하고 얼렁뚱땅 숙제를 미루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4. 천 원 다발 학교에 간 아들이 전화기 너머로 조른다. “엄마, 멜로디언하고 리코더 갖다 줘!” “너 그럴 줄 알았어.” 어디에 두었더라, 붙박이장을 열었다. 아이들 문구만 두었기에 부피 큰 멜로디언을 쉽게 찾는다. 리코더는 또 어디 있더라, 학교 종이 울리면 어떡하나. 마음이 바쁘다. 단소는 첫째 아이만 썼으니 거기 있을지 몰라. 첫째 아이 무지개 서랍장 맨 밑 칸을 당긴다. 단소를 둔 곁에서 분홍빛 리코더를 찾았다. 차를 몰고 길 건너 학교로 갔다. 아들이 전화 한 뒤로 쭉 문 앞에서 기다렸는지, 돌기둥에 앉았다가 빨간빛 차를 보고 저만치에서 웃으며 달려온다. 창문을 내리고 애써 찾아온 악기를 건넨다. 근데 아들이 손을 내밀다 멈춘다. 손에 든 악기를 빤히 바라보던 아들 낯빛이 갑자기 뾰로통하다. “왜 그래, 늦겠다 얼른 받아?” “쪽팔리게 빛깔이 이게 뭐야? 너무 했다.” “누나들한테서 물려받아 쓰는 거라 괴안아, 다들 그래.” “멜로디언은 크니깐 그럴 수 있다지만, 리코더는 그렇잖아.” 파란빛을 좋아하는 아들이 누나가 쓰던 꽃분홍빛 리코더를 보자 마지못해 건네받고 샐룩샐룩하며 들어간다. 빛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3. 회초리 편지통을 추스르다가 바닥에 깔린 첫째 아이 일기장을 펼쳤다. 아홉 살 적에 쓴 일기에 셋째 아이 이야기를 썼다. 병원에 따라가서 뱃속 아기를 본 다음 참으로 아기를 빨리 보고 싶어 했다. 태어날 날이 가깝자 아기 옷을 사러 간 이야기도 적혔다. 두세 줄뿐이다. 일기에 있던 아기가 태어나 어느덧 그 애도 아홉 살이 되었다. 며칠 앞서 갖은 일이 슬그머니 드러났다. 아들이 2학년이 된 이레에 일어난 일이다. 첫날인 월요일에 집몫(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네 번 했다. 전화를 받으니 아주 크게 소리내며 엉엉 우는 소리만 들린다. 나는 우는 소리에 다친 줄만 알고 깜짝 놀랐다. “학원에서 카드 잃어 버렸어!”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엉엉 우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밖으로 새어나왔다. 아이도 새 학년 올라간 첫날이지만 나도 이날은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긴 첫날이라 사람들 눈치를 살핀다. 곁에 앉은 사람한테 우는 소리가 들릴까 싶어 얌전하게 말했다. “엄마 일 마치고 집에 가서 사줄게, 알았지?” 아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내가 한 말을 지키려고 빨리 달려왔다. 학교 앞 문구점으로 아들을 데리고